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한편, 그녀를 안고 있는 묵용감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얘기한 것이었다. 그는 정말로 괴로웠다. 날마다 그의 시야에 머물던 백천범이 갑자기 후원으로 돌아간다니 마음이 너무 공허했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감싸 안고 밤바람에 차가워진 서로의 몸을 녹여 주었다. 백천범은 가족처럼 그를 안아 준 것뿐이었지만, 묵용감에게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는 백천범이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안아 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미칠 듯이 기뻤다.
그가 조심스레 손을 풀고 그녀의 표정을 확인했다. 설마 드디어 그의 마음을 깨닫고, 그를 받아 주려는 것인가?
그가 손을 풀자마자 백천범은 자신의 자그마한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요. 왕야는 대장부시잖아요. 잠깐이면 괴로움도 다 사라질 거예요.”
“…….”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야, 저 같은 여동생이 있어서 좋으시지요? 속상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다 털어놓으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
“앞으로 저도 고민이 있으면 왕야께 말씀드릴게요. 제가 괴로울 때 왕야께서도 제가 기댈 수 있게 어깨를 내어 주셔야 해요. 알겠죠?”
그녀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넉살 좋게 웃었다.
“비록 친남매는 아니지만 왕야께서는 제 친오빠들보다 더 잘해 주시잖아요. 왕야 같은 오빠가 생긴 것도 다 제가 복이 많기 때문이에요. 나중에 왕야께서 연세가 많이 드시거든 제가 정성을 다해 왕야를 모실게요.”
“…….”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는 그녀와 부부 사이라 생각하는데, 그녀는 여전히 그와 남매 사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 정성을 다해 모신다니……. 그가 정말 그리도 늙었단 말인가? 너무 늙어 오라비로 외엔 생각할 수 없단 말인가?
그는 힘겹게 마음을 안정시킨 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그리 늙은 것 같소?”
“아뇨, 왕야께서는 한창 혈기 왕성한 청춘이신데 늙다니요?”
“그럼 정성을 다해 모신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오?”
“왕야께서 어린 절 지켜 주시니까 나중에 제가 크면 마땅히 왕야를 잘 모셔야지요. 그게 바로 인지상정이니까요.”
묵용감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와는 무슨 말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그가 괴롭다고 한 것은 그녀가 다시 남월각으로 돌아가는 것 반, 사장풍 때문이 반이었다. 그는 마음이 짓눌릴 것만 같았다. 이번 기회에 그녀의 뜻을 묻고 싶었다.
“사장풍과는…….”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황급히 남월각으로 뛰어갔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묵용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씁쓸한 기분이 밀려왔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알아서 다 해 달라니.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한단 말인가! 화가 치솟은 그는 한참이나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고청접은 창가에 기대 호숫가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모든 일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호숫가에서 수작을 부리는 듯하더니 백천범이 돌아가려 하자 그가 백천범을 꽉 끌어안았다.
순간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내뱉은 그녀는 자신이 안긴 것처럼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껏 끌어안는 그의 팔 힘과 따뜻한 품이 상상되었다.
그의 품에 안긴 사람이 그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었다. 설사 측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해도 그가 그녀를 바라봐 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망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백천범을 증오했고 묵용감을 미워했다.
중매로 맺어진 혼사는 흔하디흔한 일이니 초왕에게 시집온 걸 후회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싫다 해도 묵용감은 아이를 갖는 최소한의 의무는 다해야 했다. 그래야 사랑은 받지 못할지언정 아이를 보며 견딜 수 있었다.
대갓집 규수였던 그녀는 저택 여인들의 애환을 잘 알고 있었다. 서너 명의 첩을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처첩들은 남편이 아닌 자식들에게 의지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두 사람이 준 상처를 반드시 갑절로 갚아 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 *
남월각에 돌아온 백천범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약을 먹어야 했다. 유일첩이 조제해 준 월경 약이었다. 그는 월경 전후로 닷새간 이 약을 먹으면 월경통이 사라진다고 했다.
월경통이 심각했던 백천범은 통증이 시작되면 장이 마구 꼬이는 것처럼 괴로웠다. 약을 싫어했던 그녀도 이 약만큼은 얌전히 들이켰다. 약을 다 마시고 나면 쓴맛을 달래기 위해 월규가 곧장 말린 매실을 그녀 입에 넣어 주었다.
남월각을 떠난 지도 보름이 지났던지라 토끼 두 마리도 몸집이 제법 커져 있었다. 하지만 담은 그대로인 듯 심하게 낯을 가렸다. 그녀가 쓰다듬으려 하자 설구는 몸을 벌벌 떨었고 구구는 울기 시작했다.
구구의 울음소리에 백천범은 노랑이가 떠올랐다. 담력이 좋았던 노랑이는 그녀의 성격과도 꼭 닮아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느새 목이 메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켜 떫은 기운을 달랬다.
유모는 늘 그녀에게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산 사람은 앞만 보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야 죽은 가족들이 안심하고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고 했다.
닭도 하늘에 갈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유모 말대로라면 착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고 나쁜 사람은 땅으로 떨어지니 노랑이처럼 착한 닭은 분명 하늘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늘에 있는 유모가 노랑이를 만난다면 분명 잘 돌봐 줄 테니 그녀는 기쁘게 지내는 모습을 둘에게 보여 줘야 했다.
