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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71)화 (170/1,192)

제171화

저택에 돌아온 묵용감은 말없이 서재로 향했다.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는 듯한 그의 표정에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노비들은 잔뜩 긴장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두 주인이 저택을 비운 동안 회림각 노비들은 즐겁게 명절을 쇠고 있었다. 정원을 꾸미고 초롱을 건 뒤 백천범을 위해 진흙으로 만든 토끼 인형까지 사 왔다.

매년 중추절이 되면 묵용감은 궁에서 돌아오자마자 노비들에게 상을 내렸다. 하지만 오늘은 상은커녕 차가운 그의 모습에 회림각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다들 초왕이 왕비와 다퉜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의 희로애락은 늘 왕비와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토끼 인형을 가지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학평관이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왕비 마마, 소인이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왕야께서 어찌 저리 화가 나셨는지요?”

백천범은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토끼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궁에서 싸움이 났거든요. 왕야께서 이기셨는데 왜 기분이 안 좋으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학평관은 깜짝 놀랐다. 평소의 초왕은 소란을 피우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궁에서 싸움을 벌였다니? 황제 폐하 앞에서 소란을 벌이다 훈계를 듣고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그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누구와 싸우셨단 말씀이신지요?”

“저는 누군지 몰라요. 방탕한 호색가였어요. 왕야께서 그 사람을 황숙이라고 불렀다가 버러지 같다고도 했어요.”

학평관은 곧장 예왕을 떠올렸다.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거만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황숙은 황숙이니 평소 초왕도 크게 관여하는 법이 없었거늘, 오늘은 왜 그자와 다투었단 말인가?

학평관은 세간의 소문을 다 꿰고 있었다. 예왕과 관련된 일이라면 분명 그가 부녀자를 희롱하려다 초왕에게 들켜 다투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렇게 재미있는 소문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예왕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입에 담기 불경스럽지만 소인도 예왕께서 경망스럽다는 소문을 들었사옵니다. 예왕께서 누구의 부인을 희롱하려다가 왕야께 들키신 것입니까?”

백천범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를 희롱했어요.”

“…….”

어쩐지, 초왕이 화가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녹하가 다가와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왕야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걸 보니 올해 상은 물 건너간 듯싶습니다. 오라버니가 혼사를 치른다 하여 상을 받으면 모아 둔 돈을 보태 예단비로 보내 드리려고 했는데… 부족하게 생겼습니다.”

학평관이 말했다.

“올해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네. 얼마가 부족한지 말해 주면 내가 빌려주겠네.”

“아이고, 어르신의 돈도 굴러들어 온 게 아닌데 제가 어찌 빌린단 말입니까.”

녹하가 급히 말을 이었다.

“기다려 보겠습니다. 왕야께서는 화가 쉽게 가라앉는 편이시니 곧 기분이 다시 좋아지실지도 모르지요.”

그 말을 들은 백천범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녹하와 학평관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가서 볼게요.”

학평관과 녹하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의도하던 대로였다. 백천범이 나서면 묵용감의 화도 금방 누그러질 터였다. 다만 종종 예상치 못한 행동을 일삼는 그녀였으니 상황이 좋아질지 악화할지는 그들도 장담할 수 없었다.

* * *

묵용감은 의자에 앉아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다. 예왕이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흠씬 두들겨 팼으니 이 일은 일단락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정작 묵용감이 화가 난 이유는 백천범과 사장풍의 일이었다. 어쩜 이리 공교롭게 백천범에게 문제가 생기자마자 사장풍이 나타났단 말인가.

사장풍은 벌써 두 번이나 백천범을 구해 주었다. 처음 구해 주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다 바쳤고,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의 감정은 서로를 향해 있었다.

사장풍이 그녀를 구하는 건 분명 도리에 맞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상대가 황제의 친족일지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불의를 참지 않았다.

백천범은 돌아오는 길 내내 사장풍이 용맹하게 자신을 구해 준 일을 신나게 떠들어 댔다. 묵용감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에 그녀 몰래 이를 악물었다.

예왕과 맞붙은 그의 훌륭한 모습은 기억도 하지 못하고, 그녀는 오로지 사장풍이 구해 준 것만 떠올렸다. 사장풍은 감히 예왕에게 맞서지도 못할 텐데도!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던 그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방 안을 맴돌았다. 그러다 밖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발소리에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초조한 기색을 거두었다. 그는 일부러 문 쪽에 시선을 두지 않고 평온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 밑에 서린 냉기는 여전했다.

백천범은 문 앞으로 다가와 발을 살짝 걷고 몰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묵용감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의 자리에서는 묵용감의 옆모습만이 보였다. 뚜렷한 얼굴선과 날렵한 옆모습이 무척 준수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변덕만 부리지 않는다면 묵용감은 정말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왕야.”

묵용감은 돌아보지도 않고 짧게 대답했다. 여전히 화가 누그러지지 않았지만 입꼬리는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뒤에 서 있던 백천범은 앞쪽으로 빙 둘러 다가가더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무슨 생각하세요?”

“…….”

네 생각하지 무슨 생각을 하겠어! 묵용감은 치밀어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그의 기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그녀가 넉살 좋게 웃기 시작했다.

“왕야, 저 때문에 화나신 거죠?”

