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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61)화 (160/1,192)

제161화

묵용감은 이제 막 몇 술 뜨기 시작한 죽을 내팽개치고, 황급히 침소로 향했다. 방에 놓인 커다란 등불이 새빨개진 백천범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극도로 불안한 듯 몸을 비틀며 머리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묵용감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왕비, 왕비. 일어나 보시오.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어디가 아픈 것이오?”

백천범은 몸이 불붙은 장작 위에 놓여 불타는 기분이었다. 살갗은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고,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다.

차마 입을 열 수도 없을 만큼 괴로워하는데 갑작스레 누군가 곁에 다가오더니 건조하고 힘 있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꼭 커다란 손으로 끊임없이 힘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시야에 흐릿한 얼굴이 들어왔다. 별처럼 빛나는 그의 눈망울만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중얼거리듯 그를 불렀다.

“큰오빠.”

녹하와 기홍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의아해했다. 큰오빠라니?

하지만 묵용감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쥐며 대답했다.

“그래. 여기 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백천범은 활짝 웃어 보였다. 연약하게 웃는 얼굴이 어찌나 순수한지 꼭 갓난아이 같은 모습에 묵용감은 심장이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나 좀 안아 줘요, 큰오빠.”

묵용감은 잠시 머뭇거렸다.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기홍과 녹하 앞에서 그는 묵묵히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앉더니 백천범을 품에 끌어안았다. 조심스럽고 자상한 그의 모습에 귀까지 새빨개진 기홍과 녹하는 멀찍이 물러났다.

그의 품에 안기자 백천범은 조금 안정된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편치 않은 듯 미간을 찡그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홍이 젖은 수건을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열이 심하시니 수건을 얹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묵용감은 수건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에 얹었다. 수건이 너무 차가워서였을까? 그녀가 갑작스레 몸을 떨기 시작했다. 묵용감은 그녀를 더욱 꼭 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여기 있으니 겁낼 것 없다.”

그녀가 입술을 들썩이더니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유모!”

“…….”

큰오빠라고 부를 땐 그래도 큰오빠인 척해 줄 수 있었지만 유모라니, 대체 어찌하라는 말인가?

백천범은 아무런 대꾸도 없자 불안했는지 고개를 저으며 또다시 소리쳤다.

“유모, 나 좀 불어 줘.”

묵용감은 의아하기만 했다. 불어 달라니? 무엇을 불어 달란 말인가?

백천범은 갑작스레 끊임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마에 얹은 수건은 침대 위로 떨어졌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유모를 부르짖었다.

“유모, 유모…….”

너무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크게 당황한 묵용감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힘껏 그녀를 끌어안고 ‘그래, 그래’만 반복할 뿐이었다.

백천범은 그의 팔을 끌어안더니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유모, 가지 마. 유모가 가면 난 어떡하라고? 엉엉…….”

기왓장이 벽을 긁듯 거칠고 쉰 목소리였지만 묵용감의 마음을 아프게 짓눌렀다.

그가 허리를 숙여 불덩이 같은 백천범의 얼굴을 잡고 낮게 속삭였다.

“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너의 곁을 떠나지 않으마.”

의식이 혼미했던 백천범은 그의 대답에 마음이 놓였는지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은 채 딱 붙어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 유모.”

묵용감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려 이 나라의 친왕인 그가 유모가 되다니!

멀찍이 서 있던 기홍과 녹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어려서부터 불행하게 자란 왕비가 이제라도 초왕을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앞으로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두 시녀는 묵용감 때문에 기쁘기도 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로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직접 목격한 두 시녀였다. 스스로 외톨이가 되던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왕비와 함께 따스한 봄날처럼 즐겁고 행복한 시간만 보내면 될 것이었다.

한 시진 가량 차가운 수건을 이마에 얹어 주고 나니 백천범의 열이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기홍이 약을 들고 오자 묵용감은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먼저 한 모금 머금은 뒤 그녀와 입을 맞대어 약을 먹여 주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다시 새빨개진 기홍과 녹하는 알아서 방을 나섰다. 두 시녀는 밖에 숨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홍이 말했다.

“어제만 해도 날 내보내신 뒤에야 약을 먹이시더니. 오늘은 저렇게 대범하게 보여 주시네.”

녹하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 왕야께서는 목욕을 하실 때에도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지 못하게 하실 만큼 내성적이신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면전에서 입을 맞추시다니.”

기홍이 말했다.

“황보주아 아가씨께는 어떻게 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대하시진 않으셨을 것 같아. 이렇게 세심하게 지켜 주려면 얼마나 끔찍이 사랑해야 하는데!”

“맞아. 좋은 낭군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정말 복이 많은 분이시라니까. 예전에 온갖 고생을 겪으신 걸 하늘이 알고 상을 내린 것 같아.”

기홍이 녹하를 놀렸다.

“네 낭군도 훌륭하던데. 지난번에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상으로 내리신다니까 한사코 거절했잖아. 마음이 온통 너한테 있다는 의미겠지!”

