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낙성각에 도착한 녹하는 안으로 그대로 돌진했다. 추문이 막 그녀를 맞이하려 입을 떼는 순간 녹하가 성을 내며 호통쳤다.
“저리 꺼지시오!”
까닭 없이 욕을 먹자 기분이 나빠진 추문은 그녀를 막아섰다.
“녹하 아가씨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한들 노비에 불과한데 분수를 모르시면 안 되지요.”
마음이 급했던 녹하는 손을 들어 그대로 추문의 뺨을 날렸다. 이내 눈썹을 치켜세운 채 날카롭게 말했다.
“내 앞을 막아서고도 감당할 수 있겠소?”
깜짝 놀라 얼굴을 감싼 추문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떠들썩한 소리에 급히 밖으로 나온 수원상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녹하 아가씨, 성질이 대단합니다. 갑작스레 뛰어 들어와 내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그간 녹하에게 예를 갖추던 그녀였지만 녹하가 추문에게 손을 대며 자신의 체면을 깎은 이상 그녀 또한 더 이상 예를 갖출 필요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추문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수원상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마마, 억울하옵니다. 녹하 아가씨가 아무 말도 없이 쳐들어오더니 그대로 소인의 뺨을 때렸습니다. 애당초 마마를 안중에도 두지 않은 게 틀림없사옵니다.”
녹하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때린 일은 왕야께서 처리하실 것이니 지금 그 얘길 떠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는데 측왕비께서는 무슨 연유로 하인을 보내지 않는 것인지요? 이 늦은 시간에 비까지 퍼붓는데 왕비 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측왕비께서 책임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수원상이 말했다.
“대체 저택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단 말이오? 비가 내리니 왕비 마마께서 잠시 비를 피하는 것뿐이시겠지. 뭐 그리 심각한 일이 생기겠소?”
“측왕비께서 아직 우리 왕비 마마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십니다.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식사 시간이 되면 두말없이 돌아오시지요. 헌데 지금 이 시간이 되도록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비까지 퍼붓는데 측왕비께서는 걱정도 되지 않으십니까? 왕야께서 떠나시기 전, 저택을 잘 돌봐 달라고 말씀하셨는데 큰일이 생기면 무슨 낯으로 왕야를 뵐 수 있으시겠습니까?”
녹하의 말이 수원상의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백천범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하지만 묵용감이 그녀를 믿고 집안일을 맡겼는데,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분명 초왕을 볼 낯이 없을 것이었다.
“왕야를 들먹거리며 압박할 필요 없소. 왕비 마마께서 정말 사라지셨다면 나도 하인을 불러 모을 생각이었으니.”
그녀가 무수리를 불렀다.
“앞뜰로 가서 관리들을 불러오너라.”
무수리는 곧장 알겠다고 대답한 뒤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관리를 불러오라는 말은 왕비를 찾기 위한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녹하는 그제야 얼굴을 펴고 수원상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방금 전에는 소인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소인이 직접 왕야께 찾아가 죄를 고하겠습니다.”
녹하와 가급적 언쟁을 피하고 싶던 수원상은 먼저 예를 갖추는 그녀의 모습에 넘어가기로 했다.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아가씨도 순간 마음이 급해서 그랬던 것이겠지요. 왕비 마마를 찾으면 아가씨가 한 소리 해 주십시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밖을 나가 제멋대로 행동하시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걱정을 샀다고 말입니다.”
수원상은 은근슬쩍 백천범을 꾸짖고 있었지만, 녹하와 월규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은 왕비를 찾는 게 더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녹하와 월규는 측왕비가 왕비를 찾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자마자 곧바로 낙성각을 빠져나왔다.
두 시녀가 떠나자 추문이 입을 열었다.
“마마, 정말 저들을 도와주실 것입니까?”
수원상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킨 뒤 대답했다.
“왕비를 찾지 않으면 어찌하겠느냐? 왕야께서 곧 돌아오실 텐데. 백천범이 본비의 체면을 깎으려 고의로 일을 꾸미는 것일 수도 있다.”
추문이 악에 받친 듯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백 승상 댁에서도 그렇게 미움을 샀다던데, 지금은 이곳에서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키다니요. 며칠 전엔 닭을 잃어버렸다며 저택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지금은 본인이 사라져서 아수라장을 만들고 말입니다. 소인은 말썽을 일으키는 저 모습만 봐도 속이 다 체한 기분입니다.”
수원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왕비는 왕비이니 체면상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우리는 약점만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할 몫만 다 하면 그만이다.”
그 사이 관리들이 찾아왔다. 수원상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러 피곤하겠지만 본비도 어쩔 도리가 없었소. 비까지 내리는데 왕비 마마께서 어디에 숨어 계신지 모르겠다며 남월각 하인들이 본비를 찾아왔소. 하여 본비가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 관리들을 부르게 되었소. 수고스럽겠지만 각자 하인들을 보내 좀 찾아주시오.”
몇몇 관리들이 곧장 답했다.
“측왕비 마마를 대신해 힘쓰는 것은 소인들의 본분입니다. 어서 인부들을 불러 저택을 이 잡듯 뒤져 왕비 마마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리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울 것 없이 한 번 찾아봐 주시오. 최선만 다하면 되오.”
