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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65)화 (164/1,192)

제165화

묵용감은 아무 말없이 떠난 일로 황제가 분명 성이 났으리라 생각했다.

한바탕 혼쭐이 날 각오로 찾아왔지만 그를 본 황제는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원망이나 꾸지람은커녕 그의 순행 준비가 탁월했다고 칭찬까지 했다. 황제가 꾸짖지 않아 먼저 매를 맞으려 입을 열려던 찰나 황제가 화제를 바꾸었다.

“초왕비의 상태는 좀 나아졌느냐?”

묵용감이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저 사소한 일이었을 뿐인데,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사소한 일?”

황제가 그를 놀리듯 말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병사들과 짐을 버리고 가 놓고 사소한 일이라니. 어디 그뿐이더냐, 의정을 날마다 저택으로 부르며 소란을 피우는데 어찌 짐이 모를 수 있겠느냐.”

그날은 너무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처사를 하지 못했다는 걸 묵용감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래도 백 승상의 아가씨인데 무슨 일이 생겼다간 퍽 난감하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황제가 말했다.

“초왕비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백 승상이 널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 황제가 비슷한 말을 했다면 곧바로 반박을 했겠지만 오늘만큼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묵용감은 그저 가만히 침묵만 지켰다.

황후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아주 좋은 산삼과 제비집이 있습니다. 가져가 초왕비에게 먹이십시오.”

묵용감은 곧장 절을 올리며 황후와 황제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황제가 태연하게 말했다.

“다 한가족인데 고마워할 필요 없다. 아무리 황실이라 한들 인륜은 소홀히 하지 않는 법이지. 형수가 동서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모두 한가족이지요. 초왕비가 건강을 회복하면 궁에 보내주십시오. 동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잠시 후 그녀가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곧 중추절이 다가오니 그날 함께 오시지요. 연회가 열리는 저녁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조금 일찍 와서 제게 얼굴 좀 보여 주십시오.”

중추절 당일엔 조정 신하와 왕족들을 궁으로 초청해 대규모 연회를 열었다. 초왕비인 백천범은 반드시 입궁해야 하는 연회였기에 묵용감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 * *

오문 밖에서 가동과 영구가 한껏 진지한 모습으로 초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사장풍이 나타나더니 가동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동은 조심스레 뒤로 물러나 나무 아래로 향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찾아왔지.”

사장풍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병이 나셨다면서. 괜찮으신 거야?”

가동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하여간 소식은 빠르다니까, 누가 알려 줬어?”

“그건 알 거 없고, 묻는 말에나 답해. 왕비 마마께선 좀 괜찮아지셨어?”

“그런 것 같아.”

가동이 말했다.

“나도 오늘 돌아와서 잠깐밖에 못 뵀어. 이제 막 회복하셔서 기운은 없으신데 그래도 살은 좀 찌신 것 같더라.”

사장풍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왕비 마마께서 사라진 닭 때문에 상심이 커서 병이 나신 거라며.”

그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가동에게 건넸다.

“왕비 마마께 전해 줘. 닭이 생각날 때마다 이걸 보시면 늘 그 닭과 함께 있는 것 같을 거야.”

받아 보니 나무로 조각한 작은 수탉이었다. 색을 입히고 깃까지 꽂아 진짜 닭처럼 보이는 정교한 조각이었다.

가동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보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

그러다 갑자기 이상함을 느꼈는지 가동이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물었다.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왕비 마마께 마음을 썼다고?”

사장풍이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흔들었다.

“왕비 마마께서 내게 주머니를 두 개나 선물해 주셨으니 나도 답례를 해야지.”

가동이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주머니를 또 주셨다고? 왕비 마마께서 널 정말 귀하게 여기시나 봐.”

사장풍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아무튼 이것만 잘 전해 드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말을 마친 그는 급히 자리를 떴다.

가동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갑작스레 자신의 허벅지를 치며 말했다.

“이 자식. 진짜 마음이 있나 보네.”

* * *

묵용감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태의원으로 향했다. 마침 당직을 서던 좌당중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 마침 오셨군요.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묵용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왕비를 치료할 방도를 찾은 것인가?”

좌당중이 탁자에 놓인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일첩 의원이 왕비 마마께서 부인과 관련 질환이 있으시다고 하더군요. 자궁을 따뜻하게 해 주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고 했지만 소관이 몇 차례나 왕비 마마의 맥을 짚어도 체내에 냉기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여 그가 처방한 약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모두 증세를 낫게 하는 좋은 약이었습니다. 정말 왕비 마마께서 그 약을 드신 것이라면 지금처럼 몸에 냉기가 쌓일 수는 없사옵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은…….”

