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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76)화 (175/1,192)

제176화

묵용감은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두 처에게 빚을 진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잘못을 백천범에게 뒤집어씌워서는 안 되었다.

“본왕도 인정하오. 그 점은 본왕도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그 일과 이번 일은 다르오. 본왕을 증오하면 될 것을 어째서 왕비에게 손을 썼단 말이오?”

“죄를 뒤집어씌우려고만 한다면 그 구실은 언제든 만들 수 있는 법이지요.”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결국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왕야께서 소첩을 내쫓으시려고 구실을 만드신 것이겠지요. 소첩이 왕비 마마께 독을 타다니요. 소첩은 그간 처소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는데 어찌 독을 타고, 어찌 외부인과 접촉을 한단 말입니까?”

묵용감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을 쓴 것은 연금되기 전이었소. 당신이 충분한 은자를 쥐여 준 덕에 약을 달일 때마다 무수리가 독을 넣었으니 굳이 접촉할 필요는 없소.”

슬픔과 절망감에 빠진 수원상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꼬리만 들어 올려 기이하게 웃어 보였다.

“좋습니다. 왕야께서 믿지 않으시니 소첩도 더 할 말이 없지요. 소첩이 죽음으로 결백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빠르게 벽으로 달려갔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다들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벽으로 돌진했다.

그 순간, 묵용감이 눈 깜짝할 사이에 긴 팔을 뻗어 그녀의 앞을 막아섰고, 수원상은 그의 팔에 그대로 머리를 부딪쳤다.

깜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린 뒤,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왕야, 왜 저를 막으시는 것입니까. 어째서 이 한 몸 죽을 수도 없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녀가 온 힘을 다해 부딪힌 탓에 묵용감은 팔이 저릿했다. 그가 힘껏 팔을 털며 차갑게 말했다.

“본왕은 악랄한 짓을 저지른 자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자를 쉽게 죽이지도 않소. 죄를 묻지도 않고 한을 품을 귀신이 되게 할 수는 없지.”

그가 목청을 높여 영구를 불렀다.

“무수리를 이리 데려오너라. 측왕비와 대질을 할 것이다.”

영구는 문 앞에서 명을 받들었다.

묵용감은 차가운 시선으로 수원상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넋이 나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조차 섞기 싫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구가 돌아왔다. 무수리는 고개를 숙인 채 덫에 걸린 메추리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묵용감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보거라. 만약 본왕에게 거짓을 고했다간 능지처참을 할 것이다. 알겠느냐?”

무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엎드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고했다.

“측왕비께서 먹어도 죽지 않는 약재이니 약을 달일 때 추가로 넣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소인에게 은자를 주셨습니다. 감히 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소인도 어쩔 수 없이…….”

“허튼소리!”

수원상이 달려 나가 무수리를 일으키더니 마구 뺨을 때리며 소리쳤다.

“대체 누가 날 모함하라 지시한 것이냐? 어서 말하거라. 말하지 않으면 널 죽여 버릴 것이다!”

무수리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수원상의 손은 쉴 새 없이 그녀의 뺨을 휘갈겼다. 묵용감은 의자에 앉아 차가운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끝내 수원상의 손에서 벗어난 무수리가 울부짖었다.

“왕야, 소인은 진실만을 말씀드렸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죽음으로 증명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있는 힘껏 머리를 벽에 댔다. 다들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쿵 소리를 내며 그대로 벽에 돌진했고, 이내 몸을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고꾸라졌다.

무수리에게 다가가 호흡을 살펴본 영구는 묵용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원상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이내 창백해진 얼굴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죽음으로 증명하겠다더니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떠나 버린 것이었다.

다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리며 애를 태웠지만, 묵용감은 무표정하게 벽에 남은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죽은 사람을 수도 없이 본 그였다. 게다가 벌을 받아 마땅한 무수리였으니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놀란 것은 여인들이 한번 마음을 먹으면 누구보다 모질게 군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으로 증명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정말 이렇게 목숨을 저버리다니.

수원상도 마찬가지였다. 온 힘을 실어 벽으로 달려간 그녀를 막지 않았다면 지금쯤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은 무수리가 아닌 수원상이었을 터.

죄가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포기했단 말인가, 아니면 정말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한 것인가? 무수리의 죽음으로 사건의 갈피를 잡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수원상은 모든 기력이 다 빠진 듯 녹초가 되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평소의 단정하고 고상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두워진 그녀의 눈빛은 곧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절망만 남아 있었다.

