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잠시 고민하던 묵용감은 덩굴을 붙잡고 비탈길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아래쪽은 잡초가 무성해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신발이 이곳에서 발견된 이상 백천범은 저 아래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란 방령안이 급히 그를 붙잡았다.
“왕야, 아니 되옵니다. 소인이 내려가겠습니다. 소인이 반드시 왕비 마마를 모셔오겠습니다.”
“놓거라!”
묵용감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방령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그의 눈빛에 방령안이 그를 놓아 주었다. 묵용감은 가파르게 경사진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고 그대로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방령안이 급히 소리쳤다.
“왕야, 조심하십시오!”
사방이 덩굴로 둘러싸여 있자 그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두 명은 나를 따라 내려오고, 나머지는 위를 지키고 있거라.”
곧장 친위병 두 명이 덩굴을 붙잡고 천천히 경사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묵용감은 발을 딛자마자 사람 키만큼 높은 풀숲 사이에서 어렴풋한 사람 형체를 볼 수 있었다. 곧장 풀을 헤치고 가까이 가 보니 역시나 백천범이 그곳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무너지는 가슴을 붙잡고 단숨에 그녀에게 뛰어갔다.
백천범은 몸을 둥글게 만 상태로 엎드려 있었다. 머리카락은 얼굴에 마구 달라붙어 있었고, 음지였던 탓에 비에 젖은 옷은 여전히 축축했다. 핏자국이 선명한 두 손은 비에 젖어 퉁퉁 부어 있었고 창백했다. 그야말로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묵용감은 심장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하얘진 탓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호흡을 확인했다.
호흡이 느껴지지 않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백천범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서, 어서 일어나거라. 어서. 천범아,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
그가 세차게 그녀를 흔들었다. 사나운 그의 모습은 꼭 궁지에 몰린 맹수 같았다.
그의 소리에 급히 다가온 방령안은 실성한 듯한 그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야, 걱정 마십시오.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다!”
살아 있다고? 묵용감이 품에 안은 백천범을 내려다보았다. 살아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멍한 표정으로 방령안을 바라보았다.
방령안은 미세하게 들썩이는 백천범의 흉부를 가리켰다.
“왕비 마마께서는 분명 살아 계십니다. 왕야, 왕비 마마의 맥을 짚어 보시면 바로 아실 것입니다.”
묵용감은 곧장 백천범의 팔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맥을 짚었다. 아주 미약하긴 했지만 분명 맥이 뛰고 있었다.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그녀의 얼굴에 짙게 입을 맞췄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방령안이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를 위로 올릴 수 있게 밧줄을 내리라 분부하겠습니다.”
묵용감이 대답했다.
“여러 개를 단단히 엮으라고 이르거라. 본왕이 왕비를 데리고 올라갈 것이다.”
방령안은 그의 말뜻을 곧장 이해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초왕이 직접 왕비를 데리고 비탈을 오르려는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위쪽에 있는 친위병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밧줄이 아래로 내려왔다. 묵용감은 자신과 백천범을 밧줄로 함께 묶은 뒤, 한 손으로는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밧줄을 붙잡고 위로 올라갔다. 친위병들이 위쪽에서 힘껏 끌어당겼기 때문에 그와 백천범을 빠르게 올릴 수 있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안고 산을 급히 내려가며 친위병에게 명을 내렸다.
“서둘러 회림각으로 의원을 부르거라!”
친위병은 명을 받들고 서둘러 산을 뛰어 내려갔다.
* * *
회림각에 도착한 묵용감은 기홍과 녹하에게 백천범의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히라고 분부했다. 막 옷을 갈아입히자마자 유일첩이 도착했다. 우선 묵용감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는데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우선 진맥부터 봐 주시오.”
유일첩은 서둘러 백천범의 맥을 짚었다. 약한 맥박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접해 본 적 없었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에 흠칫 놀란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유일첩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왕야께 아룁니다. 왕비 마마의 맥박이 조금 이상합니다. 소인도 진단을 내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묵용감이 목청을 높여 영구를 부르고는 요패腰牌를 풀어 영구에게 건네며 말했다.
“태의원에 가서 의정醫正 좌당중左堂中을 데려오거라. 필히 서둘러야 왕비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구는 명을 받든 뒤 곧장 밖으로 향했다.
묵용감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침대 가까이에 앉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백천범의 자그마한 얼굴에 혈색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두 뺨이 움푹 팬 게 수척하기 짝이 없었다.
괴로움을 참을 수 없던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떠날 때만 해도 펄펄 뛰어다니더니 눈 깜짝할 새에 어찌 이렇게 변해 버렸단 말인가?
그토록 어렵게 찾았음에도 목숨까지 위태롭다니, 그가 어찌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왕야.”
유일첩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인이 왕비 마마의 병세를 쉬이 진단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몸이 너무 허약해지셨으니 이대로 가만히 누워 계시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혹 저택에 인삼 같은 게 있다면 잘게 다져 입 안에 머금게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삼은 혈기를 보충하니 왕비 마마께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묵용감이 급히 기홍을 불렀다.