관리들은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 대답한 뒤, 인사를 올리고는 방을 나섰다.
곧이어 송유를 바른 횃불이 하나둘씩 켜졌다. 마치 화룡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듯 횃불 행렬이 칠흑 같은 어둠을 밝혔다.
비는 조금씩 수그러들었지만 바람은 점차 거세졌다. 떨어진 낙엽이 세차게 흩날리자 스산한 가을밤이 더욱 처량해 보였다.
수원상은 복도에 서서 먼발치에 있는 횃불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추문이 조심스레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마마, 밤이 깊었습니다.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이미 하실 만큼 다 하셨습니다. 왕비가 어찌되든 마마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왕야께서 돌아오셔도 마마를 질책하실 일은 없사옵니다.”
수원상이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비가 죽든 살든 물론 본비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저 왕비의 팔자에 복이 있기만 바랄 뿐이다.”
* * *
밤새 비바람이 그칠 줄 모르더니 이튿날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수원상은 조금 늦게 잠에서 깼다. 어렴풋하게 눈을 뜬 그녀는 침대 옆에 서 있는 추문에게 곧장 왕비에 대해 물었다.
“왕비는 찾았느냐?”
추문이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입니다. 하지만 총 관리인께서 오셨습니다.”
수원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추문이 옷을 입혀 주었다.
“왕비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뭐라 하더냐?”
추문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막 돌아오신 듯합니다.”
* * *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들은 소식이 왕비의 실종이라니. 학평관은 팔다리를 덜덜 떨며 차씨에게 소리쳤다.
“왕비 마마께서 어찌 사라지셨단 말이냐? 어서 말하거라!”
차씨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낱낱이 고했다. 차씨의 말에 학평관은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하룻밤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다니, 수상한 일이었다. 그는 곧장 관리들을 불렀다.
“어젯밤에 제대로 잘 찾아본 것이냐? 어쩌면 왕비 마마께서 비를 맞고 쓰러지셨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본 자가 없느냐?”
관리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답할 뿐이었다. 사실 그들은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울 것 없이 한 번 찾아보라는 측왕비의 말에서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그리곤 그녀의 말마따나 슬렁슬렁 저택을 돌아다녔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한밤중에 저택을 샅샅이 뒤지고 싶어 하는 하인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한번 슬쩍 둘러보고는 그대로 철수했다.
반면 남월각과 회림각의 하인들은 밤을 꼬박 지새워 왕비를 찾다가 학평관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하나둘 그를 찾아왔다.
월향과 월규는 학평관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더니 왈칵 울음을 쏟았다.
“어르신,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어찌해야 좋단 말입니까…….”
화가 치밀어 오른 학평관은 월향과 월규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더 이상 질책할 시간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초왕이 돌아오기 전까지 왕비를 찾아야만 했다. 만약 그때도 왕비를 찾지 못한다면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그가 기홍에게 물었다.
“저택 안을 모조리 뒤졌는데 정말 아무 곳에도 안 계셨단 말인가?”
기홍이 답했다.
“어젯밤 구역을 나누어 저와 녹하, 회림각 하인들은 저택 동쪽을 찾았고, 월향과 월규, 남월각 하인들은 서쪽을, 벽하각 하인들은 명호 일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관리와 하인들이 찾았는데 아무 데도 안 계셨습니다.”
학평관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찾지 못했다면 저택 밖으로 나가신 게 아닌가?”
월규가 흐느끼며 말했다.
“밖으로 나가실 거였으면 소인들에게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학평관이 대문을 지킨 당직 머슴들을 불러와 물었지만 아무도 왕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학평관은 그녀가 몰래 나가려 했다면 충분히 머슴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저택 밖으로 나갔다면 그야말로 잔디밭에서 바늘 찾기였다.
기홍이 잠시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어르신, 소인 생각에 이 일은 왕야께 고하는 수밖엔 없을 듯합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왕야께서는 뛰어나신 분이시니 분명 저희보다는 더 좋은 방안을 찾으실 것입니다. 지금은 왕비 마마를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학평관이 서둘러 날을 계산했다. 묵용감은 지금쯤 마지막 목적지이자 임안성에서 가장 가까운 통주通州에 있을 것이었다. 서둘러 하인을 보낸다면 두 시진 전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었고, 늦어도 오후에는 초왕이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왕비가 무탈하길 하늘에 비는 수밖에 없었다. 왕비만 멀쩡하다면 다들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만약 시간이 더 지체되어 정말 무슨 변고라도 생기다면 분개한 초왕에게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학평관은 기홍의 말대로 서둘러 묵용감의 막사에 하인을 보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다시 조를 이루어 저택 곳곳을 누비며 왕비를 찾기로 했다.
앞뜰 하인들은 밤을 새진 않았지만 잠을 설친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또다시 왕비를 찾으란 지시에 기분이 불쾌해진 그들은 웅성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학평관이 그들에게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뭘 그리 떠드느냐! 불만이 있거든 이리 나와 떠들거라! 왕야 앞에서도 그리 떠들어 댈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