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배불리 먹은 백천범은 묵용감의 품에 축 늘어진 채 나른한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자신이 묵용감에게 바짝 붙어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와 알고 지낸 시간이 점점 깊어질수록 그녀는 묵용감에게 더 많이 의지했다. 이미 그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길 정도였다. 어디서든 그와 함께라면 마음이 놓였고,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묵용감은 고개를 숙이고 몰래 그녀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러다 서태비가 상으로 내린 비녀가 눈에 들어오자 그가 조용히 물었다.
“이 비녀가 맘에 드오?”
정신이 살짝 혼미했던 백천범은 겨우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 좋아요.”
묵용감은 잠시 망설이다가 또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태비 마마가… 좋소?”
“좋아요.”
묵용감은 마음을 놓았다. 태비가 좋다고 하니 둘 사이에 고부 갈등은 없을 듯했다.
그는 자신도 좋은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입가에서만 맴돌다 결국 내뱉지 못했다. 잠시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더 꽉 끌어안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충분히 좋았다.
* * *
체력이 좋은 편이었던 백천범은 보름 만에 건강을 완벽히 회복했다. 한동안 계속되었던 잔기침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 나았다. 그녀는 남월각에 돌아가겠다고 떼를 썼다.
묵용감은 그녀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에게만 마음을 쓰며 종일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백천범이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낼 때마다 묵용감은 다 낫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 나은 몸으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니 그도 더는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월경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그의 곁에 머무른다면 몸에 독소가 쌓이게 된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청을 수락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이번 일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저택에 살고 있었지만, 회림각과 남월각은 거리를 멀어 그가 그녀를 제대로 돌봐 주지 못했다. 혹여 제 품에서 벗어난 그녀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호위 무사를 붙여 몰래 그녀를 보호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호위무사는 다 사내들뿐이니 분명 불편한 점이 있을 터였다. 여자들 중에는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그는 갑작스레 백천범에게 말했다.
“월규와 월향은 부족하니 다른 시녀로 바꿔 주겠소.”
백천범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무엇 하러 바꾸시려고요. 월향과 월규가 얼마나 잘하는데요.”
“잘하긴, 누구 한 명이라도 왕비를 따라갔다면 뒷산에서 그렇게 쓰러지는 일이 있었겠소?”
“제가 따라오지 말라고 한 거예요. 따라온다고 해도 제가 곧장 따돌렸을 거라고요. 예전에 왕야께서도 절 놓치셨잖아요.”
얼굴이 빨갛게 물든 묵용감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 사람을 따돌리는 재주는 어디서 배운 것이오?”
“배운 게 아니라 저 혼자 알아낸 거예요.”
백천범이 뽐내듯 말했다.
“그 재주가 없었다면 지금쯤 흙더미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걸요.”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묵용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만약 그 재주가 없었다면 진즉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고, 그는 그녀를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바꾸지 마시어요. 저는 월규와 월향이 좋아요.”
그녀가 그의 팔을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기홍 언니가 그러는데 저를 찾겠다고 월향과 월규가 엄청 고생했대요. 원상 언니한테 꾸지람도 들었고요. 왕야, 월규랑 월향이는 저한테 정말 잘해 준단 말이에요.”
어찌할 방법이 없던 묵용감은 결국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알겠소. 왕비가 그리 좋다고 하니 바꾸진 않겠소. 다만 왕비의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필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오.”
“무슨 벌이요?”
“곤장을 때리겠소. 왕비가 보는 앞에서 한 사람당 열 대씩이면 되겠지.”
“그러지 마시어요. 그리하시면 월향과 월규가 제 시중을 들겠어요? 제가 두 사람의 시중을 들겠어요?”
“그럼 무슨 벌이 좋겠소? 왕비가 말해 보시오.”
백천범은 잠시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월향과 월규는 고기를 싫어하니까 고기를 먹이는 거예요. 어때요?”
“…….”
그게 벌이란 말인가, 상이란 말인가?
“한 사람 당 커다란 고기를 세 조각씩 먹게 하는 거예요. 제가 지켜보는 앞에서요. 어때요?”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제대로 시중을 들지 못해 살갗을 벗겨도 시원찮을 판에 고기라니! 어찌 그리 잘해 주려는 생각뿐이란 말이오!”
백천범은 고개를 기울이며 헤헤 웃었다.
“정말 좋은 벌인 것 같아요. 나중에 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제게 벌로 고기를 먹게 해 주세요.”
묵용감이 그녀의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그 또한 고기를 먹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부드러운…….
