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58)화 (157/1,192)

제158화

“왕야.”

수원상이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 나긋하게 말했다.

“그간 많이 힘드셨을 텐데 잠시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떠신지요. 소식이 전해지는 대로 왕야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그녀를 곁눈질로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본왕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소?”

고청접이 끼어들었다.

“왕야의 말씀이 맞습니다. 왕비 마마의 행방을 알 수 없어 다들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소첩도 진시辰時 삼각에야 일어나신 형님과는 달리 꼬박 밤을 샜을 정도입니다.”

수원상을 곤란하게 하려는 고청접의 의도가 빤히 드러나는 말이었지만 묵용감은 기어이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수원상에게 물었다.

“서왕비의 말이 사실이오?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도 잠을 청할 마음이 있었단 말이오? 본왕은 그대를 믿고 집안일을 맡긴 것인데,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이오? 어제 왕비가 사라졌을 때 곧장 소식을 전했으면 일이 이렇게 지체되진 않았을 것이오. 설마 이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오?”

갑작스런 초왕의 훈계에 수원상의 얼굴은 붉어졌다 창백해지기를 반복했다. 이내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소첩은 왕비 마마께서 일부러 숨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묵용감이 매섭게 호통쳤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왕비가 무엇 하러 일부러 숨는단 말이오? 왕비가 사리 분별 못 하는 아이도 아니고!”

고청접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형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군요. 어쩐지 월규가 하인들을 동원해 달라고 청을 드렸을 때 온갖 구실을 대며 거절하시더니. 녹하 아가씨가 직접 청을 드린 뒤에야 수락하셨잖아요…….”

묵용감이 인상을 쓰며 녹하에게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예.”

녹하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월규가 측왕비께 청을 드렸지만 허락해 주지 않으시자 저와 기홍을 찾아왔습니다.”

묵용감의 얼굴이 점점 더 포악해졌다. 이 상황이 무섭고 억울했던 수원상은 눈물이 차올랐다. 치솟는 분노에 치가 떨린 묵용감은 한쪽 발을 들어 올려 그녀를 걷어찰 뻔했다.

여인을 때리지 않는 것이 그의 신조 였지만 만약 백천범이 수원상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면 그 신조를 저버리고 이 여인을 필히 죽일 것이었다.

추문이 서둘러 자신의 주인을 변호했다.

“왕야, 왕비 마마에 대한 저희 마마의 마음은 하늘이 알 것입니다. 왕비 마마께서 평소 장난기가 심하신 것은 사실이라 저희 마마께서…….”

“오만방자하다!”

묵용감이 성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너 따위가 끼어드는 것이냐? 당장 저 애의 따귀를 때리거라!”

묵용감의 시녀인 녹하는 주인의 명에 곧장 앞으로 나가 추문의 뺨을 날렸다. 어젯밤 그녀와 월규가 수원상을 찾아갔을 때에도 추문은 곁에서 허튼소리만 늘어놓았다. 수원상의 체면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손이 날아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뺨을 맞은 추문은 감히 큰 소리로 울부짖지도 못하고 얼굴을 감싼 채 눈물만 흘렸다. 수원상은 한참 뒤에야 겨우 흐르는 눈물을 억눌렀다.

다들 보는 앞에서 그녀를 위협한 것도 모자라 하인을 시켜 가장 가까운 시녀를 때리다니. 초왕은 그녀의 체면이라고는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해 보였는지 고청접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왕야, 소첩 생각에 이번 일은 수상한 점이 많은 듯합니다. 처음엔 노랑이가 사라지더니 지금은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시다니요. 분명 무엇인가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묵용감이 그녀를 응시한 채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말해 보시오.”

“노랑이가 왕비 마마께서 애지중지하시던 닭이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길에서 노랑이를 마주치면 다들 피해 다닐 만큼 감히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지요. 하여 소첩 생각에 노랑이를 건드린 사람은 분명 평범한 자는 아닐 듯합니다.”

그녀는 수원상을 흘깃 바라보았다.

“서왕비,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원상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비 마마께서 괴로우시라고 내가 일부러 노랑이를 숨겼단 말입니까?”

“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님. 하지만 노랑이가 낙성각에 자주 간 것은 사실이지요. 형님께서는 마음이 선한 분이시니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충심을 다하는 노비라면 또 모를까……. 그저 이 아우가 마음 가는 대로 추측해 본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고청접은 너무나 명확하게 그녀를 모함하고 있었다. 수원상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왕야, 소첩 억울하옵니다. 부디 명확하게 진상을 밝혀 주시옵소서. 소첩 지금껏 누구를 해할 마음은 가져 본 적 없사옵니다! 왕야…….”

묵용감의 가슴에 허탈감이 밀려왔다. 후궁에는 그야말로 참혹한 피비린내가 퍼지고 있었다. 역시 듣던 대로였다. 총애를 얻기 위해 온갖 계략을 쓰며 서로를 음해했다. 고작 세 명의 여인이 있을 뿐인데 어찌 이런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다 그의 잘못이었다. 충동적으로 두 여인을 들이지만 않았어도 백천범이 이런 화를 겪진 않았을 것이었다.

