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백천범이 잠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월규가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갑작스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향이는 좀 괜찮아졌어? 오늘 노랑이를 찾느라 월향이에게는 못 가 봤네.”
“많이 좋아져서 내일이면 일어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오래 누워 있었으니 게으름뱅이가 다 되었지요.”
“노랑이 얘기는 하지 마. 걱정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왕비 마마.”
월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노랑이가 없어져서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왕비 자신이거늘, 지금 이 순간에도 월향을 걱정하다니…….
* * *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백천범은 모든 하인들에게 후원과 앞뜰을 샅샅이 뒤지라고 분부한 뒤 자신은 회림각으로 향했다. 노랑이는 회림각에 익숙했기 때문에 그곳에 갔을지도 몰랐다.
노랑이가 없어졌다는 말에 녹하와 기홍도 근심에 휩싸였다. 회림각 하인들에게 정원을 꼼꼼히 살펴보라고 지시했지만 측간과 목욕까지 다 뒤져도 노랑이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천범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노랑이가 없는 날들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녀에게 노랑이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을 때 그녀에게 온 노랑이는 악랄한 노비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늘 그녀를 위로하며 자신의 온기를 나눠 주었다. 근심과 역경 속에서 함께 즐거움을 나눈 노랑이와의 시간은 그녀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추억이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굶을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사라지다니. 이 일을 그녀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백천범은 혼이 나간 듯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딜 갔단 말인가?
기홍은 너무 걱정 말라는 말밖에는 딱히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녹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예전에도 노랑이가 사라진 일이 있었는지요?”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없었어요. 이런 일은 처음이라 정말 걱정돼요.”
녹하가 말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간 측왕비와 언쟁이 있었으니 혹 그분이 일을 꾸민 게 아닐까요?”
마침 백천범도 이 일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그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녹하까지 이 말을 꺼내자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물어봐야겠어요.”
녹하는 그녀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기홍도 자연스럽게 따라나섰고, 그렇게 세 사람은 다 같이 낙성각으로 향했다.
* * *
기홍과 녹하가 회림각을 떠나 직접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수원상은 예를 갖춰 차를 내어 왔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두 아가씨께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는지요?”
녹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왕비 마마의 노랑이가 없어져서 측왕비 마마께 여쭤보러 왔습니다. 보신 적 있으신지요?”
수원상이 백천범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어젯밤 왕비 마마께서 찾아와 이미 물어보셨습니다. 노랑이는 이곳 낙성각에 온 적이 없습니다. 본 사람도 아무도 없고요. 왕비 마마, 설마 절 믿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백천범이 꾸물대며 말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요. 처소가 가까우니까 노랑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아닐지, 본 사람은 없는지 궁금해서…….”
수원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크게 성이 난 모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왕비 마마께서 하인을 시켜 찾아보십시오.”
백천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마워요, 원상 언니.”
그녀는 자신의 하인들을 불러 낙성각 곳곳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수원상은 자신이 내뱉은 빈말을 백천범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비가 하인들을 불러 처소를 뒤지라 한 것은 정말 그녀가 닭을 훔쳤다고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 나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백천범이 일을 더 크게 만들수록 더욱 손쉽게 그녀의 약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녹하와 기홍에게 말했다.
“두 아가씨께서도 다 보셨지요. 찾아보시란 말에 정말 이렇게 뒤지시다니요.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두 아가씨께서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본비는 지금껏 이렇게 모욕적인 일은 처음입니다. 본비를 닭 도둑이라 여기시다니요!”
녹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측왕비 마마, 말씀이 너무 과하신 듯합니다. 측왕비 마마께서 직접 찾아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어리셔서 에둘러 하는 말을 잘 파악하지 못하십니다. 찾지 못하게 하실 거였다면 그렇게 곧장 말씀하셨으면 될 일이었지요. 굳이 이제 와 화를 내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수원상은 기홍과 녹하가 그래도 자신의 체면을 세워 줄 것이라고 믿었다. 엄연히 집안일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은 그녀였지만, 어린 왕비는 그에 거리낌 없이 처소를 들쑤시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없다니!
그녀는 부아가 치밀어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기홍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측왕비 마마, 녹하는 원래 말을 돌려 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이니 너무 개의치 마시어요.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솔직하신 분이라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전에 왕야의 심기를 자주 건드리신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아직 어린아이 같은 심성을 지니셔서 지금은 오로지 노랑이 생각뿐이시니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옆에 서 있던 추문이 콧방귀를 뀌었다.
