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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67)화 (166/1,192)

제167화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영구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가동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가동은 초왕의 안색을 뒤늦게 살핀 것도 모자라 도리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사장풍 저놈이, 때와 장소를 가릴 줄도 모르고.”

그가 말을 마치려는데 묵용감의 낮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뻔뻔한 놈!”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가동은 서둘러 영구를 바라보았지만, 영구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곱지 않은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가마가 멀어진 뒤에도 사장풍은 하염없이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참령 주자명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누굴 그리 뚫어져라 보는 거야?”

백천범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사장풍이 갑작스러운 손길에 혼비백산하자 주자명도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혼이 나갔는가?”

그가 목을 길게 빼고 사장풍이 바라보던 곳을 쳐다보았다.

“초왕야의 시녀들을 보고 있었군. 가마에 타고 계신 분은 초왕비이신가? 두 시녀가 참으로 어여쁘군. 어쩐지 이렇게 정신이 팔려 있더라니.”

같은 품계인 사장풍과 그는 평소 사이가 아주 좋았다. 사장풍은 괜스레 격이 높은 체를 하며 대꾸했다.

“내가 무엇 하러 시녀를 보겠나.”

“시녀를 보는 게 아니라면, 설마 초왕비를 보는 것인가?”

주자명이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초왕야께서 백 승상과 원수지간인데 백씨 아가씨에게는 그리 잘해주시다니 말이야.

이번 순행에서도 왕비께서 병이 나셨다는 소식에 황제 폐하까지 내버려 두고 그대로 가버리시질 않았나. 폐하께서 크게 성이 나셔서는 가동에게 한바탕 질책을 하시더니, 돌아오신 뒤로는 별말씀 없으시군.”

그에 말에 사장풍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초왕야껜 늘 관대하셨잖아. 게다가 친형제 간엔 봐주며 지나가는 법이지.”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우리 초왕야께서는 참 다정하신 분이란 말이야. 황보 집안의 아가씨 때문에 계속 혼사를 미룬 일로 폐하께서 흰머리가 날 만큼 근심이 크셨다던데. 그래도 지금은 백씨 집안 아가씨께서 왕야 눈에 들었으니 이제 걱정이 없지.”

사장풍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네가 뭘 알아? 초왕야와 백씨 아가씨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그럼 어떤 건데? 나한테도 좀 알려 줘 봐.”

사장풍은 소문이 퍼지면 백천범에게 좋지 않을까 봐 자세히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사장풍은 주자명이 계속해서 캐물을까 봐 서둘러 자리를 떴다.

주자명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황제 폐하까지 내팽개치고 돌아왔는데 모르긴 뭘 몰라. 내가 보기엔 네가 더 모르는구먼 그래.”

* * *

오문에 다다른 초왕 일행은 궁 안을 오가는 작은 가마로 옮겨 탔다. 작고 가벼운 가마는 사방에 자금색 술이 드리워져 있었다. 흔들릴 때마다 물결이 넘실거리는 듯 술이 찰랑거렸고, 햇빛이 더해지자 반짝거리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

황실 규율에 따라 남자와 여자는 각각 황제와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가야 했고, 연회에서도 서로 떨어져 앉아야 했다. 하지만 개방적인 풍속을 가진 동월국은 연회를 즐기며 남녀가 서로 교류하는 일이 잦았다.

백천범이 일찍 입궁한다는 소식을 들은 황후가 직접 밖으로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백천범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의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네. 지금은 좀 괜찮은 것인가?”

“이젠 괜찮습니다.”

백천범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후마마의 과실즙이 무척 마시고 싶었는데 오늘은 맘껏 마실 수 있겠네요.”

“왕비가 원한다면 본궁이 얼마든 대접하겠네. 지난번 초왕이 가져갔던 것은 다 마셨는가?”

“아직 남았습니다. 지난번에 궁에서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돌아가자마자 쓰러져 잠들었거든요. 그 일로 화가 나셔서 많이 못 마시게 하십니다.”

황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왕비가 취할까 봐 걱정이 된 것이겠지. 취하면 몸에 좋지 않으니 초왕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는가?”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정말 절 아껴 주십니다. 어릴 땐 유모 외에는 아무도 절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왕야께서 저를 살뜰히 신경 써 주시는 걸 보면 저희 아버지보다 저를 더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백천범이 초왕과 백 승상을 한데 섞어 논하자 황후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말을 재미있게 하는 아이와 함께라면 번잡한 마음도 크게 줄어들 것만 같았다. 초왕도 백천범의 이런 모습에 반해 그녀를 그토록 좋아하는 모양이다.

“초왕에게 짬이 나거든 왕비를 궁에 보내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해 달라고 몇 차례나 말했는지 모른다네. 이렇게 깊숙한 궁 안에만 있으니 본궁도 너무 갑갑해서 말일세.”

“황후마마, 갑갑하시다고요?”

백천범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많은 후궁들이 있는데 함께 놀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야말로 저택에서 얼마나 갑갑한지 모릅니다.”

황후가 말했다.