* * *
결국 벌을 내리는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왕비를 데리러 온 월향과 월규는 기홍이 만든 간식과 녹하가 만든 옷 등 크고 작은 보따리를 바리바리 짊어져야 했다. 보따리에는 그간 묵용감이 백천범에게 사 준 작은 장식품들도 들어 있었으니, 어쨌든 큰 수확을 안고 돌아가는 셈이었다.
백천범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세 번씩 뒤를 돌아보며 묵용감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묵용감은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 본 것 같긴 했지만, 그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영영 이별하는 것도, 시집을 가는 것도 아니고 남월각으로 돌아갈 뿐이니 전혀 슬플 일은 아니었다.
어느새 모퉁이에 다다른 그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묵용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힘껏 손을 흔들며 말했다.
“왕야, 저…….”
아직 말을 다 뱉기도 전에 묵용감이 갑작스레 성큼성큼 걸어왔다. 놀란 그녀가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까워진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저 이제 간다고요.”
그가 말했다.
“…가면 가는 것이지, 그리 야단을 떨 일이 무엇이오?”
그는 말을 뱉으며 중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천범이 그를 뒤따르며 물었다.
“왕야, 어디 가세요?”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가해서 왕비를 데려다줄 참이오.”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백천범이 손으로 후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후원으로 가면 곧바로 남월각인 걸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이 대답했다.
“명호를 둘러보려 하오. 호수에 마름 열매가 있는지 좀 봐야겠소.”
“지금도 마름 열매가 있어요?”
“가을에 열리는 것도 있소. 그것도 모르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못 먹어 봤어요.”
그녀가 월규와 월향에게 손짓했다.
“너희 먼저 돌아가. 나는 왕야랑 마름 열매 좀 보고 갈게.”
묵용감은 뛸 듯이 기뻤지만 괜스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왕비는 가지 마시오. 병이 이제 막 나았는데 찬바람을 맞으면 몸에 안 좋을 것이오.”
백천범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밤새도록 비를 맞아 풍한이 든 거였지 잠깐 바람을 쐬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낙성각을 지나쳤다. 입구 앞을 지키는 친위병의 모습에 백천범은 문득 수원상을 떠올렸다.
노랑이를 죽이고 그녀를 뒷산으로 꾀어낸 게 정말 수원상의 짓인지 백천범도 확신할 수 없었다. 수원상이 죄를 인정하지 않고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는 탓에 눈이 호두처럼 퉁퉁 부었다는 소리는 그녀도 들은 적 있었다.
그동안은 건강상의 이유로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수원상이 지금도 갇혀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왕야.”
그녀가 고개를 들어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실은…….”
묵용감은 그녀의 말을 싹둑 잘랐다.
“월향과 월규에게 벌을 내리지 말아 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소. 하지만 측비의 일을 꺼내려는 거라면 입을 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왕비를 죽음으로 내몬 여인인데 이씨 부인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이오. 어찌 저 여인을 동정할 수 있소?”
“지금은 괜찮아졌으니까요. 게다가 노랑이는 닭일 뿐인데, 닭이 죽었다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수는 없잖아요.”
“만약 내가 하루만 더 늦게 돌아왔다면, 왕비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묵용감은 수원상을 더 엄중하게 벌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그 또한 쉽게 목숨을 앗아 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잠시 저렇게 두기로 한 것이다.
묵용감이 얼굴을 굳히자 백천범도 더 말할 수 없었다. 묵용감과 백천범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기 싸움하듯 빠른 걸음으로 명호로 향했다.
호수의 연꽃은 거의 다 말라비틀어져 물 위에 쓰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줄기를 꼿꼿이 세운 채 바람에 흩날리는 것도 있었다.
하늘빛이 천천히 어두워지자 수면도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묵용감처럼 뒷짐을 진 채 목을 길게 빼고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이 어두워져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낮에 다시 와야겠어요. 왕야. 전 이만 가볼게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몰래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어두웠다. 그저 깊고 어두운 두 눈으로 호수만 바라볼 뿐이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호숫가의 나뭇잎이 솨 소리를 내며 서로 부대꼈다. 백천범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는 찰나, 그가 그녀의 팔을 매섭게 잡아끌더니 자신의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백천범은 서둘러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묵용감이 힘껏 껴안는 바람에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자 따뜻한 김이 닿아 귀가 뜨거워졌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괴롭소.”
백천범은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왜 괴로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마음이 괴로울 땐 유모를 이렇게 안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힘을 얻고 위로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묵용감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얼굴이 눌려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손을 들어 올리고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녀가 전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하지만 대체 왜 괴롭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그가 낙성각을 지나고 수원상을 떠올리면서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분명 수원상 때문이리라.
수원상은 그의 측비였고, 고청접보다 더 가까운 사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잘못을 직접 인정하려니 분명 괴로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