“왕비 마마께서 규율을 모른다고 하인들까지 모르는 것입니까?”
녹하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폭발했다.
“아가씨, 지금 우리더러 하는 소립니까? 우리는 회림각의 규율만 알고, 다른 곳의 규율은 모릅니다. 주인이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규율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럼 왕야께서 돌아오시거든 왕야께 직접 물어보십시오!”
추문은 할 말이 더 남아 보였지만 수원상이 호통을 치는 바람에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두 아가씨에게 예의 없게 대하지 말거라. 네가 오히려 두 아가씨에게 규율을 배워야 할 것이다.”
* * *
정원에서는 하인들이 한창 노랑이를 찾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때, 무수리가 그들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조심 좀 하세요. 새싹을 밟으면 안 된다고요. 왕야께서 직접 심으신 건데 잘못되면 책임질 거예요?”
남월각 하인들도 지지 않고 난폭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가 언제 싹을 밟았다는 거야? 그리고 왕비 마마께서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시는데, 발을 헛디뎌서 잠깐 밟는다 해도 왕야께서 책망하실 일은 없다고.”
무수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장담 못 하죠. 왕야께서 떠나시기 전 우리 측왕비 마마를 부르셔서 저택을 잘 관리해 달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요즘 들어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니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큰코다칠 거라고요.”
백천범이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걱정 마. 망가뜨리는 게 있으면 우리가 책임질 테니까. 왕야께서 날 벌하셔도 어쩔 수 없지. 너희는 어서 노랑이를 찾는 데만 신경 써.”
그 말을 방 안에서 듣고 있던 녹하가 조용히 한숨을 쉬더니 수원상에게 말했다.
“노랑이는 왕비 마마에게 목숨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정말 찾지 못한다면 어떡한단 말입니까…….”
수원상이 말했다.
“본비더러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설마 아가씨도 본비가 노랑이를 숨겼다고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만약 이렇게 뒤져도 찾지 못한다면요.”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땐, 왕비 마마께서 어찌 말씀하시는지 두고 볼 것입니다.”
한 시진이 넘도록 이 잡듯 뒤졌지만 닭 털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백천범은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들어와 녹하와 기홍에게 말했다.
“언니들, 우리 가요. 노랑이는 여기 없어요.”
수원상이 매섭게 말했다.
“왕비 마마, 이렇게 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백천범은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설마 밥을 먹고 가라는 말은 아니죠?”
“왕비 마마께서 한참이나 뒤지신 탓에 낙성각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 꼴 좀 보십시오. 그래 놓고 이렇게 가시겠다고요?”
백천범이 말했다.
“그렇게 어지럽히진 않았어요. 다시 잘 정돈했거든요. 못 믿겠으면 나가서 한번 살펴보세요.”
수원상은 체면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백천범은 정말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터라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모르는 체하는 백천범의 모습에 수원상은 얼굴이 파랗게 질릴 만큼 화가 치솟았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힘주어 말했다.
“볼 필요 없습니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모든 게 해결되겠지요.”
화가 난 수원상의 모습에 백천범은 해명을 하려 했지만, 왕비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던 수원상이 날카롭게 말했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화가 치솟은 그녀의 모습에 기홍과 녹하는 백천범을 끌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그런 수원상의 모습이 이상하기만 했다.
“분명 먼저 찾아보라 해 놓고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예요?”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화가 나면 마음껏 내라지요.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뭐 어쩌겠다고, 왕비 마마께서는 잘못하신 것 없습니다.”
기홍이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 떳떳하지요. 왕비 마마께서도 노랑이 일로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돌아가서 잠시 쉬십시오. 오후에 저도 하인을 불러 찾아보겠습니다. 왕비 마마께 노랑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소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단단히 가지십시오. 혹여…….”
“그럴 일 없어요.”
백천범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혹여 같은 일은 없어요. 노랑이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홍도 차마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기홍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소인이 왕비 마마를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몇 걸음만 걸으면 되는데요, 뭐. 전 제가 알아서 갈 수 있으니까 언니들이야말로 어서 돌아가세요. 비를 맞으면 안 되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남월각으로 향했다.
기홍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랑이 일은 별로 예감이 좋지 않은데……. 왕비 마마께서 저러시는 걸 보니 나도 마음이 안 좋아.”
녹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네가 보기에 노랑이는 어디에 있을 것 같아?”
기홍이 잠시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글쎄.”
여인들이 많아진 후원은 역시나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서로 싸우고 속이며 음모가 끊임없이 난무했다. 지금은 노랑이가 사라졌지만 나중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