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72)화 (171/1,192)

제172화

유모 영 씨는 서 태비가 출가할 때 친정에서 따라온 시녀였다. 서 태비가 시집올 땐 왕의 저택에서 지냈지만, 훗날 선황이 제위에 오르며 입궁한 것이었다. 유모 영 씨는 시집도 가지 않고 서 태비의 곁을 지켰다. 지금은 서 태비의 최고 유모가 되어 그녀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되었다.

유모 영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왕야께서 말씀하신 ‘살뜰히 보살펴 주는 사람’이 초왕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왕야께서 마땅히 왕비와 함께 태비 마마를 뵈러 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추한 며느리라도 시부모는 뵈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왕비와 함께 입궁하고도 태비 마마를 찾지 않으시다니요. 왕야께서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서 태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친모인 나조차 그 애의 마음을 모르겠는데 너는 오죽하겠느냐. 어쨌든 궁에서 이리 소란스러운 일들이 벌어졌으니 그리 보기 좋진 않구나.”

“소인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초왕비께서 규율을 잘 모르시어 연회에서 비웃음을 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지난번 조정에서 왕야와 백 승상이 다툴 뻔한 일도 다 초왕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왕비께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제멋대로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앞으로 왕야께서 잘 가르쳐 주시면 될 것입니다.”

“초왕이 가르칠 수 있겠느냐. 왕비 때문에 노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예왕을 때린 걸 보면 분명 애지중지하는 게 다겠지.”

서 태비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 초왕비를 좋게 평한다 한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은 없다. 분명 왕비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 용감이가 어렵사리 마음을 연 것이니 필히 용감이와 격이 맞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초왕의 저택에 사람을 보내 애가가 왕비를 좀 보고 싶으니 궁에 들라 명하거라.”

유모 영 씨가 말했다.

“혹 왕야께서…….”

“지금은 조정에 있을 것이다. 알면 또 어찌하겠느냐. 애가에게 보여 주지 않아 직접 보려 하는 것뿐이거늘.”

유모 영 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이 소식을 전했다.

* * *

초왕부에 태비의 명이 전해지자 학평관은 크게 놀랐다. 그간 초왕의 저택에 서 태비의 명이 전해진 일은 손에 꼽았다. 하지만 태비가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하는데 막아설 수는 없었다.

다만 명을 전달한 사람은 그저 왕비라고만 말할 뿐 어느 왕비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저택에는 이미 세 명의 왕비가 있었고, 셋 모두 태비를 만난 적 없었다. 학평관은 고민 끝에 처소를 나갈 수 없는 수원상을 제외하고 백천범과 고청접을 모두 보내기로 했다. 함께 입궁할 사람이 생기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어린 왕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고청접은 태비를 뵈러 간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몸을 단장했다. 아리따운 외모를 자랑하는 그녀였지만 옅은 화장과 단아한 옷을 입으며 소박하게 꾸몄다.

백천범은 어쨌든 정식으로 시어머니를 뵙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긴장되었다. 기홍과 녹하는 옷부터 치장까지 전부 세심하게 신경 썼다. 두 시녀는 다른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백천범을 가장 예쁜 모습으로 꾸며 주었다.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그녀의 외모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 * *

함께 입궁한 두 사람은 궁 안에서 쓰는 작은 가마로 바꿔 탄 뒤 앞뒤로 나란히 장합전으로 향했다.

궁에 처음 온 고청접은 모든 게 다 신기했지만, 겉으로는 단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주변을 힐끔거리는 것조차 않았다. 게다가 자신을 뽐내려 하지 않는 단아한 치장에 마중을 나와 있던 유모 영 씨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가냘픈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뽐냈다. 웃을 땐 자그마한 이를 다 드러냈고,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꼭 처음 세상 구경을 나온 시골 계집 같았다.

유모 영 씨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규율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다행히 고청접이 있으니 초왕의 체면이 깎일 일은 없을 터였다.

백천범은 이씨 부인 때문에 그녀 나이대의 부녀자를 만나면 괜스레 두려움이 밀려왔다. 귀부인들은 모두 이씨 부인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자신을 모질게 대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서 태비는 백천범이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상냥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단정한 모습에서 온화하고 고귀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음을 놓은 백천범은 서 태비에게 이가 다 보이도록 웃어 보이며 절을 올렸다.

“태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녀는 진지하게 예를 갖췄지만 겉만 그럴듯해 보일 뿐이었다. 서 태비는 백천범이 왜 자꾸 자신을 보며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단 말인가?