“어서 고려인삼을 가져오너라.”
기홍은 서둘러 곳간에서 기다란 나무 상자를 가져와 묵용감에게 건넸다. 묵용감은 상자를 열어 길고 가느다란 인삼을 꺼내 들더니 비수로 잘게 조각내어 백천범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잠시 뒤, 백천범의 호흡이 눈에 띄게 뚜렷해지더니 더 이상 끊어졌다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가슴 졸이던 묵용감은 조금이지만 마음이 놓였다. 백천범의 손을 꼭 붙잡은 그는 두 손에 이마를 맞댄 채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구가 좌당중을 데려왔다. 좌당중은 묵용감에 인사를 올린 뒤, 다가와 백천범의 맥을 짚었다. 평온하던 그의 표정이 점점 엄숙해졌다. 이내 몸을 굽혀 그녀의 눈꺼풀을 확인한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몸을 일으켜 초왕에게 고했다.
“왕야, 소관의 견해로는 왕비 마마의 마음에 화가 쌓여 있는 듯합니다. 정신이 혼미하고 체내의 기가 원활하게 순환되지 않는 것은 마음속 화가 그 길을 막고 있는 것이지요.
헌데 활맥滑脈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풍한風寒의 증상도 보입니다. 즉, 찬기와 열기가 서로 상충하여 몸을 쇠약하게 한 것이지요. 맥박이 강했다 약해지기를 반복하는 게 독성에 중독이 되신 듯합니다.”
묵용감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독에 중독이 되었단 말이오? 해독할 방법은 있는 것이오?”
“그것이… 아직 단정할 순 없지만 독성이 그리 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생명에는 큰 문제없을 것입니다.”
“생명에 문제가 없다면 어째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오?”
“화가 맺혀 심정이 좋지 않은 데다 풍한과 독소까지 더해졌으니, 탁한 기운이 계속 생겨나 쉽게 깨어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허면 어찌하면 좋겠소?”
“몸의 병은 약으로 치료하면 되지만, 마음의 병은 소관도 어찌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좌당중은 잠시 고민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혹, 왕야께서 왕비 마마의 병인病因을 아신다면 그에 맞게 약을 지어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옆을 지키던 녹하가 끼어들었다.
“의정 어르신, 왕비 마마의 병인은 닭입니다.”
“닭 때문이라고요?”
“예. 왕비 마마께서는 사람을 잘 따르는 닭을 기르셨습니다. 얼마 전 그 닭이 사라지는 바람에 매일 혼이 나간 듯 찾아다니셨지요. 그러다 결국 이렇게 뒷산에서 쓰러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겠군요.”
좌당중이 말했다.
“똑같이 생긴 닭을 데려온다면 왕비 마마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쌓인 응어리가 사라지면 병세가 빠르게 좋아질 것입니다.”
묵용감은 학평관에게 곧장 닭을 준비하라 분부한 뒤 다시 좌당중에게 물었다.
“풍한은 치료가 수월하겠지만 그 독소라는 것이…….”
“왕야, 그것은 그리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나씩 치료해야 하는 법이지요. 우선은 풍한을 치료하고 왕비 마마의 마음속에 쌓인 응어리를 풀어야 합니다. 독소는 왕비 마마께서 건강을 회복하신 뒤에 치료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 * *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온 기홍은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이 그대로 놓여 있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묵용감은 침대 옆에 앉아 꼼짝 않고 백천범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홍은 묵용감에게 다가가 조용히 타일렀다.
“왕야, 점심도 거르셨는데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이렇게 식사를 거르시다 병이라도 나시면 어찌 왕비 마마를 돌보실 수 있겠습니까.”
묵용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뒤에 들 것이니 우선은 저리 두거라.”
그때 녹하가 들어왔다.
“왕야, 서왕비 마마와 월향, 월규가 왕비 마마를 뵙고 싶어 합니다. 다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들 물러가라 하거라.”
묵용감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왕비가 이리 몸져누워 있으니 소란은 금물이다. 당분간은 그 누구의 출입도 불허한다.”
“예.”
녹하는 대답을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밖에 서 있던 고청접과 월향, 월규는 녹하가 나오자 서둘러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녹하는 고개를 저었다.
“왕야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십니다. 서왕비 마마께서도 그만 돌아가시지요. 왕비 마마의 병세가 호전되면 소인이 곧장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허면, 그리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가씨가 고생이 많습니다.”
“고생이라니요,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고청접은 자초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갔지만 월향과 월규는 끝까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시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녹하에게 애원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녹하 언니. 왕비 마마를 한 번만 뵐 수 있게 해 주시어요. 한 번이면 됩니다. 직접 뵈어야 저희 마음이 놓일 것입니다.”
녹하는 입구를 가리키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왕야께서 성을 내셔도 무섭지 않다면 어디 들어가 봐. 나로서는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으니까.”
그녀는 잠시 뒤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라면 멀찌감치 피해 있을 거야. 왕야께서 너흴 보시면 발길질을 하실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