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63)화 (162/1,192)

제163화

“이런 게 아니에요.”

백천범은 감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유모가 주던 건 달콤한 감람이었어요. 아주 맛있었는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는 밥도 배불리 못 먹었는데, 간식은 더 말할 것도 없었지요. 명절 때 언니들이 사탕을 나눠 먹는 걸 보고 저도 유모한테 먹고 싶다고 졸랐어요.

마침 유모 고향 친구가 노점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데 조그만 감람은 너무 떫어서 아무도 사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유모가 그걸 잔뜩 얻어 와서는 차가운 곳에 이틀 정도 말리고 작게 칼집을 내서 설탕물을 발라 주었거든요. 차갑고 달콤한 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기홍은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녀가 말한 감람에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녀는 설탕에 절인 과일을 한 바구니 가져와 말했다.

“왕비 마마, 입에 하나 머금고 쓴맛 좀 달래시어요.”

입에 물고 있기만 할 백천범이 아니었다. 그녀는 우걱우걱 씹어 삼키고는 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기홍이 나무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의원께서 맛이 너무 강한 것은 많이 드시지 말라 하셨습니다. 약을 드시고 계시니 담백한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병이 완전히 다 나은 다음에 마음껏 드십시오.”

백천범이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저는 먹고 싶지 않은데 입이 참지 못하는 것이니 제 탓이 아니에요.”

기홍이 입을 가리며 웃더니 이불을 잘 덮어 주며 말했다.

“약을 드셨으니 한숨 주무십시오. 소인은 밖에 있을 것이니 무슨 일이 있으시면 바로 소인을 부르십시오.”

백천범이 물었다.

“노랑이는요?”

“밖에 있습니다. 녹하가 쌀 부스러기를 주었더니 신나게 먹고 있습니다.”

“언니, 노랑이랑 같이 있게 방에 들여보내 주면 안 돼요?”

“안 됩니다. 왕야께서 병이 다 나으신 뒤에 함께 놀라고 하셨습니다. 냄새가 심하니 그 전까진 방에 들일 수 없습니다.”

백천범은 그제야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언니, 뒤쪽에 제 방도 있는데 왜 제가 왕야 방에서 묵는 것이에요?”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안고 이 방으로 데려오시고는 옮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백천범이 물었다.

“제가 여기에서 자면 왕야는 어디에서 주무세요?”

“…….”

기홍이 속으로 생각했다.

‘매일 밤 왕비 마마와 한 침대에서 주무셨는데, 그것도 모르셨다니.’

백천범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헉, 회림각에 왕야께서 주무실 곳이 더 없단 말이에요?”

묵용감은 백천범과 기홍의 대화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도포 자락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튕기던 그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묻고 싶은 게 고작 그것뿐이라니?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은 눈치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곁을 지켜 주었는데 깨어나고 나니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모양이었다.

그의 생각도 앞뒤가 맞지 않긴 했다. 백천범이 깨어나기 전에는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기만을 바랐지만, 막상 백천범이 깨어나자 그는 두려움에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괜스레 뒤가 켕겨 그녀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볼까 겁이 났다.

그는 그녀가 깨어나면 솔직하게 다 털어놓기로 결심했었다. 그녀를 더 이상 여동생이 아닌 진정한 초왕비로 삼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정신이 혼미했을 때 그녀는 줄곧 그를 큰오빠라고 착각했다. 그에게 보여 준 그녀의 신뢰와 허물없이 대하는 행동은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상황을 깨뜨렸다가 백천범이 그를 계속 피하려 할까 봐 두려웠다. 모든 게 예전처럼 되돌아간다면 그야말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일렀다. 아직 어린 그녀에게 그를 천천히 알아 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자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녀 또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땐 그 무엇도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만간 적당한 방도를 찾아 후원의 두 여인도 내보낼 생각이었다.

원래는 각각 훌륭한 낭군을 찾아 주려 했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인간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었다. 저택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교활한 계략을 쓰다니.

잘못을 추궁해 쫓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모든 게 다 자업자득이었다. 아내를 내쫓는 상황이 된 것은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두 여인에게 많은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백천범의 병세가 하루빨리 나아져 몸에 있다는 독소를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좌당중이 종합적인 진단을 해야 한다며 이전에 내린 처방전을 가져갔으니 병을 치료할 방도를 찾기만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기홍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눈짓으로만 표현했지만 기홍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모아 얼굴 옆에 가져다 댔다. 잠을 자는 표식이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짓더니 발걸음을 돌렸다.

