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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77)화 (176/1,192)

제177화

백천범은 경계심이 강해 늘 얕은 잠만 잤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는 손발이 저릿했지만 그래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녀가 그의 품에서 잠든다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경계심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녀에게 그는 신뢰할만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오빠로 지낼 때의 장점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백천범은 혼미한 정신에도 배가 아픈 듯 간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결국 깨지 않고 몸을 뒤척여 그의 품 안에서 편안한 자세를 잡고 곤히 잠들었다.

* * *

꿈속에서 그녀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소변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측간을 찾을 수 없자 초조함에 이마가 땀으로 흥건해졌다. 배를 움켜쥔 채 사방을 뛰어다니며 볼일을 해결할 만한 장소를 찾아다녔지만 어딜 가든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때, 갑자기 아랫배가 밑으로 쏠리는 듯하더니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기분이 이어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묵용감의 품속이었다.

그가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따스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오? 꿈을 꾸었소?”

백천범은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와, 왕야, 어째서 아직 계신 거예요.”

가슴이 먹먹해진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왕비의 배가 아프니 내가 보살펴 주어야 하지 않겠소.”

백천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몸을 움직이자 곧장 무엇인가 흐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린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 어서 돌아가시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배가 또 아픈 것이오?”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잘 익은 새우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밀어내기만 했다.

“아이참, 가라면 좀 가시어요.”

조급해하면서도 아양을 떠는 듯한 말투에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런 일에는 난처한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가 침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월규와 월향을 불러주겠소.”

그녀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더 이상 놀리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월규가 월향이 들어오자 백천범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어떡해. 또 옷이 더러워진 것 같아.”

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 백천범은 매번 옷을 더럽혔다. 월향과 월규에게 빨랫감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늘 민망해했다.

월향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그리 큰일입니까. 더러워지면 빨면 되지요.”

월규는 그녀의 자세가 조금 어색해 보였다.

“왕비 마마, 왜 그렇게 앉아 계십니까.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백천범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움직이면 침대까지 더러워질까 봐 못 움직이겠어.”

월규가 말했다.

“아이고, 마마. 괜찮습니다. 하인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월향이 따뜻한 물을 받아왔다. 두 시녀는 백천범을 씻긴 뒤 말끔하게 뒤처리를 마쳤다. 백천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가 되는 건 이게 참 불편해. 너무 성가시잖아.”

월향이 말했다.

“이런 고충 없이는 아이를 낳는 것도 불가능한걸요.”

백천범이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나도 아직 아이 같은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어.”

월규가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서 왕야의 대를 이으셔야지요. 왕자 아기씨를 낳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백천범은 두 시녀에게 이미 묵용감과의 관계를 말해 주었지만 둘 다 들은 척도 않고 늘 묵용감과 한데 묶으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더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만약 그녀가 아기를 낳게 된다고 한들 묵용감의 아이는 아닐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마도… 사장풍일 가능성이 컸다.

* * *

찬합을 열어 본 추문은 또다시 멀건 국을 마주하고 화를 참지 못했다.

“왕야께서도 참으로 몰인정하십니다. 저희를 굶겨 죽이시려는 건가 봅니다.”

수원상이 말했다.

“왕야께서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관여하지 않으신다.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지.”

추문이 깜짝 놀라 물었다.

“마마, 그 말씀은…….”

그녀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남쪽을 가리켰다.

수원상이 냉소를 지었다.

“증인이 죽었으니 증거도 사라진 셈이지. 술수가 제법이구나.”

추문이 조급해하며 말했다.

“마마, 그렇다고 죽기만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슨 방법이라도 취해야 할 것입니다. 대감마님께 이 소식을 전해 도와 달라고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내가 무슨 수를 쓸 수 있겠느냐.”

수원상이 탄식하며 말했다.

“친위병이 저리 빈틈없이 지키고 있는데,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느냐? 아무런 방법도 없으니 그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추문이 울먹이며 말했다.

“마마, 이리 포기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지난번 소란을 겪고도 왕야께서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으셨으니, 소인 생각에는 왕야께서 마마를 믿으시는 듯합니다.”

“날 믿는다?”

수원상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천범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으실 것이다.”

추문은 충직한 노비였다. 수원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음만 기다리자 가슴에 불이 붙은 듯 초조했다.

그녀는 큰아가씨 혼사에 함께 보내진 시녀였다. 친정을 떠나기 전, 주인마님은 그녀에게 큰딸을 잘 보살펴 달라고 수도 없이 당부했다. 하지만 끝내 이런 꼴이 되어 버렸다.

