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66)화 (165/1,192)

제166화

어렵사리 구해 온 닭을 돌려보내라니! 헛수고를 한 셈이지만 주인의 명을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학평관은 머슴들에게 다시 닭을 잡아 오라고 분부했다. 그 바람에 마당엔 또다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묵용감은 다시 백천범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백천범은 어느새 복도에서 가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가동이 무언가 품에서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물건을 받아 든 백천범은 귀중한 것이라도 되는 듯 기뻐하며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묵용감은 미간을 찌푸렸다. 백천범이 다른 사내와 가까이 있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가동은 그녀의 사부였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친밀해도 책망할 수 없었다. 묵용감은 대체 가동이 무엇을 주었길래 그녀가 이리도 기뻐하는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가 그녀가 방으로 돌아가자 가동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방금 왕비에게 무엇을 준 것이냐? 아주 기뻐하던데.”

가동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소인이 드린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부탁을 받고 전해 드린 것입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누가?”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가동이 뜸을 들이며 말했다.

“왕야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 그자 말입니다.”

묵용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라니? 묵용감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자 가동이 곧장 대답했다.

“사장풍이 준 것입니다.”

묵용감은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동안 그녀와 매일같이 함께 있다 보니 그의 존재를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것도 모자라 남의 부인에게 몰래 선물까지 주다니. 아주 몹쓸 놈이었다.

* * *

씩씩했던 백천범은 금세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노랑이가 다른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종종 기침을 하긴 했지만 백천범은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오랜 기간 월규와 월향을 보지 못한 그녀는 묵용감에게 남월각에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설구와 구구도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묵용감은 허락하지 않았다. 심하게 병을 앓아 수척해졌으니 제대로 몸조리를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사실 백천범은 수척해지기는커녕 살이 조금 올라 있었다. 각종 진귀한 약재로 몸보신을 하다 보니 그녀의 얼굴은 갓 쪄낸 두부처럼 뽀얗기 그지없었다. 그 때문에 묵용감은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의 볼을 꼬집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백천범은 그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여기는 듯 무슨 일이든 그에게 털어놓았다. 기홍이 새로운 간식을 만들어 준 것부터 녹하가 새로 알려 준 자수 도안까지 그에게 모두 말해 주었다.

누군가 옆에서 떠드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묵용감이었지만,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싫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열면 꼭 아침 일찍부터 새가 지저귀는 듯 명랑했다.

그는 그녀가 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참 좋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손발을 움직여 가며 말하는 게 혼자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보면 그는 넋을 잃곤 했다.

그러다 마지막엔 늘 붉은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고 자신도 모르게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가며 까닭 없이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백천범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툭 치며 말했다.

“제가 말하고 있는데 또 넋을 놓으시고, 오빠라면서 정말…….”

그는 오빠라는 소리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한동안 놓고 있던 정신을 번득 차렸다. 그가 그녀를 떠보듯 물었다.

“내가 더 이상 오빠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겠소?”

백천범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가 아니면 무얼 하실 건데요? 설마 아버지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시지요?”

그는 하마터면 성을 낼 뻔했다. 고작 생각해 낸 게 아버지라니! 꽃가마를 타고 시집온 정실이면서 자신을 지아비라 여기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의 얼굴이 굳어지자 당황한 그녀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곧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야, 화내지 마시어요. 아버지든 오빠든 모두 제게 가장 가까운 사람인걸요. 만약 아버지가 싫으시다면, 그러면, 그…….”

지아비는 그 둘보다 덜 가까운 사람이란 말인가? 혼인으로 맺어진 인연이라는 것도 잊은 듯 그녀의 말은 참으로 답답했다.

하지만 놀란 병아리처럼 겁을 먹은 그녀의 모습에 가슴 깊이 일렁이는 화를 차마 드러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손을 몇 차례 내저으며 그녀를 내보냈다.

방을 나선 백천범은 곧장 기홍과 녹하에게 초왕이 또 변덕을 부리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묵용감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매번 입가에 맴돌던 말을 뱉지 못한 것은 그녀가 거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가까워진 두 사람의 관계도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는 고개를 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살이 빗발치고 핏빛으로 물든 전장에서 전투를 치를 때에도 그는 두려움을 몰랐다. 그런데 고작 어린 여자 때문에 겁을 먹다니…….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 * *

중추절이 되었다. 기홍과 녹하는 이른 아침부터 백천범의 치장을 도왔다. 두 시녀는 초왕비라는 칭호에 맞게 백천범을 화려하고 우아하게 꾸며 주려 애썼다.

