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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68)화 (167/1,192)

제168화

백 귀비는 백천범을 힐끗 바라보았다. 백천범 또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그저 작은 오해가 있었던 것이지요. 초왕비도 개의치 않아 하였습니다.”

황후가 정색하며 말했다.

“초왕비가 마음이 넓어 개의치 않는다 한들 봉명궁에서 일어난 일이니 본궁이 책임지고 처리해야 하네. 어느 노비가 그리 눈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인가? 본인이 스스로 뺨을 때리게.”

황후의 명에 금보는 슬쩍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 귀비도 귀비에 불과했으니 황후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쩔 도리가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화를 참고 있었다.

백천범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상황을 구경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걷어찬 태감에게 잘못을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금보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양쪽 따귀를 번갈아 때렸다. 태감은 뺨을 때리는 데 나름의 요령이 있는지 소리는 요란해도 힘이 실리지 않아 얼굴에 자국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의 뺨을 때릴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소리가 큰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얼굴이 부어오를 정도로 때렸다.

너그러운 황후는 하인들을 심하게 몰아세우지 못했다. 특히나 오늘은 명절이었기 때문에 죄를 추궁한 것만으로도 적당한 결정으로 여겼다.

백 귀비와 백천범을 안으로 청하려던 찰나, 누군가 급히 문턱을 넘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존귀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을 가진 그, 묵용감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다른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백천범만 위아래로 살피며 물었다.

“어딜 차인 것이오?”

백천범은 고자질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던 습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요.”

이내 백천범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차이긴 했는데 제가 빠르게 피해서 별로 안 아팠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민첩함을 칭찬할 겨를도 없이 곧장 분노가 치밀었다. 그가 그토록 아끼는 여인을 감히 발로 차다니?

묵용감의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시선이 궁녀와 태감을 훑었다.

“누가 한 짓이냐?”

초왕의 위엄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황제보다 더 무서운 그의 기세에 노비들은 고개만 숙이고 벌벌 떨었다. 가장 두려웠던 사람은 역시나 금보였다. 이미 스스로 따귀까지 때렸는데 더 큰 후환이 기다리고 있다니…….

그가 또다시 백 귀비를 슬쩍 바라보았다. 주인이 대신 선처를 빌어 주길 바라며. 하지만 백 귀비는 두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울상이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엎드려 고했다.

“소인의 눈이 멀어 초왕비 마마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묵용감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발차기를 좋아한다면야.”

그가 뒤를 돌아 황후에게 예를 갖춰 말했다.

“황수皇嫂, 이 노비를 제게 주십시오.”

금보는 어리둥절했다. 때리거나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달라니. 하지만 그에게 보내지는 것 또한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황후에게 청했다.

“마마, 소인 왕야께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희 주인 마마 곁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마.”

황후가 보기에도 이상했다. 벌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노비를 데려가겠다니……. 대체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다들 의아해하고 있는데 백천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왕야, 데려가서 어찌하시려고요? 누군가를 발로 차고 싶을 때 쓰시려는 거예요?”

묵용감은 금세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날마다 왕비가 저자를 발로 찰 수 있게 해 주려던 참이오. 어떻소?”

다들 어안이 벙벙해져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지혜롭고 위엄 있는 초왕에게서 이런 황당한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초왕이 초왕비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발로 걷어찼으니 초왕은 금보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벌을 받으면 잠시 고통스럽겠지만 목숨은 건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저택에 끌려가면 평생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죽느니만 못한 삶이 아닌가?

황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런 쓸모없는 노비를 데려가면 식량만 축낼 뿐이지요. 제 주인 곁에 머물며 잘 가르치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묵용감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황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할까요?”

“본궁이 이미 벌을 준 데다 도량이 넓은 초왕비도 저자를 원망하지 않으니 셋째도…….”

황후가 그를 셋째라 부른 것은 가까운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라는 일종의 암시이기도 했다. 하지만 묵용감이 이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그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본왕도 더 이상 저자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본왕이 벌을 내리겠습니다.”

어느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호칭이 황후가 되어 있었다. 명백히 화가 났다는 의미였기에, 황후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보잘것없는 노비 때문에 화를 삭이는 일은 없어야지요.”

묵용감이 금보 앞에 다가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쪽 다리로 걷어찼느냐?”

해가 점점 저물어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바닥에 붙어 몸을 떨던 금보의 등은 땀으로 흥건했다.

오랫동안 노비 생활을 한 그는 주인이 입만 열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지금은 애원해도 소용없다. 초왕비를 걷어찬 다리를 내놓지 않으면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벌벌 떨던 그가 자신의 왼쪽 다리를 가리켰다.