큰아가씨가 억울하게 명을 달리한다면 그녀가 무슨 낯으로 대감마님과 주인마님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큰아가씨를 따라가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상심이 극심했던 큰아가씨는 삶의 의욕까지 잃은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추문까지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친위병을 자세히 관찰하던 그녀는 그들의 교대 시간을 알아냈다. 그녀는 그 틈을 타 벽에 난 개구멍으로 기어 나왔다. 대학사의 저택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걸음도 가지 못하고 친위병에게 붙잡혔다. 도망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친위병의 손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친위병이 순간적으로 손을 놓자 그녀는 잽싸게 도망쳤고, 당황했던 나머지 길을 잘못 들어 남월각에 뛰어 들어왔다. 남월각 무수리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누가 이렇게 괴팍하게 들어오는 거야? 왕비 마마께서 놀라시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뒤이어 친위병이 뛰어 들어와 그녀의 팔을 뒤로 꺾더니 그녀를 꿇어앉히려 했다.

정원이 소란스러워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와 상황을 확인한 사람은 백천범이었다. 추문을 보고 깜짝 놀란 그녀가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친위병이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소인이 제대로 지키지 못해 저 시녀가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놀라게 해 드려 송구하옵니다, 왕비 마마.”

백천범은 손이 뒤로 꺾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추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손을 풀어 줘요. 아파하잖아요.”

친위병은 조금 의아했다.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백천범은 직접 친위병을 밀쳤다.

“추문은 아가씨고 친위병은 사내잖아요. 이렇게 세게 누르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이것 봐요, 팔에 자국이 남았잖아요.”

월규가 다가와 그녀를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무엇 하러 이런 일에 신경을 쓰십니까.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을 때, 소인이 측왕비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빈정대며 무책임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측왕비는 측왕비고 나는 나야. 내 처소에 들어왔는데 신경 쓰지 말라니.”

추문은 그녀의 말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 저희 마마 좀 살려 주십시오.”

백천범이 말했다.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봐. 측왕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병이라도 난 거야?”

“저희 마마께서 갇혀 지내신다 해도, 왕야께서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으셨으니 아직은 측왕비이십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보내지는 밥이라고는 멀건 국에 밥알 수를 셀 수 있을 정도의 밥이 전부입니다. 저희 마마를 굶겨 죽이려는 것입니다.”

추문의 말에 백천범은 깜짝 놀랐다.

“말도 안 돼. 앞뜰 주방에는 쌀도 있고 찐빵도 있는데. 그런 죽을 보내다니.”

“죽도 아닙니다. 죽은 걸쭉하기라도 하지요. 왕비 마마께서 직접 보시면 바로 아실 것입니다.”

배를 자주 곯았던 백천범은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초왕의 저택이었다. 이곳에서 굶는 일이 생기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밥을 굶는 사람은 측왕비였지만, 밖으로 소문이 퍼졌다간 왕야의 체면만 깎일 것이었다.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던 백천범은 추문과 함께 낙성각으로 향했다. 월규는 화가 나서 발을 굴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월향과 함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백천범이 낙성각으로 들어가려 하자 친위병들은 퍽 난감했다. 하지만 초왕이 끔찍이 아끼는 왕비였으니 안으로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신 몰래 사람을 보내 회림각에 이 소식을 알렸다.

수원상은 백천범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예전에는 겉치레로나마 백천범에게 예를 갖췄지만 이 꼴이 되어버린 지금, 그것도 백천범 때문에 이 모양이 된 그녀는 예를 갖추는 척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백천범을 무시했다.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찬합에 담긴 음식을 확인했다. 추문이 말한 대로 멀건 국에 밥알 몇 개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이걸 정말 밥이라고 보냈다고요? 누가 한 짓인지 제가 직접 찾아가야겠어요!”

수원상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렇게 된 꼴을 보시니 기분이 좋으시겠지요.”

백천범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를 보고 제가 왜 기분이 좋아요? 언니가 굶어 죽는 게 제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언니가 절 업신여기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는 언니를 업신여긴 적 없어요. 언니는 대학사 가문의 아가씨니까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나죠.

하지만 언니는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도 많은데도, 마음씨가 나빠서 사는 것도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왕야께서는 바로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셔서 언니를 가두신 거고요.”

수원상이 코웃음을 쳤다.

“지난번 일을 제가 꾸몄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제가 노랑이를 죽이고 뒷산으로 왕비 마마를 꾀어냈다고요?”

백천범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언니가 아니라고 하면 언니를 믿을게요.”

수원상이 냉소를 지었다.

“저는 결백하지만 왕비 마마의 믿음 따윈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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