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묵용감이 안에 들어서자 궁녀와 태감들이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묵용감이 다가오자 곧장 예를 갖춰 인사했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고 서둘러 문턱을 넘었다. 자그마한 몸집이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그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이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소자, 태비 마마를 뵈옵니다.”
“어서 앉거라.”
서 태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고는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두 며느리와 함께 있으니 왠지 아들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네게 줄곧 며느리를 보여 달라 했지만, 일이 워낙 바빠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오늘 애가가 직접 궁으로 불렀다. 괜찮겠지?”
“진즉에 태비 마마께 며느리를 보여 드렸어야 했는데 소자가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을 두고 한 말을 아닐지라도 며느리라는 말에 고청접은 기분이 좋았다. 서 태비의 눈에 들어 시어머니라는 큰 힘이 생겼으니 앞으로의 일도 더 수월해지리라.
서 태비도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묵용감이 이렇게 따뜻한 어투로 말하는 것은 흔치 않았다. 역시 며느리와 함께 있으니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묵용감을 자신의 옆에 앉혔다. 묵용감과 고청접을 번갈아 바라보니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그녀는 차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세 명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쪽에 앉아 있던 백천범은 조금 부러웠다. 모친이 자애로우면 자식이 효를 다하고, 부부간의 금슬도 좋은 법이었다. 백천범이 아무리 그의 여동생처럼 대우받는다 한들 결국엔 저택을 나가야 하니 쓸데없는 존재였다.
어려서부터 모친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는 항상 자신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이를 원했다. 생모는 세상을 떠났으니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사장풍의 어머니와는 잘 지낼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고부 갈등 이야기를 들었던 백천범은 시어머니가 자신을 때리거나 욕만 하지 않는다면 친모를 대하듯 효를 다하겠다고 결심했다.
서 태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정신이 팔려 있던 묵용감은 곁눈질로 가엾게 앉아 있는 백천범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그녀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 오시오.”
서 태비는 그런 묵용감의 모습에 조금은 언짢았다. 백천범이 오면 완벽한 가족 사이를 흐트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좁으니 왕비는 저쪽에 앉는 게 좋겠구나.”
이미 엉덩이를 들고 있던 백천범은 그녀의 말에 묵용감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묵용감은 자연스럽게 백천범에게 다가가 그녀 옆에 앉았다. 고청접은 그런 그의 모습에 낙담했지만 여전히 단정한 모습과 옅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 태비는 백천범과 묵용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외모만 봐도 백천범은 고청접보다 한참이나 부족했고, 행동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학식이나 말투, 단정함을 따져도 고청접보다 크게 떨어졌다.
그녀는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에 두고도 좋고 나쁜 걸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함께 모이는 일이 쉽지 않은 터라 서 태비는 함께 밥을 먹자고 권했다.
묵용감은 겉으로는 차가워도 속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모친과 그리 가깝진 않아도 그녀는 그를 열 달 동안 품고 힘겹게 낳아 준 여인이었다. 좋지 않은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희미해졌고, 지금은 가벼운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태비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던 그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고청접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그녀의 존재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저택 후원에 방치되어 묵용감의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때와는 달랐다. 한편, 백천범은 배를 곯지만 않으면 함께 밥을 먹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었다.
서태비가 아들 내외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황유도와 유모 영 씨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초왕은 늘 서 태비의 문안만 여쭙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밥은 물론이거니와 차 한 잔도 다 마시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가 찾아올 때마다 태비는 늘 기쁨에 젖어 있었지만 돌아가기만 하면 입꼬리가 축 처지곤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두 사람도 마음이 아팠다.
모자간에 쌓인 응어리는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쌓여 온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렇게 웃음꽃을 피우며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돈독한 모자 관계도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태비의 노비로서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다. 주인이 행복해야 노비도 행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 내외와 함께하는 식사였기 때문에 태비는 음식을 더 많이 준비하라 분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으로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먹는 데 관심이 많은 백천범조차도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음식 앞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서 태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왕비를 어찌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가 어느 볼품없는 집안 출신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정말 격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 백천범의 모습이 익숙한 묵용감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먹고 싶은 음식은 태감에게 덜어 달라고 하시오.”
그녀의 뒤에는 음식을 나누어 주는 태감이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본 백천범은 갑자기 중추절 연회에서의 일이 떠올라 웃음기를 거두고 단정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태감은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왕비가 바라보는 음식을 집어 접시에 덜어 주었다. 백천범은 서 태비와 고청접이 먹는 모습을 몰래 관찰했다. 두 사람은 같은 음식을 세 번 이상 집는 법이 없었다. 백천범은 두 사람을 따라 하며 식욕을 절제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이곳에서는 초왕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백천범이 고상하게 먹는 모습을 처음 본 묵용감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금세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백천범이 좋아하는 음식을 두 번씩 덜어 주며 말했다.