결국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 묵용감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오늘부로 측왕비에게 맡겼던 저택 관리 업무를 서왕비에게 위임하겠다. 학평관은 서왕비를 도와 일을 잘 처리하거라.”

고청접은 날아갈 듯 기뻤지만 담담한 미소만 지은 채 다소곳하게 절을 올렸다.

“소첩, 왕야의 신임이 헛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수원상이 몸을 휘청거리다가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권한을 앗아 가는 것은 수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던 묵용감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측왕비를 데려가거라. 날씨가 서늘해졌으니 측왕비는 웬만하면 밖에 자주 나오지 마시오.”

수원상은 또 한 번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녀를 연금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왕야.”

추문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며 말했다.

“왕야,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 마마를 가둬 두실 수는 없사옵니다. 그간 진심을 다해 저택을 돌보신 분이십니다. 공로는 없을지언정 그간 헌신적인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왕야…….”

묵용감이 매섭게 호통쳤다.

“아직도 끌어내지 않고 뭣 하는 것이냐?”

학평관은 서둘러 하인에게 수원상과 추문을 낙성각에 돌려보내라고 분부했다.

두 사람이 떠나자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묵용감만이 끊임없이 방 안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창밖의 친위병들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직접 훈련시킨 친위병들은 전쟁 때마다 그의 선봉에 설 만큼 용맹했고, 탐색과 추격에도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만약 저들마저 찾지 못한다면 백천범은 분명 저택 안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저택에서 그녀를 데려갔단 말인가?

그가 거칠게 미간을 문질렀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던 그는 직접 그녀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초조했던 그는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필 겨를도 없이 재빨리 문을 나섰다. 학평관이 그를 따라나서려 했지만 기홍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밖으로 나간 묵용감은 상황을 보고하러 온 친위병과 마주쳤다. 친위병은 급하게 예를 갖춘 뒤 묵용감에게 고했다.

“왕야, 뒷산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혹 왕비 마마의 옷이 찢어진 것은 아닐까요?”

묵용감은 그에게서 작은 옷 조각을 받아 들었다. 옅은 색 비단 조각이었다. 쉽게 단정할 수 없었던 그가 친위병에게 물었다.

“산에서 발자국은 발견하지 못하였느냐?”

“어젯밤 비가 억수같이 내린 탓에 발자국은 구별하기 어려웠습니다. 모든 흔적이 빗물에 쓸려 갔습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학평관에게 이 옷 조각을 가져다주어 왕비의 시녀에게 확인해 보라고 하거라. 혹여 왕비의 것이 맞거든 서둘러 본왕을 찾아오거라.”

친위병이 물었다.

“왕야께 소식을 전하려면 소인이 어디로 찾아가야 합니까?”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본왕은 뒷산에 가 있을 것이다.”

친위병은 인사를 올린 뒤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묵용감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뒷산이라니? 그곳은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었다. 산짐승은 없을지라도 뱀이나 벌레 따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 뱀에게 물리거나 넘어졌다면…….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산기슭에서는 친위병들이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다섯 걸음마다 한 사람씩 서서 빈틈없이 주위를 살피며 산 위로 오르고 있었다. 산 중턱에도 다섯 걸음마다 한 명씩 띠를 둘러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어렴풋하게 사람 형체가 아른거렸고, 수풀 사이에서도 풀잎이 흔들거렸다. 모두 탐색 중인 그의 친위병이었다.

묵용감은 서둘러 산을 올랐다.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친위병 총령總領 방령안方令安이 그에게 다가와 상황을 보고했다.

“왕야, 수풀 사이에서 닭 깃 몇 가닥을 발견하였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묵용감은 그에게서 닭 깃을 건네받아 자세히 살폈다. 갈색이긴 했지만 노랑이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었느냐?”

방령안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없었습니다. 꿩이 종종 출몰하는데 꿩의 깃은 아닌 것 같아 자세히 살펴보던 참이었습니다.”

묵용감이 망설이고 있는데 또 다른 친위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총령님, 이곳에 또 닭 깃이 있습니다.”

묵용감이 황급히 친위병에게 다가갔다. 나무 아래의 풀을 헤쳐 보니 작은 구멍이 있었고, 황갈색 흙은 비에 젖어 진흙이 되어 있었다. 그 안에 닭 깃 몇 가닥이 뒤엉켜 있었다.

묵용감은 허리를 숙여 닭 깃을 집어 들었다. 도포 자락에 깨끗이 닦아 방금 전 전해 받은 깃 색과 비교해 보니 같은 닭의 것이 분명했다.

만약 이게 노랑이의 것이라면 백천범은? 노랑이를 찾았다면 분명 돌아갔을 텐데, 어째서 사라졌단 말인가?

그때 또 다른 친위병이 소리쳤다.

“이곳에 신발이 있습니다!”

묵용감은 심장을 심하게 가격당한 듯 혼이 나간 얼굴로 급히 뛰어갔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비탈길에 무엇인가 미끄러진 흔적이 남겨져 있었고, 덩굴에 신발이 걸려 있었다. 그도 본 적 있던 신발이었다.

하늘색 바탕에 연청색 연꽃이 수놓아진, 녹하가 백천범에게 만들어 준 신발이었다. 계집아이가 유독 마음에 들어 하며 그의 앞에서 자랑까지 했던 바로 그 신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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