“왕비를 친동생이라 여겨서 하는 말인데, 그 많은 후궁이 한 명의 지아비만 바라보고 있으니 겉으론 온화해 보여도 다들 보통내기가 아니라네.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은가? 단 한 명도 없네.”

백천범이 말했다.

“그렇군요. 황제 폐하께서는 다 좋으신데 부인이 너무 많은 게 좀 그렇습니다. 저와만 혼인을 해 주는 부군이 있다면, 저는 농부에게 시집을 가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황후가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만약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정말 농부에게 시집을 가겠는가?”

“그자가 첩만 들이지 않는다면 정말 갈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다면 초왕이 첩을 들일 때 어째서 막지 않은 것인가?”

“제가 막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초왕야께서 첩을 들이는 것은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왕야께서 좋으시다면 그걸로 된 것이지요.”

황후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초왕은 백천범을 보배처럼 끔찍이 아끼는데 그녀는 그의 마음을 마다하는 듯했다.

“상관이 없다?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단 말인가?”

“상관없습니다. 제가 신경을 쓰고 말고 할 처지도 아니지요. 왕야께서도 절 여동생으로 삼으시겠다며 두 해쯤 지나 저택에서 내보낼 거라고 하셨습니다.”

황후는 깜짝 놀랐다. 예전에 황제에게서 들었지만 지금 초왕이 백천범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모두 아는 상황이다. 그런데 아직도 여동생으로 여긴다니? 설마 그녀가 모르는 이야기가 더 있단 말인가?

해 질 무렵이 다가오자 궁 안을 관리하는 유모와 태감들이 황후를 찾아와 각종 지시 사항을 묻기 시작했다. 분부를 내리느라 분주해진 황후는 백천범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백천범은 홀로 복도를 거닐며 산책했다.

복도에는 새장이 몇 개 걸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물총새와 꾀꼬리가 있었다. 백천범이 입을 삐죽 내밀고 온갖 기괴한 소리를 내며 새를 불러 보았지만, 새들은 낯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백천범은 더욱더 열심히 새소리를 내느라 사람들이 다가오는 줄도 몰랐다.

가장 앞에 서 있던 태감은 웬 계집이 인사는커녕 새를 부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자 굳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이런 뻔뻔한 계집을 보았나.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깜짝 놀란 백천범은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곧장 무릎부터 꿇었다.

궁의 규율을 알지 못했던 백천범은 하필 길을 막고 자리를 잡았다. 성질이 괴팍했던 태감은 발을 들어 올려 그녀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저리 꺼지거라!”

어릴 때부터 워낙 많이 맞았던 백천범은 맞기도 전에 슬쩍 넘어지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스치기만 해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넘어지는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그녀는 후다닥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고개를 들어 걷어찬 사람을 바라보니 태감도 의문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낯선 계집이니 황후 곁에서 일하는 여종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주 화려하게 치장하진 않았지만 궁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태감은 자신이 괜한 사람에게 발길질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뒤따르던 가마에는 한껏 꾸민 여인이 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른하게 졸던 그녀, 백 귀비는 백천범을 본 순간 눈을 크게 뜨며 아는 체를 했다.

“이런, 우리 집안사람도 몰라보다니. 금 태관, 어서 초왕비에게 사죄하게.”

태감 금보金保는 자신이 초왕비를 걷어찼다는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혹시나 초왕이 이 사실을 알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백 귀비의 태감이자 서복궁의 총 관리인이었다. 게다가 초왕과 백승상은 원수지간이니 그도 그리 주눅들진 않았다.

그는 백천범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느릿느릿 말했다.

“소인의 시야가 좁아 감히 초왕비께 우를 범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백천범은 그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백 귀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갑작스레 무엇인가 생각난 듯 백 귀비 앞에 다가가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귀비 마마를 뵈옵니다.”

예의를 차려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이 우스웠던 백 귀비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녀를 일으켰다.

“백씨 집안 자매끼리 굳이 인사치레를 하다니. 네가 입궁하였다기에 본궁이 특별히 보러 왔다.”

백천범은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새 신발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을 본 그녀는 급히 손으로 먼지를 털어 냈다.

그 모습에 궁녀와 태감은 입꼬리를 올리며 몰래 웃었다. 살아생전 이런 왕비는 본 적이 없었다. 동월국의 귀족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노비들의 몫이었다.

금보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초왕비의 소문은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서녀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계집아이라는 소문이었다. 지금은 초왕비의 자리에 있으니 그나마 사과라도 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걷어차고 지나갔을 터였다.

소식을 들은 황후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별 탈 없어 보이는 백천범의 모습에 황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초왕이 자신에게 백천범을 맡겨 놓았는데 사달이 난다면 그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서둘러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백 귀비는 방금의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는 건 백천범도 마찬가지였다.

황후 또한 사소한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게 가장 좋을 것이라 여겼지만, 초왕이 이 소식을 들을까 봐 걱정되었다. 만약 그녀가 불공평한 대우를 했다고 여기면 초왕과 그녀 사이에도 거리가 생길 수 있었다.

그녀는 결국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 귀비의 노비가 초왕비에게 우를 범했다 들었네. 그런 일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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