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묵용감은 서둘러 기홍에게 분부했다.
“어서 가서 감람을 구해 오너라.”
녹하가 말했다.
“왕야, 하인을 보내 의원을 모셔오는 게 어떠신지요. 왕야를 알아보지 못하시다니요!”
백천범은 그의 품 안에서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달싹거리며 여전히 소란을 피웠다. 묵용감도 감당하기 버거웠는지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서 의원을 부르거라. 오는 길에 감람도 필히 구해 와야 할 것이다.”
그때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왕비 마마께서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묵용감이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니 다름 아닌 고청접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를 뵈옵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묵용감은 백천범의 팔다리를 붙잡고 품 안에 감싼 뒤에야 대꾸했다.
“어찌 온 것이오?”
“소첩, 마음이 놓이지 않아 뵈러 왔습니다.”
“봤으니 이제 그만 가시오. 왕비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안정을 취해야 하오.”
고청접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왕야, 소첩이 왕비 마마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왕야께서는 대장부이신지라 아무래도 조금 불편하실 것이옵니다.”
묵용감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부부는 본디 하나인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소.”
그는 백천범을 꼭 끌어안고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따뜻하고 자상한 그의 모습은 비수가 되어 고청접의 가슴에 꽂혔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 못 하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조용히 그녀를 예의 주시하던 자초는 고청접이 회림각 입구를 빠져나온 뒤에야 입을 열었다.
“마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왕야께서 왕비를 내치실 것 같진 않사옵니다.”
“그리하라지.”
고청접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필요한 건 측왕비의 자리다. 그 바보 같은 게 정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 * *
백천범의 열은 쉽사리 내리지 않았다. 열이 오락가락하자 정신도 혼미해졌다 나아지기를 반복했다. 묵용감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좌당중과 유일첩을 불러 왕비의 상태를 물었다.
좌당중이 말했다.
“왕야, 계속 이렇게 가다간 큰일이옵니다. 왕비 마마의 마음 속 응어리가 이상 행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하인에게 분부하신 닭은 아직인지요?”
옆에 있던 유일첩이 맞장구를 쳤다.
“의정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마음의 병부터 다스려야 몸이 회복되실 것입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간호하느라 그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학평관을 불렀다.
“닭은 아직이냐?”
학평관이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왕야, 하인들이 시장에서 찾아보고 있습니다만, 생김새가 아주 똑같은 닭을 찾는 것이 쉽지만은 않사옵니다.”
묵용감이 그를 걷어차며 말했다.
“이런 망할 놈 같으니라고, 닭 한 마리 찾는 데 이리 오래 걸리다니! 왕비의 병이 낫는 게 싫은 것이냐?”
한쪽에 쓰러진 학평관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겁에 질린 듯 말했다.
“소인이 서둘러 찾아보겠습니다.”
“반 시진 내에 찾아오지 못하면 네 살가죽부터 벗길 것이다!”
학평관은 대답을 올리고는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와 하인들을 불렀다.
“어서 가마를 준비하거라. 시장으로 갈 것이다!”
초왕이 불같이 화를 내자 겁에 질린 하인들은 재빨리 시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뒤 하인들은 마구잡이로 고른 듯 볼품없는 닭들만을 바구니에 담아 왔다.
학평관이 한 마리 한 마리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노랑이와 닮은 닭은 하나도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노랑이는 그저 평범한 황갈색 닭에 불과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리 찾아도 비슷한 닭을 찾을 수 없었다.
해가 점점 높게 솟자 초조해진 학평관은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반드시 찾아오겠다며 호언장담을 해 놓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대로 돌아갔다간 초왕이 정말 그의 가죽을 벗길지도 몰랐다.
조급해하는 그의 모습에 한 닭 장수가 호의적으로 말했다.
“대체 어떤 닭이 필요하신 것인지요? 제게 말씀해 주시면 내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학평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저 평범한 황갈색 닭을 찾고 있소. 보통 닭보다 황색이 조금 더 선명한 닭으로 말이오. 어렵겠지만 지금 당장 필요하오.”
닭 장수가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저희 집에도 황갈색 닭이 두 마리 있긴 한데, 싸게 드릴 테니 마릿수라도 채우시지요. 어차피 잡아먹을 건데 누가 그리 털색을 따지겠습니까?”
“누가 먹는단 말이오?”
학평관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우리 집 닭님을 감히 누가 먹는다고.”
더 이상 입씨름할 시간이 없었던 학평관은 다른 곳을 살펴보기 위해 머슴들을 불렀다. 막 발을 떼려는데 길가에 있는 한 가게에서 닭 세 마리가 뛰쳐나왔다. 그중 한 마리의 털색과 크기가 노랑이와 매우 흡사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머슴에게 분부했다.
“어서, 저 닭을 잡거라.”
머슴 두 명이 곧장 닭 주변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닭을 잡으려 했다.
“이보시오. 이게 무슨 짓이오! 백주대낮에 감히 이리 대놓고 남의 닭을 훔치려 하다니, 간이 부어도 너무 부은 것 아니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리따운 부인이었다. 그녀는 긴 빗자루를 들고 두 머슴에게 사납게 달려들었다.