“맛있거든 마음껏 드시오.”
백천범은 서둘러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마침 그가 집어 준 돼지 내장 요리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게 식감도 좋고 정말 맛있었다. 태감이 두 차례나 덜어 주긴 했지만 제대로 맛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고청접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한순간 스친 그녀의 슬픈 표정이 서 태비의 두 눈에 똑똑히 담겼다.
서 태비가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감아, 왕비만 신경 쓰지 말고 청접이에게도 음식을 좀 덜어 주려무나.”
묵용감은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아무 음식이나 집어 고청접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그는 그 순간에도 백천범을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면 기쁠 것 같았다.
지나친 바람이라는 건 묵용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되도록 웃으며 고청접에게 물었다.
“언니, 삼겹살 좋아해요?”
고청접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백천범이 가리킨 음식은 초왕이 덜어 준 바싹 구운 삼겹살이었다. 식감도 좋고 맛도 뛰어났지만, 대갓집 규수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녀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입에 넣고 조심스레 씹었다. 바짝 익힌 데다 우유 지방으로 만든 기름이 들어간 탓에 사내들의 술안주로나 제격인 음식이지, 그녀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초왕이 준 음식을 다 먹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났다. 그녀는 뒷말이 날까 봐 남아 있던 고기 조각을 모두 입에 넣고 재빠르게 씹어 넘긴 뒤 국을 몇 차례 들이켰다. 그제야 비릿한 맛이 좀 가시는 듯했다.
시원시원하게 먹는 그녀의 모습에 백천범이 물었다.
“맛있어요?”
“맛있습니다.”
“저도 먹어 볼래요.”
그녀가 접시를 들고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접시에 덜어 주며 말했다.
“너무 기름지니 한 조각만 먹는 게 좋겠소.”
같은 음식이었지만 그의 태도는 천지 차이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고청접의 가슴을 후벼 팠다. 묵용감이 음식을 덜어 주었다는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분노와 질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는 분명 자신의 사내였건만, 지금껏 그녀를 생과부로 지내게 내버려 두었다. 그녀에게 참으로 비통하고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식탁 아래에서 힘껏 주먹을 쥐었다. 사소한 일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을 망치는 법이다. 비참하게 패배할 수만은 없던 고청접은 반드시 최후에 웃는 승자가 되리라 다짐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 한 잔을 마신 뒤, 묵용감은 두 부인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태비는 직접 입구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황유도가 가마꾼에게 가마를 하나 더 준비하라고 분부하자 묵용감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되었다. 왕비와 함께 타면 된다.”
그가 말하는 왕비는 물론 백천범이었다. 그는 그녀가 먼저 올라탈 수 있게 가마 발을 걷어 올려 준 뒤, 자신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황유도는 미소를 지었고, 서 태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도 냉정하고 이성적이던 아들이 백천범에게 물들어 변변찮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궁 안에서 사용하는 가마는 두 사람이 타기에는 조금 좁았다. 묵용감은 체격이 좋은 사내였기에 그가 타자 한쪽 엉덩이가 계속 백천범의 몸에 닿았다. 백천범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이참, 왕야! 절 깔아뭉개지 마시어요.”
묵용감은 슬쩍 웃더니 백천범을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예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드디어 오늘 생각을 실행에 옮긴 그는 함께 외출할 땐 늘 이렇게 비좁은 가마를 타기로 다짐했다. 그녀를 안고 가니 너무나도 편하고 좋았다.
백천범의 외침과 묵용감의 웃음소리는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그 소리만으로도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서 태비는 묵용감의 모습이 정말 낯설었다. 아들은 늘 공허한 미소만 입가에 머금을 뿐 두 눈에 웃음기가 서려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좀 전처럼 진심이 묻어나는 웃음은 더더욱 들은 적 없었다.
다른 가마에 앉아 있던 고청접은 손톱이 손바닥을 찌를 만큼 힘껏 주먹을 쥐었다. 저택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 태비 앞에서 이런 행동이라니. 첩인 자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똑똑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가 첩에 불과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그가 그녀를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과한 기대일 뿐이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백천범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녀가, 심지어 서태비조차 예뻐하는 그녀가 정작 지아비에게는 눈길조차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왕비, 백천범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