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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60)화 (159/1,192)

제160화

월향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왕야께 발길질을 당하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애초에 소인이 잘 모시지 못해 왕비 마마께서 이렇게 되셨으니까요. 왕야께서 벌하시든 때리시든 원망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맞습니다.”

월규가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소인이 왕비 마마를 따라나섰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그때, 기홍이 방 안에서 나와, 조용히 하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이더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라고 당부했다.

녹하가 말했다.

“어차피 왕야께서 아직 벌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우선 돌아가서 며칠 쉬어. 왕비 마마께서 좋아지시면 곧장 기별을 보낼 테니까.”

월규와 월향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머뭇거리는 모습에 녹하가 두 시녀를 꾸짖었다.

“왕비 마마께서 회림각에 계시는데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거니? 나랑 기홍이 제대로 못 모실까 봐?”

월규와 월향은 황급히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묵용감의 처소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더 이상 애원해도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두 시녀는 결국 잔뜩 풀이 죽은 채 남월각으로 돌아갔다.

잠시 밖에 서 있던 녹하는 기홍이 밖으로 나오자 화단으로 내려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는 좀 드셨어?”

기홍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오랫동안 왕야를 모셨지만 지금 같은 모습은 처음이라니까.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정말 뼛속까지 아끼시나 봐.”

“누가 아니래.”

녹하도 한숨을 내쉬었다.

“왕비 마마와 그렇게 잘 지내시더니, 무슨 까닭인지 왕야께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고는 급하게 두 왕비를 맞이하시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잖아. 이게 웬 사서 고생이야.”

그녀가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상상도 못 했지 뭐야. 대학사 집안의 적녀가 이렇게 악독한 마음을 가졌을 줄이야. 대갓집 여인들은 하나같이 지독하다니까. 이씨 부인부터 측왕비까지, 비열한 자들을 만나는 게 우리 왕비 마마의 운명인가 봐.”

기홍이 말했다.

“이 얘긴 나랑 한 걸로 끝내야 돼. 다른 사람이 들었다간 또다시 말썽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왕야께서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으시잖아. 왕비 마마께서 나아지신 다음에는 좀 더 확실해지겠지.”

잠시 녹하와 이야기를 나눈 뒤, 기홍은 문 앞으로 슬쩍 다가가 발을 들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여전히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분명 차갑게 식었을 테니 기홍은 하는 수 없이 식탁을 정리했다. 부엌으로 가져와 따뜻하게 데워 놓은 뒤 묵용감이 원할 때 다시 상을 차릴 생각이었다.

그 사이, 약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 녹하는 깊은 잠에 빠진 백천범의 모습에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깨어나지 않으시니 어찌 약을 드려야 합니까?”

“잠시 뒤에 내가 먹여 볼 테니 우선 두고 가거라.”

여전히 어두운 그의 안색에 녹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약사발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묵용감은 약을 한 숟갈 떠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살짝 식힌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입을 벌린 뒤 조금씩 약을 흘려 넣었다. 하지만 백천범이 전혀 삼키지 못한 탓에 약은 그대로 입 밖으로 흘러내렸고, 금방 갈아입은 옷을 더럽혔다.

두세 차례 더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낙담한 묵용감은 숟가락을 사발 안에 내팽개쳤다.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싶었지만, 안정을 취해야 하는 그녀를 방해할 테니 그저 시무룩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약을 먹지 못하니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몸 상태가 이 모양인데 약을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무엇인가 그의 뇌리를 번쩍 스쳤다. 아직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이었지만, 그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이의 위급한 상황을 틈타 기회를 노리는 모리배는 아니었다. 다만 상황이 긴박했기에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백천범을 품에 안고 이불로 잘 감싼 뒤, 약 한 모금을 자신의 입에 머금었다.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으로 돌진한 묵용감이 혀로 그녀의 입 안을 벌렸다. 그러다 목구멍 안으로 약을 흘려보냈다.

아주 쓴 약이었지만 묵용감은 심장이 두근거릴 뿐,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한번은 실수로 약을 삼키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입술과 입술을 맞대며 계속 약을 먹였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만큼 정신을 붙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어렵사리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약사발에 있던 약을 모두 먹였다.

이내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그녀의 입을 닦아 준 묵용감은 그녀가 약이 너무 쓰다고 느낄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는 문 앞으로 다가가 기홍을 불러 첨탕甜湯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묵용감이 배가 고프다는 말로 이해한 기홍은 첨탕뿐만 아니라 따뜻하게 데운 음식들도 가져왔다. 빈 약사발을 발견한 그녀가 기뻐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깨어나신 것입니까?”

묵용감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다.”

기홍은 그의 대답이 의아하기만 했다.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약을 다 먹었단 말인가, 설마 억지로 목에 부어 넣었단 말인가?