“틀림없사옵니다.”

좌당중이 말했다.

“처방전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잘못된 약재를 드셨거나 약을 달일 때 문제가 생겼을 것이옵니다. 왕야께 솔직히 말씀드리면 궁에서는 아주 빈번한 일입니다. 왕야의 저택에는 세 분의 왕비 마마밖에 안 계시니 어렵지 않게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달이고 남은 약재를 남겨 두셨다가 소관에게 보여 주시면 왕비 마마께서 그간 무슨 약을 드셨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월경을 닷새쯤 앞두고 먹는 약이니 때가 되면 남은 약재를 의정에게 보내겠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좌당중은 조금 의아했다. 자질구레한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듯한 초왕이 여인들의 일까지 이렇게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놀라웠다. 하긴, 며칠간 초왕비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 정도는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초왕과 백 승상의 사이를 생각하면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을 초왕이 유난히 아끼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초왕비를 귀한 보물처럼 대하니, 분명 그녀에게 흠뻑 빠져 있는 듯했다.

굳센 기개를 가진 사내의 마음이 움직였으니 흘러넘치는 용암과도 같은 마음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좌당중의 생각에, 백 승상의 다섯째 아가씨는 참으로 복이 많은 여인이었다.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묵용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또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닭을 죽인 것도 모자라 약까지 바꾸다니. 대체 누구의 짓이란 말인가?

후원엔 고작 두 사람뿐이었으니 범인 색출은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찾아낸 후가 더 문제였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이런 음흉한 짓을 저지르는 자의 목을 베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하지만 권세 높은 집안의 딸인 그녀들이 받을 벌은 고작해야 저택에서 쫓겨나는 것뿐이다.

저택 중문에 다다른 그는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 앞에는 백천범이 망토를 걸친 채 가만히 노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안색이 창백한 것이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깜짝 놀란 그는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 걸음 만에 다가가 물었다.

“왜 나와 있는 것이오? 침대에 누워 좀 쉬라고 하지 않았소?”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멍한 표정은 꼭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묵용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갈 때까지만 해도 괜찮더니 잠깐 사이에 어찌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서둘러 하인을 부르려는데 백천범이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묵용감은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 오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듯한 기분에 조금은 흐뭇하기도 했다.

“왜 그러는 것이오. 무슨 일이 있거든 나에게 말해 보시오. 내가 해결해 주겠소.”

백천범은 그의 옷자락을 잡고 엉엉 울기만 할 뿐이었다. 기홍과 녹하는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뿐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묵용감은 눈빛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두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묵용감의 마음은 초조했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울지 마시오. 대체 왜 그러는 것이오? 날 큰오빠라고 여기는 것 아니었소? 무슨 일인지 내게 털어놔 보시오.”

백천범이 그의 품 안에서 얼굴을 문지르는 탓에 그의 옷깃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즉에 내쳤겠지만, 그에겐 누구보다 소중한 그녀였기 때문에 옷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우는 이유를 말하지 않자 그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위로할 뿐이었다.

한참 후, 백천범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빨개진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왕야, 노랑이가 죽었어요.”

묵용감이 가장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노랑이는 그저 한 마리 닭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쉽게 지울 수 없는 단짝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까지 목 놓아 운 것도 다 죽은 노랑이 때문이었다. 묵용감은 그녀를 그저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노랑이는 죽지 않았소. 저기에 멀쩡히 있지 않소? 한동안 노랑이와 함께 놀지 못해 왕비를 낯설어하는 것이지,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닐 것이오.”

백천범이 훌쩍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풀밭을 거닐고 있던 닭은 아무리 바라봐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닭을 바라보던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은 뒤 목을 가다듬었다.

“왕야,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저 닭은 노랑이가 아니에요. 노랑이의 볏에는 작은 혹이 있거든요. 노랑이는 죽었어요. 뒷산에 죽어 있었어요. 왕야, 제발 노랑이를 찾아 주세요. 제 곁을 따라다닌 게 헛되지 않게 가는 길이라도 잘 보내 주고 싶어요.”

까맣게 빛나는 두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슬픔이 서린 눈동자로 담담히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슬픈 감정을 애써 눌러 참는 듯했다.

묵용감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알겠다고 답했다.

백천범이 물었다.

“저 닭은 어디에서 데려왔나요?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세요.”

묵용감이 말했다.

“저 닭을 키우는 것은 어떻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저 닭은 저와 연이 없어요. 게다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이곳에 왔으니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거예요. 세상에서 이별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으니 돌려주는 게 좋겠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묵용감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학평관을 불러 닭을 돌려보내라고 분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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