알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묵용감은 몸을 돌려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내가 왕비 때문에 화날 일이 뭐가 있겠소?”

“제가 왕야의 체면을 깎았잖아요.”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체면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체면을 깎은 것은 예왕이지 왕비가 아니오.”

그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리 오시오.”

백천범은 얌전히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그 예왕이라는 사람은 정말 왕야의 황숙이에요? 그런데 왕야보다 어린 거예요?”

“그렇소. 내 부황 폐하의 동생이오.”

그가 백천범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꼬집힌 곳은 아직도 아프오?”

“안 아파요.”

백천범이 손가락으로 허리를 누르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왕야께서 꼬집는 것보다도 안 아팠어요.”

묵용감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내가 언제 왕비를 꼬집었소?”

“왕야께서 제 얼굴을 꼬집으셨잖아요. 그게 더 아프다고요.”

묵용감은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녀의 허리를 묵직하게 꼬집었다. 예왕의 흔적을 덮으려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깜짝 놀란 백천범은 ‘아야!’ 소리를 내며 비켜서려 했지만 그의 팔에 가로막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 앞에서는 도망갈 수 없소.”

백천범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그의 화는 어느새 누그러진 듯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한차례 꼬집었다.

있는 힘껏 꼬집었지만 묵용감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뿐이었다.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사로잡히니, 흑심을 품고 싶지 않아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그녀를 꽉 붙잡았다.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볍게 그녀의 엉덩이를 두 대 때린 뒤 일부러 엄한 목소리를 냈다.

“한 번만 더 이리 오만방자하게 굴었다간 쉽게 용서치 않을 것이오.”

백천범은 웃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더니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강아지처럼 그에게 딱 들러붙었다. 지금이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적기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왕야, 오늘은 명절이잖아요.”

“그래서?”

“식구들에게 상을 내리지 않으실 거예요?”

“무얼 갖고 싶소?”

“다 좋은데 은량이 제일 좋아요.”

“그리 많은 돈을 다 어디에 쓰려고? 음식이나 옷이 부족한 것도 아니질 않소?”

“나중에 저택을 나가게 되면 지니고 다닐 돈이 있어야 하니까요.”

묵용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에게 이렇게나 잘해 주는데 아직도 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니…….

“왕야.”

백천범이 그를 흔들었다.

“상을 주실 거예요, 안 주실 거예요?”

묵용감은 그녀의 손길에 몸을 휘청거렸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눈은 별이 떨어진 듯 반짝거렸지만 그의 마음은 시큰거렸다. 한참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주겠소. 학평관을 들라 하시오.”

* * *

중추절이 지났지만 초왕비와 예왕의 이야기는 여전히 퍼지고 있었다.

장합전엔 두루미가 조각된 구리 향로에서 피어난 연기가 하염없이 흩어질 뿐,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서 태비는 계화꽃 향을 좋아했다. 가을이 되면 궁 안 가득 계화꽃 향이 퍼졌는데 오늘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유난히 향이 짙은 듯했다. 뒤에 서 있던 궁녀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안마했다.

황유도는 허리를 굽히고 서서 서 태비가 지시를 내리길 기다렸다.

서 태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보기에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으냐?”

황유도가 몸을 굽히며 말했다.

“태비 마마께 아룁니다. 소인이 보기에는 초왕비께서 제멋대로인 분은 아니신 듯합니다. 예왕야께서 예쁜 아녀자를 가만두지 못하신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던 사실이옵니다. 일이 커지면 추문이 되니 그저 신하들도 입에 올리지 못했던 것이지요. 다만 우리 왕야께서 지켜보실 수만은 없어 손을 대신 듯합니다.

태비 마마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예왕께서 우리 왕야의 황숙이시긴 하나 그런 짓을 저지르신 것은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이들이 우리 왕야께 갈채를 보내고 있사옵니다.”

“황상은 뭐라 하시더냐?”

“겉으로는 왕야를 책망하시지만 아마 속으로는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 왕야를 제외하고 어떤 이가 감히 예왕과 겨루시겠습니까. 예왕께서 황숙이긴 하지만 이렇게 한 번쯤 잘못을 일깨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황상께서 책망만 하지 않으시면 이 애가哀家(과부인 황후나 왕비, 즉 대비나 황태후가 자신을 일컫는 말)도 마음이 놓일 것이다.”

서 태비가 손을 흔들어 궁녀를 물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초왕이 왕비 때문에 귀비의 태감 다리를 부러뜨렸다 들었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태비 마마께 아룁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 하옵니다. 금보라는 자는 평소 백 귀비를 믿고 세도를 부려 왔다고 하옵니다. 초왕비께 무릎을 꿇으라고 명을 내린 것도 모자라 감히 발로 걷어찼다 하니 목숨을 살려 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눈감아 주신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유모 영 씨가 직접 차를 올렸다. 차를 받아 든 서 태비는 뚜껑을 열어 천천히 찻잎을 걸러내며 말했다.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 보거라.”

황유도는 대답을 올린 뒤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홀짝거리며 차를 들이켠 서 태비의 얼굴에는 옅은 수심이 서려 있었다.

“영아, 네가 한번 말해 보려무나. 우리 왕야가 초왕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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