묵용감은 조금 멋쩍었다. 기홍의 의미심장한 웃음은 그의 소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백천범이 잠든 뒤에야 방으로 들어가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 또한 이리도 못난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가 나이 많은 자신을 꺼려할까 봐 두려웠고, 싫어할까 봐 겁이 났다. 그녀 앞에서는 아주 작은 자극도 그를 산산조각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문 앞으로 다가가 발을 들춰 안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서 약 냄새가 풍겨 왔다. 얇고 투명한 천 사이로 시선을 옮기자 침대에 누워 있는 희미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몸을 둥글게 말고 자는 탓에 이불 밑에 작은 덩어리가 놓여 있는 듯했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을 청했던 지난 이틀 밤을 떠올렸다.

그녀는 정신이 혼미했고, 그 또한 몽롱한 상태였지만 이튿날이 되자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힘이 샘솟는 듯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오늘 밤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계속 그녀를 안고 잠들 수 있을까? 이제 의식을 회복했으니 그가 큰오빠나… 유모가 아니란 것은 이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큰오빠라 한들 밤새 여동생을 품에 안고 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그녀의 큰오빠 이름이 백장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산서山西 지역 부대의 참령이었다. 두 남매의 사이가 좋다면 밤새 서로를 부둥켜안고 잠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괜한 생각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천천히 침대 앞으로 다가가 장막을 걷어 자그마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기홍과 녹하가 매 끼니마다 고심하여 몸을 보양할 수 있는 음식을 내온 덕분에 여위었던 얼굴이 다시 동그랗게 돌아왔고, 피부에도 혈색이 돌았다.

까만 머리를 해조류처럼 베개 위로 젖혀 놓은 탓에 그녀의 매끈한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목은 우아한 곡선을 뽐내며 아름다운 쇄골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잠이 많은 아기 백조 같았다. 가여워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묵용감은 장막을 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려는데 백천범이 갑작스레 눈을 떴다. 눈앞의 사람이 묵용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녀는 표정이 느슨해지더니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왕야, 왕야께서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그가 오지 않으면 여길 누가 와야 한단 말인가? 묵용감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투가 싫었지만 웃는 얼굴에 마음이 풀려 결국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지 확인해 보러 왔소.”

“열은 안 나요.”

백천범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신 목이 조금 아프고 기침이 나는걸요.”

“기홍에게 배 꿀찜을 만들어 주라고 하겠소. 기침을 멎게 하는 데 아주 좋은 음식이오.”

백천범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배 꿀찜이요? 너무 좋아요. 맨날 약만 먹어서 입이 다 쓰거든요.”

입을 활짝 벌리고 그를 바라보는 게 아양을 떠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 묵용감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막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가서 기홍에게 이르겠소.”

뒤돌아선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 * *

이날 밤, 묵용감은 결국 백천범이 예전에 묵던 방에서 머물렀다. 그녀의 방과 그의 침소는 뜰을 사이에 두고 창을 마주하고 있었다.

예전에 그는 맞은편 창문에 살짝 솟은 그녀의 머리가 흔들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종종 바라보곤 했다. 서로의 위치가 바뀐 지금, 그녀의 방 창가에서 바라본 건너편은 희미한 불빛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결국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녀가 이 방을 찾은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불과 베개 등 모든 것들이 낯설고 쓸쓸하기만 했다. 그녀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침대는 묵용감의 몸에는 터무니없이 작았다. 몸을 눕히니 꽉 끼는 기분마저 들었다.

잠을 청하던 묵용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어지러운 머릿속엔 안아 달라며 손을 뻗는 그녀의 모습만이 어른거렸다.

그는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도포를 걸친 뒤 밖으로 향했다. 안채로 향하는데 암흑 속에서 영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그는 아무 말 없이 코웃음만 쳤다. 묵용감임을 알아차린 영구가 재빨리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리곤 그가 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발을 올려 주었다. 바깥방에 있던 기홍은 인기척을 듣고 급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왕야, 한밤중에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묵용감이 말했다.

“왕비가 이불을 걷어차진 않았는지 확인해 보러 왔다.”

“…….”

기홍이 왕비를 꼼꼼히 살피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왕야, 소인이 한 시진마다 들어가서 왕비 마마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동도 없이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미동도 없다고? 침대를 휘젓고 다니며 대자로 뻗은 채 잠든 그녀의 모습을 자주 본 그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병이 난 탓인지 줄곧 몸을 웅크리고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처럼 불안해하는 모습으로 잠들곤 했다. 이불 안에 웅크린 자그마한 몸이 참으로 애처로웠다.

첫째 날 그녀를 품에 안고 돌아왔을 때, 그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쇠약한 그녀의 모습에 온종일 가슴을 졸였다. 눈을 떼면 그녀의 미약한 호흡이 끊어질까 두려웠던 그는 불안한 마음에 계속 손을 뻗어 그녀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했던 기홍은 묵용감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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