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노랑이가 사라지자 백천범은 입맛도 없어졌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듯 조금씩 입 안에 넣으며 중얼댔다.
“노랑이는 뭐라도 좀 먹었나 모르겠네. 나처럼 배고픈 걸 못 참는 아이인데 말이야. 비가 와서 숲속에 벌레들도 많으니까 똑똑한 노랑이는 분명 잘 먹고 있겠지? 굶는 일은 없을 거야.”
“맞습니다.”
월규가 맞장구를 쳤다.
“우선은 왕비 마마부터 챙기십시오. 설구와 구구도 먹이를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마마께서 늘 직접 먹이신 탓에 입을 벌릴 생각도 없는 것이지요. 노랑이만 신경 쓰신다고 토끼들을 잊으시면 안 될 일입니다. 두 토끼가 어찌나 나약한지 겨우 하룻밤 마마를 못 뵈었다고 소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걔들도 노랑이가 없어진 걸 알고 마음이 아픈 거겠지. 사람이든 동물이든 함께 지내다 보면 정이 드는 법인데, 이렇게 갑자기 떨어지면…….”
그녀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더구나 노랑이는 나한테 특별한 존재인데.”
늘 헤헤 웃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서는 걸핏하면 눈시울을 붉혔다. 더 이상 예전의 왕비가 아닌 듯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월규도 마음이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왕비의 시중을 처음 들 때만 해도 그녀가 바보 같다고만 생각했다. 왕야의 사랑을 받으면서 비위를 맞출 줄도 모르고, 늘 초왕의 화만 돋웠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왕비의 어수룩함이 얼마나 얻기 힘든 귀한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주인의 시중을 드는 것은 시녀의 본분이었지만, 왕비는 시녀들에게 늘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은 게 생기면 항상 시녀들과 나누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그들을 불러 함께했다.
두 시녀는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했지만, 왕비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문을 닫고 두 시녀를 억지로 자리에 끌어 앉혔다. 이렇게 해야 가족 같다는 것이었다.
월향이 나쁜 마음을 먹고 호수에 몸을 던졌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주인이었다면 재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며 호되게 욕을 퍼부었겠지만, 왕비는 혼을 내기는커녕 누구보다 초조해하며 의원을 불렀다.
그만 돌아가 침소에 들라는 청에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월향의 곁을 지켰다. 한밤중에 잠시 정신을 차린 월향은 그런 왕비의 모습에 후회가 밀려와 눈물을 쏟았다.
이런 주인이 대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렇게 진실된 아이가 마음을 다해 아끼던 노랑이를 잃었으니 어찌 그 슬픔을 참을 수 있을까.
* * *
가을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벌써 이틀이 흘렀다. 백천범은 여전히 노랑이를 찾아다녔지만 이제는 하인들 없이 홀로 밖으로 향했다.
사실 그녀도 노랑이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방 안에만 틀어박혀 마음을 졸이고 싶지 않았다.
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녀의 모습에 월규와 월향도 쉽게 타이를 수 없었다. 어쨌든 밖에 나가 바람을 쐬며 기분전환을 하는 게 더 나을 것이었다. 따라오지 말라는 그녀의 분부에 두 시녀는 처소를 지켰고, 때가 되면 그녀 스스로 돌아오곤 했다.
백천범은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그녀에게 피풍을 걸쳐 주던 월규가 신신당부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 아직 날이 흐린 걸 보니 또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잠깐 살펴보시고 금방 돌아오셔야 합니다.”
백천범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녀는 꽃무늬가 새겨진 좁다란 돌길을 따라 천천히 명호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자색 피풍이 훨훨 나는 나비처럼 흩날렸다.
어두운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손에 닿을 듯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슬픔에 잠긴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노랑이를 떠올리면 코끝이 절로 시큰거리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유모가 떠난 그 해에도 오랜 시간 이렇게 지내야 했다. 이씨 부인도 그녀가 유일한 측근을 잃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인지 한동안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만약 그때도 끊임없이 괴롭혔다면 그녀에게 정말 무슨 큰일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정신이 팔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한 무수리가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왕비 마마, 또 노랑이를 찾으러 가시는군요!”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어느 처소에서 일하는지 알 수 없는 무수리였다. 백천범은 대수롭지 않게 그렇다고 대꾸하고는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때 무수리가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혹 뒷산에서도 찾아보셨는지요? 종종 꿩이 나타나기도 한다던데, 꿩이 노랑이를 데리고 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흠칫 놀란 백천범은 서둘러 뒷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초왕의 저택은 금성대로의 가장 끝자락에 있었다. 처음 저택을 지을 때 초왕이 저택을 둘러싼 산자락까지 집터로 삼았는데, 처소와의 거리가 멀어 대부분의 하인들은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백천범은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던 시기에 한 번 가 본 적 있었지만, 산기슭만 잠시 돌아다녔을 뿐 산 위를 오른 적은 없었다.