고청접을 바라보니 곧바로 백천범과 비교가 되었다. 단아하고 온순해 보일 뿐만 아니라 격식에 맞게 행동했다. 자신을 뽐내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어른들이 가장 원하는 며느리의 모습이었다. 고청접이 퍽 맘에 든 서 태비는 그녀의 문벌이 조금 낮아 서왕비로 시집온 사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녀가 백천범에게 물었다.

“어째서 측왕비는 오지 않았는가?”

백천범이 말했다.

“원상 언니는 갇혀 있습니다.”

서 태비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갇혀 있다니?”

그때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고청접이 입을 열었다.

언변은 하나의 예술이다. 같은 일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다르면 말투가 달랐고, 강조하는 점도 달랐다. 고청접은 일부러 무게를 잡고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되도록 상황을 설명했다. 서 태비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말은 어느새 사실과 크게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해 있었다.

서 태비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백천범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계집아이 때문에 초왕이 이성을 잃고 측왕비를 연금하다니. 고작 닭 한 마리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란 말인가.

고청접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백천범은 그녀의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사실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녀에게는 고청접의 말보다 오래도록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더 불편하고 신경 쓰였다.

백천범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서 태비는 줄곧 고청접만 보고 있으니, 잠시 움직이는 것은 문제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엉덩이를 살짝 들고 목을 길게 뺀 채 잠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서 태비는 깊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아들에게 좋아하는 여인이 생긴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백천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남을 잘 홀린다는 소문이 정말일 것만 같았다. 이런 성격이라면 훗날 초왕이 곤욕을 치를지도 몰랐다.

역시 고청접이 더 나았다. 단정하고 고상한 데다 나이에 비해 언행이 성숙하고 침착했다. 중임도 감당할 수 있을 듯한 그녀의 모습에, 서 태비는 두 왕비의 서열을 바꿀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저택의 정비는 응당 고청접처럼 고상하고 온순해야 하고, 백천범처럼 자유분방한 성격은 첩이 어울렸다.

그녀는 저택의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살림을 맡고 있는 고청접은 대부분의 일을 세심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빈틈없이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서 태비는 더욱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초왕이 측왕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아예 고청접을 측왕비의 자리에 올리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측왕비가 서왕비보다는 더 나았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방법을 강구해 고청접을 정비의 자리에 올리면 될 일이었다. 백천범은… 초왕이 아무리 백천범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백 승상과의 관계 때문에 분명 제약이 있을 것이었다. 지금의 뜨거운 감정만 식으면 구실을 대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곱씹을수록 완벽한 계획이라는 생각에 서 태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고청접의 뒤꽂이가 지극히 평범한 것을 알아차린 서 태비가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수수하게 꾸민 것이 아닌가.”

그녀가 백천범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내들을 그래도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법이지. 영아, 금과 진주로 장식된 내 비녀를 가져와 서왕비에게 꽂아 주거라.”

유모 영 씨는 대답을 올린 뒤 서 태비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서 태비는 그제야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사람에게만 상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머지 한 사람이야말로 정실 왕비였으니 더더욱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동주가 박힌 비녀가 하나 더 있었지. 그것도 함께 가져오거라. 왕비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구나.”

비녀를 건네받은 서 태비는 직접 고청접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백천범은 유모 영 씨가 대신 꽂아 주었지만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나이가 지긋한 유모 영 씨의 모습에 자신의 유모를 떠올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유모 영 씨를 난감하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존중한다 한들 유모 영 씨는 그저 노비에 불과했기에 주인의 인사를 받아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서 태비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청접의 손을 잡아끌며 또다시 집안 상황을 물었다.

* * *

조회를 마친 묵용감은 오문을 나와 말을 타고 저택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어제 백천범이 남월각으로 돌아가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그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원체 제멋대로인 백천범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확인해야 했다. 저택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중문에 도착한 그가 말에서 내리자 학평관이 백천범의 입궁 소식을 전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가동과 영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오문에 다다른 그는 말고삐를 내던지다시피 한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었다.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져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는 천가天街를 지나 좁다란 길을 빠르게 걸어 금세 장합전에 도착했다. 입구에 서 있던 황유도가 그를 보자마자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유도는 그에게 활짝 웃어 보이더니 높은 목소리로 알랑거리며 말했다.

“초왕 전하를 뵈옵니다.”

묵용감은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며 물었다.

“태비 마마께선 잘 지내시느냐?”

황유도는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입으로는 태비의 안부를 물으면서 마음속에는 오로지 왕비 생각뿐이리라.

“태비 마마께서는 아주 잘 지내고 계십니다. 잠도 잘 주무시고 식사도 잘하시지요. 매일 오후에는 개화오떡을 한 조각씩 드십니다. 늘 전하에 대한 말씀뿐…….”

묵용감은 이어지는 말을 듣지도 않고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황유도가 가볍게 뛰어서야 그를 뒤따를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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