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사장풍은 격식을 갖춰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예. 황제 폐하께서 굽어살피시어 소관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그는 말을 뱉으며 백천범의 안색을 살피고 은근슬쩍 자신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백천범은 예왕의 정신이 분산된 틈에 재빨리 사장풍 뒤로 몸을 숨겼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사장풍이 눈빛으로 그녀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백천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뜻을 내비쳤다.
예왕은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알고 보니 사 제독을 만나러 이곳까지 온 거였군? 사 제독도 이런 취향일 줄이야. 하하, 보기 드문 일인데 말이지. 언제 한번 나와 술이나 합세.”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사장풍은 정색하며 말했다.
“왕야, 그럼 소관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백천범을 앞세워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사장풍이 자신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자 불쾌했던 예왕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거라. 네가 가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만, 저 여인은 두고 가거라.”
물론 사장풍이 그의 말대로 할 리 없었다. 그에게 미움을 살 수 없던 사장풍은 초왕의 이름을 언급했다.
“왕야, 왕야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이분은 초왕비이십니다. 왕야께서는 초왕의 황숙이신데 이런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분명 좋지 않을 것입니다.”
예왕은 흠칫 놀랐다. 다른 이도 아니고 초왕비에게 집적댔다니. 암암리에 더 추악한 짓도 저질렀으니 항렬 따위는 상관없었지만 초왕은 상대하기 어려웠다. 일이 커져서 좋을 게 없었다.
백천범을 희롱하려던 마음은 사라졌지만 예왕은 끝까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초왕을 들먹거릴 것 없다. 초왕이 알면 또 어떻겠느냐, 어차피 본왕은 초왕의 황숙이거늘. 초왕이 감히 불경스럽게 본왕을 때리기라도 하겠느냐?”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전해졌다.
“황숙,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묵용감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백천범이 곧장 그에게 뛰어갔다. 그녀가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왕야, 마침 잘 오셨어요. 저 사람이 방금 절 괴롭혔어요.”
백천범은 그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황제와 초왕뿐이었다.
하지만 묵용감의 눈빛은 사장풍에게 향해 있었다. 왜 하필 사장풍과 같이 있단 말인가? 참 눈에 거슬리는 자였다.
그가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백천범은 그에게 방금의 일을 털어놓았다. 면전에서 고자질을 당하니 뜨끔한 예왕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오해다, 오해. 본왕이 초왕비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
“그렇습니까? 초왕비를 누구로 착각하셨습니까?”
“그게…….”
누구라고 말하기에도 참 난감했다. 예왕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왕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이니 초왕비도 용서해 주시게.”
백천범은 그를 한번 흘겨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삐죽거렸다.
“저 사람이 절 꼬집기까지 했어요.”
“어디를? 어딜 꼬집었단 말이오?”
백천범은 허리를 비틀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요.”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던 묵용감의 마음에 취기까지 더해져,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예왕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소리쳤다.
“감히 내 처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다니, 나잇값도 못 하는 버러지 같으니라고!”
예왕은 몸을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나더니 이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얼굴을 감싸 쥐고 묵용감에게 한참이나 삿대질을 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런 몹쓸 놈을 보았나, 감히 어른에게 손을 휘두르다니!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냐!”
“어른?”
묵용감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보다 한 살이나 어린 주제에 계집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더니, 이젠 내 부인에게까지 손을 댔단 말이냐! 황숙이 조카며느리를 희롱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쩌려고!”
예왕은 무술에 능한 사람이었다. 평소 나태했지만 무술만큼은 조예가 깊었다. 방금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방어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태세를 갖추었다.
“묵용감, 이 오만방자한 놈! 선황 폐하를 대신해 너에게 한 수 가르쳐 주마.”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후환이 두려워진 사장풍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가 고했다.
“부디 노여움 푸십시오. 오늘은 중추절입니다. 무엇보다 황제 폐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일을 크게 만들었다간 두 분 모두에게 좋지 않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왕은 일이 커지지 않는 게 더 걱정이다.”
예왕이 묵용감에게 달려들며 손을 휘둘렀다.
몇 발짝 뒤로 물러선 백천범은 조금 기대하는 눈치였다. 묵용감이 동월국 최고의 고수라는 말은 가동에게 수차례나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제대로 겨루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드디어 오늘, 그의 실력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다.
사장풍이 한 차례 더 타이르려는데 백천범이 그를 끌어당겼다.
“괜찮아요. 그냥 둬요. 우리 왕야께서 지실 일은 없어요.”
방탕한 호색한에게 초왕이 교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런 사람이 황숙이라니!