머슴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공격에 머리를 감싸 쥐며 도망쳤다. 학평관이 황급히 뛰어가 그녀에게 공손히 말했다.
“부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말씀부터 들어 주시지요. 실은 저희 집에서 닭을 잃어버렸는데…….”
성격이 급했던 부인은 학평관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또다시 성질을 부렸다.
“댁이 닭을 잃어버렸는데 왜 우리 집에 와서 잡아간단 말입니까? 사람을 잃어버렸어도 우리 집에 와서 찾을 것입니까? 똑똑히 말하는데, 내가 과부라고 나와 우리 자식까지 업신여기려 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설명 못 하면 관아에 끌고 갈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학평관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닭을 그냥 가져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값을 쳐드릴 테니 제게 파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인은 눈을 번득이며 단칼에 거절했다.
“안 팔아요!”
학평관은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로 애원했다.
“아이고, 제발 부탁입니다. 제게 파십시오. 이 닭이 없으면 저희 주인마님께서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부인이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고작 닭 한 마리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다니요?”
학평관은 백천범과 노랑이의 일을 한껏 부풀려서 늘어놓았다. 그는 내관 출신이었던지라 말솜씨가 좋았다. 뛰어난 언변은 집을 관리하는 자가 갖춰야 할 능력이기도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부인은 눈시울을 붉힌 채 탄식했다.
“그렇게 급하다면 어서 닭을 가져가십시오. 사람을 구하는 좋은 일에 쓰는 것이니 돈은 필요 없습니다.”
학평관은 크게 기뻐하며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부인. 저희 주인마님의 목숨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의 말에 부인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를 흘겼다.
“어서 잡아가기나 하십시오.”
학평관은 마침내 닭을 손에 넣었다. 학평관은 다시 한번 부인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닭을 손에 넣었으니 어찌 되었든 값을 치러야 했다. 새하얀 은자 덩어리를 그녀의 손에 쥐여 준 그는 허허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닭을 안고 가마에 올라탔다.
부인은 은자를 들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핏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 * *
학평관은 급히 서두른 끝에 반 시진을 넘기기 전 회림각에 돌아왔다. 그는 닭을 안고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왕야, 닭을 구해 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닭에게 쏠렸다. 정말 노랑이와 똑 닮은 닭이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다른 닭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묵용감이 허리를 숙여 조심스레 백천범을 깨웠다.
“왕비, 일어나 보시오. 노랑이가 돌아왔소. 줄곧 저 애를 걱정하던 것이 아니었소? 어서 눈을 떠 보시오. 노랑이가 돌아왔소.”
묵용감이 가볍게 흔들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정신이 혼미한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노랑이가 돌아왔소.”
묵용감은 그녀를 안아 살짝 몸을 일으킨 뒤 학평관 손에 들린 닭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오. 저기 노랑이가 있질 않소?”
백천범은 천천히 눈동자를 옮겨 멍한 표정으로 닭을 바라보더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묵용감이 그녀 귓가에 속삭였다.
“노랑이오. 기억 못 하는 것이오? 왕비의 노랑이가 돌아왔소.”
백천범은 한참이나 넋을 놓고 닭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빛이 아주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별안간 잠긴 목소리로 힘껏 소리쳤다.
“노랑아!”
그녀는 손을 뻗으며 닭을 안고 싶어 했다.
노랑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걱정이 된 묵용감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따뜻하게 타일렀다.
“아직 왕비의 병이 다 낫지 않았소. 노랑이도 닭인지라 그리 깨끗하진 않으니 병이 다 나은 뒤에 만지시오.”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왕야, 돌아오신 거예요?”
묵용감은 코끝이 시큰거려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큰오빠와 유모라고 부르더니 드디어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를 세심히 살폈다.
“어디가 아픈 것이오?”
백천범이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말했다.
“머리가 아픕니다.”
“어서 누우시오.”
묵용감은 그녀를 눕히며 말했다.
“의원에게 진맥을 하라 이르겠소.”
그는 좌당중에게 맥을 짚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정신을 차린 초왕비와 첫 대면이었기 때문에 좌당중은 먼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맥을 짚었다. 역시나 맥의 흐름이 원활한 게 병세가 호전되는 기미가 보였다.
* * *
그간 혼미한 정신으로 오락가락하던 백천범은 가짜 노랑이를 본 뒤로 제법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기홍이 약을 먹여 주려 하자 그녀는 약사발을 직접 받아 들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빈 약사발을 탁자에 내려놓은 그녀는 옆에 놓인 감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어디에서 난 것이에요?”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정신을 잃으셨을 때 계속 감람이 먹고 싶다고 소리치셨습니다. 저택에는 감람이 없어 왕야께서 하인에게 급히 사 오라고 분부하셨지요. 왕비 마마께서 그리던 맛이 맞는지 한번 드셔 보십시오.”
백천범이 한 알을 집어 들고 입에 넣더니 눈썹을 찡그리며 황급히 뱉었다.
“너무 시고 떫어요.”
기홍은 잔뜩 찡그린 그녀의 표정이 귀여웠던 나머지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감람을 드시겠다고 떼를 쓰시지 않았습니까? 이게 바로 감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