낙성각에서 벌어진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했다. 친위병이 입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누구도 밖으로 나가거나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낙성각 노비들의 입단속도 단단히 시킨 터라, 그들은 감히 이 일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무수리의 죽음은 돌멩이가 던져진 물처럼 잠시 소란을 일으켰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 * *

조정에서 돌아온 묵용감은 말에서 내린 뒤 고삐를 내팽개치고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남월각에 들어서자 정원에서 토끼와 놀고 있는 백천범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당근 한 조각을 쥐고 토끼를 앞으로 유인하고 있었다. 이내 묵용감을 발견한 그녀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왕야, 이리 급하게 찾아오시다니요. 무슨 일 있으세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더 의아했다.

“내가 급하게 찾아왔다는 걸 어찌 알았소?”

백천범이 손으로 그의 옷을 가리켰다.

“조복朝服도 갈아입지 않으셨잖아요.”

묵용감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수룩한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이따금 제법 영리했다. 조급하게 찾아오긴 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오늘이 백천범의 월경 날이었다. 그녀가 아플 때마다 그는 늘 가슴을 졸였기 때문에 곁에서 지켜 주어야 했다.

하지만 서둘러 와 보니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깡충거리며 토끼와 놀고 있었다. 그는 좌당중이 원망스러웠다. 날짜 계산도 못 하면서 무슨 의정을 하겠다고.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왕비를 찾아온 것이 아니오. 그저 지나가던 길에 잠시 들른 것뿐이오.”

백천범이 말했다.

“아… 저는 왕야께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하시려는 줄 알았어요.”

묵용감은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를 살짝 찌르며 말했다.

“종일 먹는 것밖에 모르는데 어째 키는 그대로인 듯하오.”

“어딜 봐서요. 어제 월규가 재 보았는데 두부껍질만큼은 컸다고 했어요.”

묵용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두부껍질은 종이처럼 얇은데, 그 정도도 큰 것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놀던 거 마저 노시오. 난 이만 가보겠소.”

등 뒤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히 가세요, 왕야.”

그녀는 그를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다. 묵용감은 씁쓸한 웃음을 내비쳤다. 그의 진심은 가련하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가 막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갑작스레 그녀의 짤막한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월규가 급히 그녀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왜 그러십니까?”

묵용감은 곧바로 그녀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방으로 향하며 시녀에게 분부했다.

“서둘러 따뜻한 물주머니를 준비하거라. 월경 기간에 필요한 것들은 제대로 준비한 것이냐?”

월규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필요한 물품을 제대로 준비하긴 했지만 사내인 초왕이 분부를 내리자 쑥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초왕의 품에 안긴 백천범은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고통을 참기 어려운 듯했다. 월규는 무수리에게 서둘러 물품을 준비하라 이른 뒤 초왕에게 말했다.

“지난번 의원께서 약을 마시면 좋아질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이리 통증이 심한 것입니까?”

묵용감이 얼굴을 굳혔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약에 다른 약재를 탄 것도 모르고! 내일 당장 백천범이 독살당한다고 해도 이들은 멍청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몰랐다 할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백천범을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아랫배를 힘껏 누르며 옅은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통증이 심한 부위를 문질러 주었다. 찡그린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고개를 들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왕야의 손은 정말 따뜻해서 물주머니보다 좋아요.”

그녀는 이가 다 드러나도록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우느니만 못한 표정이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알겠소. 그만 말하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따뜻한 물주머니를 가져왔다. 그는 그녀의 옷 안에 물주머니를 집어넣고 손으로 감쌌다.

“좀 괜찮아지는 듯하오?”

그녀는 짧게 대꾸하더니 뻣뻣해진 몸을 그의 품에 기대었다. 월향이 흑설탕을 녹인 물을 가져왔다. 묵용감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먹여 주었다. 설탕물이 뜨거웠는지 그녀는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홀짝거렸다.

묵용감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가 좋았다. 왜 이렇게 그녀가 사랑스러운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지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반 그릇 정도 비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강요하지 않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불을 꼼꼼히 덮어 준 그는 그녀의 머리에 턱을 댄 채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그녀는 꼭 나른한 고양이 같았다. 그는 두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며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눈치 빠른 시녀들이 밖으로 나간 덕에 방 안은 아주 고요했고, 그녀의 숨소리만 작게 울려 퍼졌다. 방금 마신 설탕물 때문인지 그녀가 내뱉는 숨에서 옅지만 달콤한 향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이 조금씩 묵직해지더니 그의 가슴을 눌렀다.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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