하지만 백천범은 화려하게 꾸미는 걸 원치 않았다. 그녀는 그런 차림이 너무 과하다고 여겼다. 더욱이 건강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무거운 장신구를 달고 싶지 않았다.

백천범이 거부하자 묵용감은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 또한 그녀가 반짝이는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평소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걸 원치 않았다. 안 그래도 번잡스럽고 불편한 자리인데, 최대한 그녀가 편안하게 있길 바랐다. 그녀가 무명옷만 걸친다 한들 그녀는 그의 초왕비였다.

결국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비녀로 머리를 고정한 뒤, 양옆으로 화려한 뒤꽂이를 꽂았다. 미간에 화전을 그려 넣고 눈썹 먹으로 눈썹을 그린 뒤, 눈꼬리에도 살짝 덧칠하니 눈이 더욱 크고 또렷해 보였다. 여기에 옅은 색 연지로 볼에 색을 입히고 입술에는 붉은색 연지를 덧발라 반짝이는 윤기를 더했다.

치장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일렁인 묵용감은 괜히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만 바라보았다.

채비를 마친 묵용감과 백천범은 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시중을 들 일이 생길까 봐 이번에는 기홍과 녹하도 함께했다.

백천범이 탄 가마는 묵용감의 가마였다. 밝은 은색 지붕에 어두운 황색 덮개가 덮여 있었고, 가마 주변으로는 붉은 천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부가 어찌나 넓은지 눕기에도 충분했다.

백천범은 기홍과 녹하에게 함께 타자고 권했지만, 그녀들은 한사코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백천범은 창을 걷어 올리고 두 시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궁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앞장서 걷던 묵용감이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백천범이 창가에 기대 턱을 괸 채 두 시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감기도록 웃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볼 땐 온화함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평소의 위엄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 * *

많은 대신과 귀족이 가솔을 이끌고 입궁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도로를 통제했다. 은색 갑옷을 입은 금군禁軍(궁중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경비하던 친위병)과 순포巡捕(청대淸代 총독總督·순무巡撫 등 지방 장관의 선전·경호를 맡았던 관원)가 거리 곳곳을 순찰하자 제법 긴장감이 돌았다.

초왕을 본 병사들이 하나둘 예를 갖췄다. 백천범은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모습으로 바깥 풍경을 살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는 묵용감에게 인사를 한 후 백천범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백천범도 손을 흔들어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가지고 있던 수탉 조각을 들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공무 수행 중이었던 사장풍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분명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땐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지난번 그녀의 모습이 가슴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 늘 그녀가 어른거렸다.

게다가 그의 선물을 지니고 있는 걸 보니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그녀 또한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상황이 애석하기만 했다.

그래도 입궁 후에 기회가 되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할수록 그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녀와 함께 중추절을 보낼 수 있다니! 휘영청 밝은 달 아래에서 그녀와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초왕의 태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중매를 서 줄 것처럼 행동하더니 어째서 아무런 진척도 없는 것이란 말인가? 설마 그가 백천범에게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깊이 고민한 끝에 사장풍은 초왕이 그들의 사랑을 이어 줄 마음이 생기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탓에 혼사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지금은 종삼품에 올라 방위와 경비를 관리하고 있지만 황제가 금군을 통합해 새로운 부처를 편성할 계획이라는 소문대로라면 구문제독의 지위가 더 높아질지도 모른다. 만약 정상품이 된다면 매일 아침 조정 조회에 참석하는 젊은 유망주가 되는 셈이다. 그럼 초왕의 눈 밖에 날 일도 없을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백천범의 의지였다. 그는 오늘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 볼 계획이었다. 만약 그녀도 그를 원한다면 초왕이 그 뜻을 거스를 리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수탉 조각을 보고 확신이 생긴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묵용감이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보니 백천범은 한껏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좇던 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벌레를 삼킨 듯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들고 사장풍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에 사장풍이 준 수탉 조각이었다.

사실 묵용감은 그 선물 때문에 단단히 짜증이 나 있었다. 그녀는 노랑이에 대한 감정을 그 조각에 모조리 담기라도 한 듯 날마다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는 조각이 눈에 띌 때마다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백천범은 그 조각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지금도 몸에 지니고 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