“걔는 바보 천치야. 속임수에 빠진 것도 모르고, 누가 걜 좋아하겠니?”

“얘 봐라, 그럼 영구한테 가서 가동은 왜 함께 돌아오지 않은 거냐고 물은 건데?”

녹하는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겸연쩍다는 듯 웃었다.

“그냥 궁금하잖아. 엉뚱한 애가 갑자기 안 보이니까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 싶었지.”

“일을 저질렀다 해도 너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렇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물어보러 간 거야? 그리고 또 있어.”

기홍이 헤헤 웃으며 물었다.

“반쯤 수놓은 그 주머니는 누구한테 줄 건데?”

“내가 쓸 거다, 왜?”

“반듯하게 복 자를 새겨 넣은 건 사내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모양인데 네가 쓸 거라고?”

뒤가 켕겼던 녹하는 콧방귀를 뀌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한편 묵용감은 한 모금 한 모금 백천범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그는 약을 먹이는 일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약은 썼지만 그의 마음은 다디달았다.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그녀의 입술을 벌린 그는 그녀의 입 안에 조금씩 약을 흘려 넣어 주었다. 그는 진지한 자세로 임했지만 들뜬 마음만큼은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건강하고 멀쩡한 사내였다. 그간 여색을 멀리한 것은 그럴 마음이 없어서였지만, 마음이 한 번 움직이고 나니 감정을 쉽게 주체할 수 없었다. 자그마한 입술을 계속해서 머금고 있자니 그의 마음은 산과 들에 온갖 봄꽃이 만개한 듯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주아가 그의 약혼녀라는 것은 그도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주아를 만나면 서로 수줍어하다가 아무도 없을 때 손을 맞잡곤 했다.

하지만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땐 풋풋한 감정이었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비록 약을 먹이는 것이었지만 어린 여인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출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온몸의 모공이 열리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고,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한다면 날마다 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약을 먹이는 게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다 좋았다.

막 입을 대려 하는데 백천범이 갑작스레 눈을 떴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던 나머지 그녀는 사팔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초왕은 못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황급히 고개를 들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눈을 깜빡이며 여전히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큰오빠, 왜 저한테 입을 맞추는 거예요? 저는 여동생인데 말이에요.”

묵용감은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얼굴부터 귀까지 온통 새빨개졌다. 그가 약을 들고 그녀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깨어나질 않으니 대신 먹여 주는 게 아니겠느냐? 이제 깨어났으니 직접 마시거라.”

백천범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눈만 깜빡였다. 깜빡이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정한 호흡을 내뱉자 묵용감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뭐람, 또 잠이 들다니?

약은 아직 절반가량 남아 있었다. 버릴 수는 없었기에 그는 다시 한 모금을 머금고 그녀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백천범은 아직 깊은 잠에 들지 못했는지 몽롱한 상태에서 입을 벌렸다.

부드러운 물체가 움직이자 심장이 요동친 묵용감은 입에 머금고 있던 약을 백천범의 얼굴에 약을 뿜어 버리고 말았다.

서둘러 수건을 들고 그녀의 얼굴을 닦았지만, 백천범은 찡그린 얼굴로 살짝 눈을 뜨더니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유모, 나한테 뭘 뿌린 거야?”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기홍과 녹하도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 뒤처리를 도왔다.

묵용감은 괜스레 소란을 피우게 되자 백천범을 눕히고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백천범은 그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가지 말아요, 큰오빠.”

묵용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모와 큰오빠는 번갈아 부르면서 그는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았다. 그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녀가 그를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는 적잖은 좌절감이 밀려왔다. 만약 한 번이라도 그를 불러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었다.

“안 갈 것이다.”

그가 인내심을 갖고 그녀를 타일렀다.

“아직 두 모금이 남았으니 얌전히 들이켜거라. 착하지?”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실게요.”

묵용감은 그녀를 일으켜 앉힌 뒤 약사발을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백천범은 거리낌 없이 꿀꺽꿀꺽 들이켜더니 쓴맛이 나자 인상을 찌푸렸다.

묵용감이 미소를 지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첨탕을 가져다주마.”

백천범이 중얼대며 말했다.

“저는 감람橄欖을 먹을래요.”

묵용감이 기홍에게 물었다.

“감람이 있느냐?”

기홍이 말했다.

“감람은 너무 떫습니다. 소인이 말린 매실을 가져 오겠습니다.”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용감의 품에 기댄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기홍이 가져다준 매실을 입에 넣자마자 곧장 뱉어 버리더니 묵용감의 옷소매를 잡고 소리쳤다.

“유모, 감람이 아니잖아. 나는 감람을 먹을 거란 말이야.”

백천범은 누구보다 달래기 쉬운 아이였다. 어떤 음식을 줘도 늘 신이 나서 허겁지겁 먹었는데 지금은 성미가 고약한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쓰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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