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묵용감은 천천히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희미한 불빛 아래, 이불 위로 살짝 솟아오른 자그마한 형체가 눈에 담겼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미동도 없이 이불을 덮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금 추웠는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이불 밖으로 얼굴만 살짝 드러내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니 약간 차가웠다. 가을로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불을 땔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이불을 살짝 들치고 침대에 앉았다. 자신의 체온을 그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경계심이 심했던 백천범은 작은 움직임에도 곧장 잠에서 깼기 때문에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인기척을 느낀 뒤였는지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당황한 그는 몸이 그대로 굳은 채로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아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백천범이 그의 한쪽 다리를 덥석 감싸 안았다. 그 뒤로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그는 그제야 자신의 등이 땀으로 흥건해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정식으로 혼사까지 치른 부부 사이임에도 함께 잠을 청하려면 몰래 행동해야 하다니, 그야말로 좀도둑이 따로 없었다.
한참 넋을 놓고 있던 그는 자신의 다리를 감싸 안은 손을 조심스레 풀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잠시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그의 품 안에서 편안하게 자리잡았다. 그녀는 마치 어미의 품속을 파고드는 어린 짐승처럼 얌전히 안긴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고요한 밤에 울리는 북처럼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혹여 그녀에게 들릴까 봐 그는 필사적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다행히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조금씩 안정을 되찾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순간,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고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뜬 백천범은 침대 장막 꼭대기에 새겨진 꽃무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젯밤 꿈에서 큰오빠를 보았다. 큰오빠는 그녀를 끌어안고 차가운 손발을 녹여 주었다. 큰오빠를 못 본 지도 벌써 삼 년이 흘렀다. 부대에서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저택을 나가면 큰오빠를 꼭 만나러 가겠다고 다짐하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때, 기홍이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백천범은 기침을 두어 차례 한 뒤 대답했다.
“목이 아프진 않은데 너무 간지러워서 기침이 나요.”
기홍이 말했다.
“안 그래도 왕야께서 배 꿀찜을 만들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너무 이르니 점심을 드신 다음에 드십시오. 기침을 멈추는 데 아주 좋을 것입니다.”
기홍의 말에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왕야께서는 정말 세심하시다니까요.”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은 몸이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잠시 밖에 나가고 싶어요.”
기홍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왕비 마마께서 의식을 회복하시면 조금씩 움직이는 게 좋다고 의원이 말했습니다. 침대에만 누워 있는 게 몸에 더 안 좋다고 합니다.”
백천범이 물었다.
“노랑이는요?”
“노랑이는 밖에서 놀고 있습니다.”
“보러 가야겠어요.”
“노랑이가 도망치는 것도 아닌데 그리 조급하실 것 없습니다. 세안부터 하시고 식사와 약까지 모두 드신 뒤에 보러 가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늘 기홍의 말을 잘 듣는 백천범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언니, 꼭 잔소리 심한 유모 같아요.”
기홍은 정말 잔소리가 심한 사람은 초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왕비와 관련된 일이라면 대여섯 번씩 반복해서 분부를 내리곤 했다. 꼭 자신과 녹하를 저택에 처음 온 시녀라고 착각하는 듯, 오밤중에 찾아와 왕비가 이불을 잘 덮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싶은지 그녀를 정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
* * *
사흘 후, 황제의 대규모 순행 행렬이 기세등등한 모습을 뽐내며 임안성으로 돌아왔다.
임무 수행을 마친 가동은 초왕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회림각으로 향했다. 막 중문을 들어서는데 복도에 서 있는 녹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기쁜 마음에 급히 달려가 물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녹하가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기다리긴 개뿔.”
가동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내가 돌아오는 걸 알고 기다리고 있던 거잖아. 맞지?”
녹하는 눈에 힘을 주며 또 한 차례 번득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황량한 외곽 지역만 순행하느라 살 만한 게 없었어. 그래서 성에 돌아오자마자 시장에서 이걸 사 왔지.”
그는 품에서 진주가 박힌 뒤꽂이를 꺼냈다. 그리 값비싸 보이진 않았지만 가느다란 은장식이 정교하게 드리운 게 제법 예뻤다.
녹하는 얼굴을 붉히며 딴청을 피웠다. 가동이 그녀의 손에 뒤꽂이를 쥐여 주려고 하자 녹하는 손을 뒤로 뺐다. 하지만 가동은 기어이 그녀의 손에 뒤꽂이를 쥐여 주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
얼굴이 더욱 새빨개진 녹하가 있는 힘껏 손을 빼내며 말했다.
“얼른 놔.”
