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날이 어두워져도 백천범이 돌아오지 않자, 월규는 무수리에게 우산을 준비해 왕비를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번개까지 치는데 비를 맞았다간 필시 병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백천범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무수리는 하는 수 없이 처소로 돌아와 월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걱정이 된 월규는 모든 하인들에게 왕비를 찾아보라고 분부했다. 월향도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자 월규가 서둘러 말렸다.
“이제 겨우 조금 나았는데 어딜 가려고. 넌 여기 있어. 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시면 맞이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월향은 어쩔 수 없이 남월각을 지켰다. 병은 산이 무너지듯 갑자기 오지만, 나을 때는 명주실을 뽑듯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몸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기력이 없어 바람에 날아갈 듯 휘청거렸다.
남월각 하인들이 등불을 들고 뛰쳐나와 사방을 뒤지자 낙성각 정원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추문이 입을 삐죽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수원상에게 고했다.
“왕비가 또 하인들에게 닭을 찾으라고 분부했나 봅니다. 그 닭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인데, 뭘 저리 야단을 떠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원상은 등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그리 신경 쓰지 말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모든 일을 말씀드리면 될 일이다.”
추문이 말했다.
“왕야께서 왕비가 저지른 일들을 들으시면 분명 크게 성을 내실 것입니다. 그러다 곧바로 왕비를 내치실 일도 모를 일이지요. 그리 되면 마마께서 정비 자리에 오르실 것입니다.”
수원상이 그녀를 곁눈질로 흘기며 말했다.
“허튼소리 그만 하거라.”
* * *
후원을 뒤져도 백천범이 보이지 않자 하인들은 앞뜰로 향했다. 여기저기 물어도 왕비가 앞뜰에 온 걸 보지 못했다는 말에 마음이 조급해진 월규는 서둘러 회림각으로 향했다. 중문에 다다르자 차씨가 그녀를 막아섰다.
월규는 회림각 출신이었기 때문에 차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씨에게 왕비가 이곳에 오지 않았는지 물었다.
차씨가 장난을 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전엔 닭을 잃어버리더니 이제는 주인까지 잃어버렸다고? 하인들이 이렇게 형편없어서야, 정말… 쯧쯧…….”
월규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물은 말에만 대답하십시오. 왕비 마마께서 이곳에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안 계시네.”
차씨가 말했다.
“오늘은 내가 당직이라 계속 이곳을 지켰는데, 왕비 마마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으니 다른 곳에 가서 찾아보라고.”
월규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들어가 확인해 보려 했지만, 차씨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어찌 사람 말을 못 믿는단 말인가? 왕비 마마께서 비를 맞지 않게 하려면 서둘러 다른 곳에서 찾아보래도!”
월규는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평소 왕비가 즐겨 찾는 곳을 모조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어찌 이리 홀연히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노랑이가 사라진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자 월규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때, 천둥이 우르르 쾅쾅 치기 시작하더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녀는 급히 나무 아래로 뛰어 들어가 등불을 내려놓고 우산을 펼쳤다. 바람이 셌던 탓에 등불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그녀는 조심스레 우산을 받쳐 들고 후원으로 향했다.
작은 희망을 안고 남월각으로 돌아오니 밖을 나섰던 하인들이 속속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다들 죽상이 된 얼굴로 찾지 못했다고 털어놓을 뿐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월향이 우산을 펼치고 밖으로 나섰지만, 월규가 그녀를 가로막으며 호통쳤다.
“자꾸 성가시게 하지 좀 마. 분명히 찾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일은 노랑이를 찾는 것과는 달라. 이렇게 큰 저택을 몇 사람이서 어떻게 다닐 수 있겠어?”
월향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어떡해?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우산도 안 가지고 가셨잖아. 비를 맞아 병이라도 나시면 어떻게 해?”
월규가 잠시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측왕비께 고하는 수밖에 없겠어. 저택의 모든 사람을 동원해서 찾게 해 달라고 청을 드리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내가 가서 말씀드릴게.”
월향이 조급해하며 말했다.
“나 때문에 왕비 마마께서 측왕비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노랑이가… 아냐, 일단 그 얘긴 제쳐 두고 왕비 마마를 찾는 게 급선무지.”
“넌 여기 있어. 바람이 많이 얼마나 많이 부는데. 지금 네 꼴로 나갔다간 정말 바람에 날아갈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왕비 마마에 너까지 찾아야 한다고.”
월향은 초조했지만 오히려 피해만 끼칠 것 같은 자신의 몸 상태에 결국 한 발 물러섰다.
“너는 성격이 충동적이니까 측왕비께서 뭐라 하셔도 꾹 참고 신경 쓰지 마. 잘 말씀드려서 왕비 마마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니까.”
“나도 아니까 걱정 마.”
월규는 굳은 얼굴을 한 채 성큼성큼 낙성각으로 향했다.
무수리와 머슴들은 처마 밑에 서서 장대비를 뚫고 낙성각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 * *
비바람이 드세 낙성각 하인들은 다들 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월규가 입구에 서서 몇 차례나 하인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추문은 그녀의 소리를 들었지만 일부러 무수리에게 나가지 말라는 눈빛을 보낸 것이었다.
마음이 초조해진 월규는 우산과 등불을 복도에 내려놓고 안으로 향했다.