첨탕도 같은 방법으로 먹이려 했지만 기홍이 앞에 있자 조금 부끄러웠던 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우선 나가 있거라.”

살짝 놀란 기홍은 대답을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기홍이 빈 약사발을 들고 나오자 녹하가 기뻐하며 물었다.

“왕비 마마꼐서 약을 드신 거야?”

“응.”

“깨어나셨어?”

“아직.”

“아직인데 약은 어떻게 드신 건데?”

“그건… 궁금하면 왕야께 여쭤봐.”

녹하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기홍이 물었다.

“뭘 알았다는 거야?”

녹하는 일부러 뜸을 들이더니 조용히 문 앞으로 다가가 문발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깜짝 놀란 기홍은 서둘러 녹하를 끌고 나와 조용히 말했다.

“정말 간도 크다. 몰래 왕야를 훔쳐보다니.”

녹하는 웃으며 문 쪽으로 고갯짓을 해 보였다.

“왕야께서 어떻게 약을 먹이셨는지 너도 궁금하잖아, 직접 가서 봐봐.”

기홍도 궁금하긴 했지만 감히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녹하는 여전히 입을 가리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지금 안 보면 앞으로 다신 못 볼걸.”

잠시 주저하던 기홍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해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고 곧바로 부끄러움이 밀려와 얼굴이 빨개졌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뛰어간 뒤에야 기홍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더는 걱정할 일 없겠다.”

기홍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에 대한 왕야의 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거였어.”

“그러니까.”

녹하도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를 여동생으로 삼으신다더니, 누가 여동생한테 입술을 맞대서 약을 먹여? 왕야께서 괜히 둘러대신 거라니까!”

* * *

바람이 부는 밤이었다.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백천범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렴풋하게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넓고 따뜻한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참으로 좋았다. 꼭 유모가 세상을 떠난 그날 밤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녀의 큰오빠도 밤을 지새우며 이렇게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녀는 말라붙은 입술을 핥고, 큰오빠를 불렀지만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 있던 사내는 깜짝 놀란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백천범은 희미한 등불에 비친 그의 깊은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오랜 우물같이 혼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혼미한 정신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큰오빠.”

목이 심하게 잠겨 있었지만 묵용감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큰오빠라고 부르다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냉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과 맞닿을 듯 더욱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오?”

“큰오빠.”

백천범은 또 큰오빠를 부르더니 그의 목을 감싸 안고는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큰오빠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묵용감은 괜스레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녀가 이렇게 격 없이 대하는데 큰오빠인 척해 주는 게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그는 그녀를 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백천범은 아무 말 않고 그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더니 편안한 자세를 찾았는지 또다시 잠이 들었다.

묵용감은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이 끊임없이 두근거리던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분을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고, 기쁘고, 편안했다.

그는 여동생과 오라버니 따위의 관계는 이제 집어치우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녀가 평생 초왕비로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난 후, 그는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를 아무리 좋은 사람에게 보낸다 한들 자신의 곁에 두는 것만 못했다. 그녀와 함께 있어야 그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하늘이 정해 준 그의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서 그녀를 빼앗을 수 없었다.

* * *

동쪽에서 내려온 한 줄기 빛에 짙은 안개가 낀 듯한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묵용감이 천천히 눈을 떴다. 품 안의 어린 여인은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듯 일정한 호흡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굳은 손발을 잠시 풀어 준 뒤 밖으로 나갔다.

간밤에 묵용감은 두 시녀에게 당직을 서지 말라고 분부했지만, 잠귀가 밝았던 기홍은 그의 인기척이 들리자 곧장 옷을 갈아입고 시중을 들러 나왔다.

옷을 멀끔히 갖춰 입은 그의 모습에 기홍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초왕이 옷을 입은 채 잠들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밤잠을 설쳤을 것이었다.

“왕야, 세안 준비를 해 오겠습니다.”

“녹하에게 하라 이르고, 너는 아침밥을 준비하거라. 왕비가 먹을 죽과 계란찜도 준비하고.”

“예. 알겠습니다.”

기홍은 녹하를 깨우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정원을 한 바퀴 거닐었다. 그러다 문득 불안한 마음에 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발을 들춰 안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어린 여인은 그가 방을 나설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녹하와 무수리들이 세안 도구를 들고 줄지어 다가오더니 그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그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세안을 마친 그는 거실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그가 기홍에게 분부했다.

“반 시진 후에 약을 가져오너라.”

기홍이 말했다.

“지금 약을 달이고 있습니다. 다 달여지는 대로 곧장 가져오겠습니다.”

녹하가 다급하게 다가오더니 초조해하며 말했다.

“왕야, 아무래도 왕비 마마께서 열이 나시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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