“그, 그것이, 이쪽 다리이옵니다.”

묵용감은 그를 힐끗 보고 백천범에게 말했다.

“바람이 부니 밖에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시오. 회복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각별히 주의해야 하오.”

백천범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황후가 그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금보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백 귀비는 싸늘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묵용감이 그제야 다리를 들어 올렸다. ‘뚝’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금보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 쓰러진 금보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묵용감이 안으로 들어오자 백천범이 그에게 물었다.

“왕야, 그 공공公公을 어찌하신 것이에요?”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정말 속도 좋았다. 자신을 걷어찬 사람에게 깍듯이 공공이라는 표현을 써 주다니. 그가 언짢아하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백천범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웃으며 물었다.

“왕야께서 분명 똑같이 발로 걷어차셨겠지요, 제 말이 맞죠? 왕야께서는 너무 심하게 차셨을 테니 제가 찼어야 해요. 그 공공도 틀림없이 크게 봉변을 당했을 거예요.”

다리를 부러뜨렸으니 심하게 찬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금보는 봉변은커녕 이득을 보았다.

노비가 주인을 비방하면 혀를 뽑는 형에 처하는데, 금보는 한술 더 떠 걷어차기까지 했다. 마음으로는 열 번을 죽여도 시원찮았다. 그러니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끝났다면 큰 이득을 취한 게 아닌가?

백 귀비는 묵용감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자신의 호갑투만 만지작거렸다.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지만 표정은 그 누구보다 온화했다.

묵용감과 몇 차례 부딪히다 보니 이젠 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다른 이의 체면을 중시하며 매몰차게 대하는 법이 없던 황제와 달리 그는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제멋대로 굴기 시작하면 황제조차 말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괜한 해코지를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그의 앞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차를 들이켜며 묵용감과 백천범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둘의 대화는 황후가 상상했던 연인의 대화가 아니었다. 절친한 오누이가 대화하는 듯 보였다.

묵용감이 목소리를 낮춰 백천범을 꾸짖었다.

“꿇으라는 말에 곧장 무릎을 꿇는 사람이 어디 있소. 잘못한 일이 없을 땐 황제 폐하를 뵈었다 해도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면 되는 것이오. 노비의 말에 곧바로 꿇어 버리다니, 본왕의 체면을 참으로 잘 세워 주었소.”

백천범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은 그녀의 머리에 살짝 꿀밤을 주며 말했다.

“되었소. 다음부턴 꼭 기억해 두시오. 배는 고프지 않소? 무엇이 먹고 싶소?”

백천범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

“과실즙이 먹고 싶습니다.”

“…….”

묵용감은 그녀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했건만 그녀는 아예 귀담아듣지도 않은 듯했다.

황후가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보고 있으면 참 기분이 좋아지는 아이였다. 백천범이 변을 당하자마자 초왕이 곧바로 달려왔으니, 분명 사람을 심어 놓은 듯했다. 그것만 봐도 그가 백천범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출가 전부터 묵용감을 알았던 황후는 그와 황보주아의 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일 때문에 묵용감은 그간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내왔다. 그렇게 삭막했던 사내의 마음이 그녀를 향했으니 분명 애닳도록 사랑할 것이었다.

설사 본인은 아직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은 한눈에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백천범은 조금 어수룩해 보이긴 해도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 * *

어둠이 짙어지자 궁 안에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일렬로 이어진 등불에 불이 들어오니 꼭 구슬이 빛나는 듯했다. 연회석은 광활한 평지인 개화오桂花塢에 차려졌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계수나무 숲이 있었고 앞쪽으로는 태명호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에는 꽃으로 장식한 배가 오색 등롱을 달고 유유히 물결을 가르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세 단으로 이루어진 층계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들쭉날쭉한 게 제법 운치가 있었다.

호수 물이 층계를 타고 떨어지면서 폭포처럼 시원한 소리를 냈다. 매년 중추절 연회가 열리는 이곳은 물가의 풍경을 감상하거나, 배를 타고 달을 구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연회장 가운데에는 병풍이 놓여 있었다. 한쪽은 황제와 신하들이, 다른 한쪽에선 황후와 여인들이 연회를 즐겼다. 궁녀와 태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화려하게 치장한 후궁들은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연회장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인사말이 끊임없이 오갔다.

백천범은 황후, 백 귀비와 함께 연회장을 찾았다. 그녀의 자리는 다른 왕비들과 함께 앉는 종친 자리였다. 초왕비인 그녀는 황후를 제외하고 지위가 가장 높았다. 비록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황후가 직접 그녀를 데려왔으니 그 지위와 영예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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