그녀가 막 안으로 들어서자 추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대체 규율을 어디에서 배워 먹은 노비란 말입니까? 아무 말도 없이 제멋대로 방을 들다니요?”
월규는 한숨을 내쉰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추문 아가씨, 접니다. 측왕비 마마께서 안에 계십니까?”
물론 추문은 월규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월규와 싸우고 난 뒤로 앙심이 생긴 추문은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제 발로 찾아와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걸 보니 무엇인가 청을 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추문은 일부러 그녀를 더 곤욕스럽게 했다.
“우리 마마께서는 지금 식사 중이시니 무슨 일이 있거든 잠시 뒤에 다시 오시지요.”
월규가 조급해하며 말했다.
“매우 시급한 일입니다. 부디 한 말씀만 고해 주십시오.”
추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리 마마께서는 식사를 하실 때 시끄러운 걸 아주 싫어하십니다. 잠시 뒤에 다시 오십시오.”
월규는 추문이 고의로 저리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곁채를 향해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다.
“측왕비 마마,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왕비 마마를 찾을 하인들을 보내주시옵소서!”
수원상은 정말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녁은 특히나 더 적게 먹었기 때문에 젓가락질 몇 번에 국을 마시는 게 전부였다. 그녀는 시녀에게 건네받은 수건에 입을 닦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들어와서 고하거라.”
월규는 허겁지겁 방 안으로 들어와 수원상 앞에 무릎을 꿇고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고했다.
“측왕비 마마, 부디 왕비 마마를 찾아 주십시오. 날이 어두워진 데다가 큰비가 내리고 있사옵니다. 혹여 왕비 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소인, 더는 살 수 없사옵니다…….”
수원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말은 왕비 마마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더냐. 왕비 마마께서 바보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비를 맞고 계시겠느냐?”
“하지만 소인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러신 적이 없었습니다.”
“대문에도 물어보았느냐? 밖으로 나가신 것은 아니냐?”
“물어보았습니다. 당직 머슴 말이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하옵니다. 앞뜰에도 물어보았지만 왕비 마마를 뵈었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앞뜰에 가신 게 아니라면 후원에 계신 게 아니겠느냐? 서왕비에게도 찾아가 보았느냐?”
“예. 서왕비께서도 하인들을 보내 주시어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회림각은? 기홍과 녹하 아가씨를 자주 찾아가시질 않느냐. 그곳에 계실지도 모르지.”
“이미 중문에 있던 차씨에게 물어보았지만 왕비 마마께서는 오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직접 들어가 보진 않은 것이냐?”
수원상이 태연하게 말했다.
“차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가끔 졸기도 하던데 그때 왕비 마마께서 들어가셨을지도 모를 일이지. 다시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
“측왕비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인이 다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왕비 마마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다면 부디 함께 찾을 수 있는 하인들을 보내주십시오. 저택이 이렇게 큰데 남월각 하인 몇 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옵니다. 왕비 마마께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소인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수원상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우선 회림각에 다녀오고 난 뒤에 다시 고하거라. 그렇게 많은 하인들에게 분부를 내리려면 필히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왕비 마마께서 너희를 골려 주려고 일부러 숨으신 거라면 어찌할 것이냐? 본비가 저택의 모든 하인들을 동원해 왕비 마마의 숨바꼭질에 동참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이겠느냐.”
결국 월규는 다시 회림각으로 향했다. 비가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옷이 빗물에 흠뻑 젖자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찬기가 전해졌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왕비가 사라졌다. 닭이 사라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에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중문에 다다르자 또다시 차씨가 그녀를 막아섰다.
월규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왕비 마마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니 감히 막아서기만 해 보십시오.”
그녀의 어두워진 안색과 날카로운 눈빛에 압도된 차씨는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월규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기홍과 녹하는 안절부절 못했다. 녹하는 월규에게 삿대질을 하며 혼을 냈다.
“대단하다, 대단해. 주인은 잃어버려 놓고 너는 왜 멀쩡히 여기 서 있는 건데? 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왕비 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왕야께서 돌아오시자마자 네 살갗부터 벗기실 거야!”
초조했던 월규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인 탓입니다. 왕비 마마께서 나가실 때 함께 따라나서야 했는데, 다 소인 잘못입니다. 흑흑흑…….”
이번에는 기홍이 호통쳤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어서 찾아야지! 왕비 마마를 찾지 못하면 우린 다 끝장이야!”
월규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측왕비께 찾아가 저택의 하인들을 동원해 왕비 마마를 찾아달라고 청을 드렸으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시며 허락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저택이 이렇게나 큰데 남월각 하인 몇 명으로 어찌 왕비 마마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녹하가 성을 내며 말했다.
“내가 가야지 안 되겠다. 왕야께서 집안일 좀 맡기셨다고 정말 주인마님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으니 아주 기뻐하시겠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빗속을 뚫고 성큼성큼 앞으로 향했다.
월규는 서둘러 우산을 펴고 그녀를 따라갔고, 기홍은 회림각 하인들을 불러 모아 후원으로 가서 왕비를 찾으라 분부했다. 측왕비가 하인을 보내 주든 그렇지 않든 그녀라도 먼저 왕비를 찾아나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