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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69)화 (168/1,192)

제169화

여러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백천범에게 예를 갖췄다.

다들 자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자 백천범도 서둘러 예를 갖췄다. 이런 연회에 익숙지 않았던 백천범은 환하게 웃고 있긴 했지만 사실 조금 불편했다.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왕비들을 그저 언니라고 불렀다.

실례를 범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왕비들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황후의 면전에서 감히 그녀를 하찮게 여기는 표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냉채가 나왔다. 우설과 돼지 귀, 양피와 거위 물갈퀴를 꽃 모양으로 썰어 접시에 담은 뒤 작은 꽃 모양으로 썬 당근을 테두리에 둘렀다.

작은 종지에 담긴 생강 장이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준비되었는데 고기를 한 점 집어 장에 찍으면 졸깃한 맛이 더해져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백천범과는 달리 왕비들은 대충 몇 점 집어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눈치를 보던 백천범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곧이어 따뜻한 요리가 올라왔다. 큼직한 백옥완자가 비취 그릇 가득 담겨 있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고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위가 가장 높았던 탓에 그녀에게 제일 먼저 음식을 덜어 주었다. 그녀는 음식을 빠르게 집어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시큼하면서도 단맛이 느껴지더니 어느새 입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하나로는 부족했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음식을 나눠 주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중을 파악한 태감이 서둘러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초왕비 마마, 하나 더 맛보시겠습니까?”

한 개라니, 정말 쩨쩨했다. 백천범이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세 개만 주십시오.”

왕비라는 사람이 자신의 식탐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에 옆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천범이 바라보자 그녀는 급히 표정을 숨기며 헛기침을 했다. 백천범은 그제야 다들 그녀를 웃음거리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는 눈빛은 너무도 익숙했다. 묵용감의 꾸지람을 떠올린 백천범은 그의 체면이 구겨질까 잠시 망설이다 태감에게 말했다.

“농담이었습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행동이 재빨랐던 태감은 완자 세 개를 건져 막 그녀의 그릇에 옮기려던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그는 퍽 난감했다. 궁의 규율에 따르면 한 번 건져낸 음식은 다시 솥에 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낭비를 할 수도 없었다. 초왕비가 먹지 않겠다고 하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규율을 몰랐던 백천범은 작은 얼굴을 굳힌 채 먹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태감이 그녀에게 말했다.

“초왕비 마마, 소인에게 상으로 내리시는 게 어떠신지요.”

알겠다는 백천범의 대답에 태감은 죽상을 한 채 소매로 입을 가리고 완자 세 개를 몽땅 털어 넣었다. 양 볼이 잔뜩 부풀어 오른 모습이 꼭 개구리 같았다. 백천범은 그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입이 정말 크십니다.”

태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이런 시련을 준 백천범을 원망했다.

이 작은 일을 계기로 백천범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맛있는 음식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한 입 정도만 겨우 맛본 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왕비들처럼 허리를 곧게 세우고 제법 기품 있게 행동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얕보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다만 맛있는 연회 음식을 먹을 생각에 부풀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몇몇 왕비들이 집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끼어들 수도 없는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병풍 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진왕비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술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주량이 가장 좋으신 분은 단연 초왕야시지요.”

말을 마친 그녀가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어렵사리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화제를 찾았건만 백천범은 대꾸도 없이 엄숙한 자세로 앉아 있기만 했다. 심지어 예왕비의 말을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예왕비는 조금 멋쩍었다. 왕비가 되려면 총기는 기본으로 갖춰야 할 덕목이건만 맞장구도 칠 줄 모르다니! 백천범같은 왕비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연회 음식이 절반 정도 차려졌을 때 황제가 찾아왔다. 좀 전까지 얌전히 앉아 있던 후궁들은 들썩이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황후 옆에 앉았다.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겸손한 군자 같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제왕의 품격이 배어 있었다. 후궁들은 목을 길게 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부러움과 실망감이 한데 섞인 모습이었다.

백천범은 입을 삐죽거렸다. 이렇게 많은 여인이 한 남자만 바라보다니, 정말 슬픈 일이었다. 그녀는 절대 이런 혼인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의 머릿속에 저절로 사장풍의 얼굴이 떠올랐다. 궁에 오는 길에 마주친 그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옅은 미소까지 지어 주었다. 아무리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첩을 들일 생각이 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나중에 그에게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첩을 마다하는 사내는 많지 않겠지만, 그녀는 꼭 그런 사내를 고를 생각이었다.