가동은 못 들은 척 더욱 세게 그녀의 손을 움켜 쥐었다. 녹하가 그의 다리를 매섭게 걷어차자 가동이 그제야 손을 풀었다. 재빨리 그의 곁에서 멀어진 녹하의 모습에 가동은 잔뜩 풀이 죽었다.
녹하는 몇 걸음 가다 멈춰 서더니 몸을 돌려 그에게 무엇인가를 던졌다. 가동이 황급히 받아 들고 살펴보니 예쁘게 수를 놓은 주머니였다. 정교하게 새겨진 큼직한 ‘복福’자는 시원시원해 보이면서도 고급스러웠다.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뛰어간 가동은 조금 부끄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정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난번처럼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무심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다.
“왕야께선 안에 계셔?”
녹하는 괜스레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왕비 마마와 산책하러 가셨어.”
* * *
백천범은 문양이 새겨진 난간에 기대 풀밭에서 벌레를 잡아먹는 노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묵용감에게 말했다.
“왕야, 아프고 나니까 노랑이가 절 못 알아보는 것 같아요. 불러도 오지도 않고 말이에요.”
묵용감이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살이 빠져 모습이 달라지니 못 알아보나 보오.”
“살이 빠졌다고요?”
백천범이 자신의 둥근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는 좀 찐 것 같아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제 턱 좀 보세요. 이렇게 두 겹이 되었어요.”
“그렇소? 어디 한번 보오.”
묵용감은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장난스레 꼬집어 본 후에 말했다.
“조금 찐 것 같긴 하오. 한동안 침대에만 누워 움직이지 않았더니 살이 좀 쪘나 보군.”
백천범이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야께서는 눈썰미가 좋지 않으신가 봐요. 처음에는 살이 빠졌다 하시더니 지금은 또 쪘다 하시고 말이에요.”
묵용감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매일같이 왕비를 들여다볼 짬이 어디 있었겠소.”
백천범은 그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고 노랑이를 불렀다.
“노랑아, 가자. 벌레가 더 많은 곳으로 데려다줄게.”
노랑이는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겁을 내며 멀리 도망갔다. 말귀를 아예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속이 상했던 백천범은 웅크려 앉아 노랑이를 달랬다.
“왜 그래, 노랑아.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며칠 누워 있던 것뿐이라 변한 것도 없는걸. 너야말로 꼬리가 왜 이렇게 짧아졌어?”
그녀의 말에 흠칫 놀란 묵용감이 서둘러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웅크려 앉으면 머리가 어지러울 수 있소.”
그때 가동이 다가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이 그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왔느냐?”
“예. 소인, 사명을 다해 황제 폐하를 모시고 임무를 완수하였습니다.”
“그래, 황제 폐하께서 내게 남기신 말씀은 없으시더냐?”
“짬이 나거든 궁으로 한번 들라 하셨습니다.”
묵용감은 짧게 대꾸하고는 백천범에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하지만 백천범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왕야 먼저 돌아가시어요. 저는 좀 더 있다 들어갈게요.”
“아니 되오. 나와 함께 가야 하오. 혼자 이곳에 있겠다니!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이오?”
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함께 안으로 돌아갔다.
화가 났는지 백천범은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묵용감이 슬쩍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화낼 것 없소. 병이 다 나은 뒤에 마음껏 뛰어놀면 될 것 아니오. 곧 약도 먹어야 하니 얌전히 들어가서 좀 쉬시오.”
정말이지, 그는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을 수만 있다면 늘 품고 다니고 싶을 만큼. 하지만 위엄 있는 대장부가 사랑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못내 아쉽기만 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기홍에게 맡기고 두 호위무사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 * *
고단한 순행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황후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방문을 닫고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황후가 황제를 자세히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셋째가 도중에 먼저 돌아갔다는 소식은 신첩도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분명 크게 노하셨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 신가 봅니다.”
황제가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짐이 그리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초왕비가 크게 병이 난 탓에 셋째가 아주 초조해 했다고 들었소. 비록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났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짐이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오.”
그의 말에 황후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신첩이 보기에 초왕비에 대한 셋째의 마음이 정말 특별한 듯합니다. 말로는 여동생이라지만 이렇게 정성을 다하다니요. 밤새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초왕비의 곁을 지킨다 하옵니다.”
황제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리되었다 하니, 차라리 잘되었소. 황보주아의 일로 충격이 커 지금껏 혼사도 거부하던 아이오. 짐은 셋째가 황보주아 때문에 정말 홀아비가 될 줄 알았소. 지금은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으니 조만간 대를 잇는 것도 문제없을 듯하오.”
그때, 소태감이 들어와 고했다.
“초왕야께서 오셨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들고 소태감에게 답했다.
“들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