그간 저택 내부만 샅샅이 뒤졌을 뿐, 뒷산에는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는 또다시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 꿩이 노랑이를 유인한 거라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노랑이를 찾고, 돌아오는 길에 꿩도 잡아 와 탕을 끓여 먹으면 될 일이었다. 예전 우두산에서 꿩 요리를 먹었을 때 이모가 어찌나 맛있게 만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일 정도였다.
그녀는 쏜살같이 뒷산을 향해 뛰어갔다. 산을 올려다보니 그리 높지 않았지만, 산 정상에 검은색 털모자처럼 생긴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산에는 네모난 돌이 놓인 작은 돌길이 있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물었던 탓에 돌길 틈으로 무성히 자란 잡초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백천범은 한 걸음 뗄 때마다 발자국을 남기며 유유히 산을 올랐다.
산허리쯤 올랐을 때, 수풀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풀숲을 헤쳤다.
역시 꿩처럼 보이는 무엇인가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백천범은 노랑이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을 죽이고 몰래 꿩의 뒤를 쫓기로 했다.
하지만 꿩은 땅에 몸이 붙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풀숲에 쪼그려 앉았다.
비가 온 뒤인지라 빗물을 머금은 풀잎이 그녀의 피풍을 적셨고, 그녀의 손발도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미세하게 몸을 움직이자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꿩은 재빨리 푸드덕거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백천범은 서둘러 꿩을 쫓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수풀 사이를 뛰어가다 피풍이 가시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서둘러 고개를 들고 다시 앞을 살펴보았지만 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성이 난 그녀는 있는 힘껏 피풍을 잡아당겼고,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진 비단 조각이 가시나무 위에 흔적을 남겼다.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꿩을 찾다 보니 이미 산길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풀을 헤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사이 주변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어느새 먹구름이 머리 위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번개가 치며 어두운 하늘을 두 쪽으로 갈랐다. 눈부신 광선이 나무 아래를 비추자 새로 만든 듯한 흙더미 위로 닭 깃 몇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백천범은 노랑이의 것과 거의 흡사한 갈색 깃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흙더미 근처에 다다른 그녀는 쪼그려 앉아 비에 젖은 흙을 더듬거리며 닭 깃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날이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번개가 쳤을 땐 분명 깃털이 황갈색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정말 노랑이의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깃이 놓여 있던 봉긋한 흙더미는 누군가 힘껏 밟기라도 한 듯 단단했다. 그녀는 이 안에 노랑이가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기에 흙을 마구 파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흙 속에서 돌과 뾰족한 가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쓸려 상처가 났지만 그녀는 아픈 줄도 모르고 서둘러 안에 있는 것들을 파헤쳤다.
열 손가락이 피범벅이 되도록 파헤쳐도 끝없이 많은 양의 돌과 가지가 깊숙이 묻혀 있었다. 그때, 땅을 울릴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또 한 차례 번개가 치더니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으며 더욱 빨리 흙을 파헤쳤다. 땅에 빗물이 스며들자 부드러운 진흙이 되었다. 그녀는 땅에 납작 엎드린 채 끊임없이 땅을 파고 또 팠다.
드디어 손에 무엇인가가 만져졌다. 조심스레 꺼내 보니 이미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닭이 있었다.
그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붉은 닭 볏을 어루만졌다. 볏 끝에 자그마한 혹이 만져지자 그녀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틀림없이 노랑이였다. 볏 끝에 작은 혹이 있는 닭은 노랑이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절묘한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닭을 잃어버렸고, 이곳에 마침 볏 끝에 혹이 난 닭이 묻혀 있었다. 이게 노랑이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닭이란 말인가?
그녀는 노랑이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머리 위로 번개가 치자 그녀는 익숙한 노랑이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꼭 그녀의 품 안에 파고들어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았지만, 탁한 노랑이의 눈동자는 그저 흐릿하게 허공을 향할 뿐이었다.
그녀는 차오르는 슬픔을 참을 길이 없었다. 어째서 노랑이를 죽였단 말인가. 불만이 있었다면 그녀에게 직접 찾아오면 될 일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닭을 죽이다니!
온몸이 비에 젖었지만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그녀는 아무것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저 노랑이를 품에 안은 채 구슬프게 울 뿐이었다. 그녀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퍼붓는 빗소리에 묻혀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목이 다 쉴 정도로 목 놓아 울었다. 며칠 동안 걱정했던 일을 끝끝내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 노랑이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뾰족한 부리로 그녀의 신발을 쪼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녀의 발밑을 신나게 돌아다닐 일도, 그녀의 품에 뛰어들어 어리광을 피울 일도, 목을 빳빳이 들고 쌀알을 뿌려 주기만을 바랄 일도 없었다.
딱딱하게 몸이 굳어 버린 노랑이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파 그녀는 모든 힘을 우는 데 다 쏟은 듯 몸을 휘청거렸고, 결국 그대로 땅에 쓰려졌다.
차가운 빗물은 그녀의 몸 위로 잔혹하게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먹물을 뿌려 놓은 듯 까맣게 물들었다. 비바람 속에서 바라보니 아득히 먼 곳에서 등불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