백 귀비가 앞장서서 황제에게 술을 권하자 다른 비들도 하나둘 황제를 찾았다. 그들은 황제를 둘러싸고 어여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휘영청 밝은 중추절 달빛 아래, 화목한 시간이 이어졌다. 황제는 자신의 처를 일일이 찾아 함께 술을 마셨다. 신하들도 병풍을 지나 자신의 부인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격식에 맞게 행동했다.

연회장이 한껏 소란스러워지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삼삼오오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고, 초롱을 감상하며 수수께끼 놀이(음력 정월 보름이나 중추절 밤, 초롱에 수수께끼의 문답을 써넣는 전통 놀이)를 즐겼다. 어두운 밤이 되자 짙은 계화꽃 향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묵용감은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초조하고 갑갑했다.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그 또한 백천범과 술이라도 한잔 기울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과거 중추절 연회에서 묵용감은 자리를 뜬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식솔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에게 부인이, 그것도 애지중지 아끼는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천범이라 할지라도 중추절 밤 부부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었다.

혹여 그녀를 찾아갔다가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그의 마음을 받아 줄까? 그는 궁으로 오던 길에 그녀와 사장풍이 주고받던 애정 어린 시선을 떠올렸다. 그 모습에 기쁨에 가득 찼던 그의 감정은 순식간에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망신당할 일은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듯했다.

혼자 답답하게 자리를 지키던 백천범은 정말 지루해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초롱을 구경했다.

넋을 놓고 구경하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연회장에서 멀리 떨어진 계수나무 숲에 다다랐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짙은 계화꽃 향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사방에 걸린 커다란 연화등 불빛으로 계화꽃이 눈부셨다.

숲속에는 색을 입힌 돌길이 나 있었는데 불빛이 나무 틈으로 스며들어 와 알록달록한 빛을 만들어 냈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에 불빛이 흔들거리자 더욱 진귀하고 다양한 색을 만들었다.

심심했던 백천범은 색색의 빛을 밟고 깡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그만 누군가와 몸을 부딪혔다. 곧장 사과를 하려는데, 그자가 갑작스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기다리느라 혼났네.”

술기운이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백천범은 하마터면 술 냄새에 쓰러질 뻔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자는 비단 옷을 차려입은 사내였다. 이십 대쯤 되어 보이는 그의 외모는 제법 준수했지만, 행동이 단정치 못했다.

사내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백천범은 있는 힘껏 그를 밀쳐 내고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좀 점잖게 구십시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아가씨도 아닌 척 마시오.”

그녀를 안으려 손을 뻗은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이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를 헛되이 저버릴 수는 없지 않소.”

그는 그녀를 숲속 깊은 곳으로 끌고 가려 했다.

놀란 백천범이 크게 성을 냈다.

“이런 호색한 같으니라고, 어서 손을 놓으시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오? 내 지아비가 이 사실을 알면 분명 당신을 죽이려 할 것이오!”

“날 죽인다고?”

그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하에 날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아가씨의 부군은 아마 그 안에 들지도 못할 테지.”

백천범은 큰소리로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일이 커져 묵용감의 체면이 상할까 걱정이 되었다. 백천범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간 쌓은 실력을 발휘하면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붙잡히지 않은 한쪽 팔을 들어 그의 두 눈을 찔렀다.

사내는 깜짝 놀랐는지 빠르게 몸을 틀며 중얼거렸다.

“제법 앙칼진걸.”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참 매력적이란 말이야.”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웃자 그의 표정은 더욱 저열해 보였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백천범은 그의 발을 세게 짓밟았다. 그는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반응 속도는 매우 빨랐다. 그가 한 손으로 백천범의 옷섶을 꽉 움켜쥐더니 힘껏 다른 손을 휘둘렀다.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있을 것이지, 어딜 감히!”

백천범은 그가 무술에 뛰어난 자라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예왕豫王 전하, 손찌검을 하신다면 일이 커질 것입니다.”

이자는 다름 아닌 황제의 황숙, 예왕이었다.

늦은 나이에 자식을 얻자 크게 기뻐한 선황은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유독 그에게 관대했다.

귀하게만 자란 그는 제멋대로인 성격이 되어 버렸고,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새와 귀뚜라미 따위를 기르며 여인들을 찾았다. 기이한 취향이 있던 그는 몰래 정을 통하는 것을 즐겼는데, 단정한 여인들 대신 어린 부녀자들을 유난히 더 좋아했다.

예왕은 옆에 있는 자를 뚫어져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난 또 누구라고. 우리 구문제독 나리잖아. 성문을 지키지 않고 궁에 와서 무얼 하는 것이냐? 황제 폐하께서 네 자리도 준비해 주셨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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