* * *
묵용감은 정보가 누설되는 걸 막기 위해 백천범이 약을 먹는 며칠간 그녀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밀려오는 걱정은 감출 수 없었다. 약한 독성이라 목숨을 해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좌불안석으로 지냈다.
밤이 깊어도 도저히 잠이 들지 못하자 그는 결국 홀로 후원을 찾았다.
남월각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단잠을 방해할 수 없었던 그는 목석처럼 서서 한참 동안 밖을 서성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달이지 않은 약재 한 봉을 몰래 가져온 뒤, 전날 약을 달이고 남은 찌꺼기와 함께 좌당중에게 보냈다. 하지만 약재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달이지 않은 약은 처방전에 적힌 그 약이 맞았고, 달이고 난 찌꺼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인즉슨 유일첩의 약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약을 달이는 도중에 손을 쓴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제법 똑똑한 자였다. 약을 먹는 기간 중 임의로 날을 정해 손을 쓴 게 분명했다. 그러니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제법 공을 들여야 했다.
어차피 닷새 안에 끝날 일이었기 때문에 묵용감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인내심을 가져야 흉악한 악질을 잡아들일 수 있었고, 백천범도 진정으로 평온한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닷새가 되는 날, 좌당중은 드디어 약 찌꺼기에서 처방전에 없는 약재를 찾아냈다.
흔치 않은 약재였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지만, 다행히 견식이 뛰어난 좌당중은 이 약재를 알고 있었다. 그 약재는 진균증眞菌症을 유발하고 몸을 차게 하여 여인의 불임을 야기할 수 있었다.
불임? 눈을 가느다랗게 뜬 묵용감의 눈빛에 싸늘한 기운이 어렸다. 황제의 후궁들 사이에서나 쓰이는 수법이 그의 후원에서 쓰이고 있었다. 목숨을 해하는 대신 어미가 될 권리를 앗아 가려 하다니.
사실 그는 수원상과 고청접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두 사람을 들일 때만 해도 아이를 낳고 잘 지내보려 했지만, 계획은 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고 지금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니 그들과 엮일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들에게 퇴로를 만들어 주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가 방법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그들이 손을 써 버렸다.
상관없었다. 도리어 그들이 그의 일을 줄여 준 꼴이었다. 못된 심보를 가진 여인에게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그는 그날 약을 달인 무수리를 잡아 와 추궁했다. 처음엔 모른다고 잡아떼더니 채찍질을 한다는 말에 몸을 벌벌 떨다 결국 측왕비에게 금전을 받고 약재를 더 넣었다고 털어놓았다.
측왕비가 그녀 앞에서 약을 한 입 먹고 사람을 해하는 약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 뒤에 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 약재를 넣을 땐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약을 다 마시고도 왕비에게 아무런 탈이 없자 계속하게 되었다고 실토했다.
크게 성이 난 묵용감은 무수리를 발로 힘껏 걷어찬 뒤 곧장 낙성각으로 향했다.
수원상은 화장대에 앉아 추문의 시중을 받으며 뒤꽂이를 꽂고 있었다. 밖에서 노비들이 깜짝 놀라 인사를 올리는 소리에 묵용감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그를 맞이하려 막 두 걸음 정도 뗀 순간, 묵용감이 그녀 앞으로 다가오더니 있는 힘껏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 무방비 상태였던 그녀는 정확히 흉부를 걷어차이고 땅에 쓰러졌다.
노비들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추문만이 그녀를 일으키며 울부짖었다. 추문이 무릎을 꿇고 묵용감에게 청했다.
“왕야, 모두 소인의 책임입니다. 부디 마마를 용서해 주십시오. 때리시려거든 소인을 때려 주시옵소서!”
너무 심하게 걷어차인 수원상은 목에서 비릿한 맛이 올라왔다. 아무리 삼키려 해도 삼켜지지 않아 결국 새빨간 피가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소매로 입가를 훔친 뒤, 단정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왕야. 소첩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까? 이렇게 화가 나실 만한 일이라면 소첩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 주십시오.”
“좋소. 본왕이 묻겠소.”
묵용감이 얼굴을 굳히고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물었다.
“왕비의 약에 독을 타라고 사주한 일이 있소?”
수원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왕비 마마께 독이라니요? 왕야, 대체 어디에서 그런 말씀을 들으신 것입니까? 그런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없다? 당신의 사주를 받은 사람을 잡아들였으니 그리 잡아뗄 것 없소. 대갓집 규수가 이런 악랄한 짓을 하다니! 참으로 소름 끼치는 일이오.”
수원상은 그를 올려보더니 용감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 소름 끼치는 분은 왕야이십니다. 소첩은 왕야께 정식으로 시집온 사람입니다. 한데 왕야께서는 하루라도 부부의 책임을 다하신 적 있으십니까? 소첩을 따뜻하게 보살펴 준 적 있으십니까?
왕야께서는 소첩을 후원에 방치하고 신경도 쓰지 않으셨지요. 왕야께는 오직 왕비 마마밖에 없으시니까요. 애당초 왜 첩을 들이신 것입니까?
소첩은 사람이지 장식품이 아닙니다. 소첩에게도 감정이란 게 있습니다. 왕야께서는 그간 무엇을 하셨습니까? 시집온 지 한 달이 넘도록 합방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제가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