그녀가 사장풍을 잡아끄는 모습이 하필 묵용감의 시야에 담겼다. 그의 동공이 급격하게 수축하고 화산이 폭발하듯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묵용감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예왕의 팔을 가격했다. 그리곤 예왕의 등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바닥에 쓰러진 예왕의 몸을 짓누르며, 묵용감이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예왕은 주먹을 피한 뒤, 묵용감의 허리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묵용감을 아래에 눕혀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땅 위를 굴렀고,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고귀한 두 왕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과 코를 찔러가며 길거리의 불량배처럼 싸우고 있었다. 결국 묵용감이 예왕의 몸을 짓누르며 매섭게 손을 휘둘렀고, 예왕은 막아낼 힘도 없이 머리를 감싸 쥔 채 소리만 질렀다.
한쪽에 있던 백천범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봤다. 상상만 했던 고수들의 대결이 고작 이런 모습이라니?
사장풍도 두 사람의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평소 고귀하던 종실 친왕들이 이렇게 난잡한 싸움을 하다니……. 저잣거리의 건달이 따로 없었다.
둘의 싸움이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자 금군들이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두 왕을 말리지 못했고, 황제에게 이 상황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붉게 물들 만큼 거나하게 술을 걸친 황제는 신하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식을 들은 황제가 식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도 체통들이 없어서야!”
황제가 급히 숲으로 향했다.
금군들은 계수나무 숲을 봉쇄하고 출입을 막았다. 그런데도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멀찌감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초왕비가 계수나무 숲에서 예왕과 밀회를 가지다 초왕에게 걸려 두 사람이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예왕의 소문은 이미 자자했던 터였다.
궁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신하들의 부인에게 종종 흑심을 품어 예전에도 비슷한 소문이 난 적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다. 다만 예왕이 어찌 초왕비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뒤이어 또 다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남을 홀리는 데 재주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저택에서도 초왕의 호위무사를 홀리다 초왕에게 현장에서 적발된 적도 있다는 내용까지 더해졌다.
사람들은 초왕비와 예왕 모두 공통된 관심사가 있으니, 자연스레 감정이 들끓다가 눈이 맞았을 것이라며 쑥덕댔다.
결국 이번 일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이 났다. 황제는 두 왕이 술을 과하게 마셔 술김에 다툰 것일 뿐, 다친 곳 없이 멀쩡하니 별일 아니라고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예왕이 숲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말은 달랐다. 얼굴이 퉁퉁 붓고 코에 시퍼렇게 멍이 든 그를 태감 두 명이 양쪽에서 부축할 정도였다고 했다. 반면 초왕은 옷만 조금 더러워졌을 뿐 다친 곳 하나 없이 백천범을 데리고 갔다고 했다.
큰 소동에 흥이 깨진 황제는 잠시 연회석을 지키다가 피곤하다는 핑계로 자신의 양심전으로 돌아갔다. 황후는 황제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부녀자들과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눈 뒤 그를 찾아갔다.
방에 들어서니 역시나 황제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중추절입니다. 근심 걱정이 아무리 많아도 오늘만큼은 너무 상심치 마시옵소서. 신첩과 함께 보름달을 감상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황제와 황후는 예전부터 부부의 정이 두터웠다. 황후가 자신을 찾아오자 황제의 굳은 얼굴이 금세 온화해졌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셋째도 참……. 대신들도 모두 와 있는 연회 자리에서 어린 황숙을 그 지경이 되도록 때리다니. 부황께서 살아계셨다면 분명 크게 노여워하셨을 것이오.”
황후가 물었다.
“왜 다툰 것입니까? 황숙이 부도덕한 일을 한 것은 아닌지요?”
“오해였다고 하오. 황숙이 어찌 초왕비를 알았겠소. 알았다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있나?”
황후가 말했다.
“황숙도 그런 나쁜 습관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셋째에게 걸렸으니 운이 조금 나빴던 것이지요.
실은 신첩이 말씀드리지 못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아까 신첩의 처소에서 귀비를 따르는 금보라는 자가 초왕비를 걷어차는 일이 있었습니다. 초왕이 그자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았지요.
신첩이 보기에 초왕비에 대한 셋째의 마음이 참으로 깊은 듯합니다. 초왕비를 위해 한 일이니 이번 일은 덮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께서도 셋째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황숙이 먼저 잘못한 일입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짐의 말을 듣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짐 앞에서 또 이런 일이 있거든 황숙을 죽여 버리겠다며 모진 말을 퍼붓기까지 했소. 이런 횡포가 어디 있단 말이오. 종실 친왕 사이에 체면도 봐주지 않고 끝장을 보려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이오?”
황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초왕의 성격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한번 말을 뱉으면 그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초왕입니다. 신첩 생각에는 초왕을 꾸짖기보단 황숙을 위로해 주시는 편이 더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