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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52)화 (151/1,192)

제152화

녹하는 묵용감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놀란 안덕수는 곧장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녹하 아가씨, 이 일은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전씨가 벌인 일이지요. 소인은 그저 일이 더 커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게다가 측왕비 마마까지 이 일에 연관되어 있으니 소인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부디 아가씨께서 제 대신 말씀 좀 잘 해 주십시오.”

녹하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전씨에게 다 떠넘기시는 것입니까? 우리 왕비 마마께서 악랄한 주인이라니요. 더 이상 긴말 않겠습니다. 이 말이 왕야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각오하십시오!”

안덕수의 몸이 덜덜 떨렸다. 녹하가 백천범을 보호하려 한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초왕에게 안 좋은 말이라도 전한다면 뼈도 못 추릴 것이었다.

그는 곧장 가슴을 쿵쿵 때리며 말했다.

“녹하 아가씨, 걱정 마십시오. 그런 유언비어는 소인이 그 근원을 찾아 반드시 싹을 잘라 내겠습니다. 절대 왕야의 귀에 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심성이 선하고 상냥하신 왕비 마마께서 악랄한 주인이라니요. 전씨의 인품이야말로 누구나 다 알고 있으니 분명 그자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요!”

녹하가 물었다.

“전씨는 어디 있습니까?”

“어제 왕비 마마께 두 대를 맞고는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제가 가서 좀 봐야겠습니다.”

“예, 예. 이쪽으로 드시지요. 소인이 안내하겠습니다.”

스스로를 소인이라 칭하는 그에게 녹하는 별다른 말 없이 당당하게 앞으로 향했다. 어떤 이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다. 그런 이들에게는 무서운 기색을 보여 주어야만 비로소 상황을 인지했다.

전씨의 처소 앞에 다다른 안덕수는 우선 그가 옷을 잘 갖춰 입었는지 확인한 후에 녹하를 청했다.

녹하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전씨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녹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미간이 거무스름해졌습니다. 불길한 징조인데 말입니다.”

그녀가 초왕의 시녀인 걸 모를 리 없던 전씨는 미움을 살 수 없어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아가씨 말이 맞습니다. 불길한 징조 때문에 소인이 이렇게 누워 있질 않습니까?”

녹하가 말했다.

“제가 말하는 건 이 일이 아닙니다. 시일이 좀 더 지나면 더 불길한 일이 올 것입니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니 분명 생각해 둔 계획이 있겠지요. 왕야께서 곧 돌아오실 텐데 주의하셔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전씨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발을 걷어 올려 방을 나섰다.

전씨는 멍한 표정으로 안덕수에게 말했다.

“노, 녹하 아가씨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네게 곧 재난이 닥칠 테니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는 것 아니냐!”

그와 엮이고 싶지 않던 안덕수는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향했다.

전씨는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또 무슨 재난이 있다는 거야. 측왕비께서 날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 * *

녹하가 나선 덕에 백천범이 악랄한 주인이라는 소문은 대체로 사그라졌다. 다들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그들의 생각까진 통제할 수 없었다.

날마다 백천범 곁을 따라다닐 수 없었던 기홍은 그저 그녀에게 신신당부를 할 뿐이었다.

“왕비 마마, 초조해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지금은 측왕비를 찾아가 논쟁을 벌이시면 안 됩니다. 왕야께서 돌아오신 다음에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거든 시녀를 보내 제게 알려 주십시오. 학평관 어르신이 안 계시니 저와 녹하가 어떻게든 왕비 마마를 도울 방법을 생각하겠습니다.”

기홍의 말을 잘 듣는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어요. 언니 말대로 할게요.”

녹하는 역시나 듣기 달가운 말만 하지는 않았다.

“왕비 마마께서는 초왕비이십니다. 그에 걸맞은 위신을 보이셔야지요. 측왕비 마마의 모습이 더 그럴싸해 보입니다. 입만 열면 본비, 본비 하는데 정말 이 저택의 주인마님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왕야께서 집안일을 맡기시니 황후의 자리라도 오른 줄 아시나 봅니다.

측왕비 마마를 겁내지 마시고, 왕비 마마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십시오. 저희도 측왕비 마마가 무섭지 않습니다!”

기홍이 그런 녹하를 흘기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선 흉계 따위는 쓰실 줄 모르시니 그분의 상대가 안 돼. 차라리 왕야께서 오신 뒤에 해결하는 게 나아.”

녹하가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기홍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피하긴 하되 참지는 마십시오. 감히 왕비 마마께 대적하려 들거든 바로 때려 버리십시오!”

백천범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저만 날강도인 줄 알았는데 녹하 언니는 저보다 더 심한 날강도였네요.”

녹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녀도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음모를 꾸미는 짓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약한 척 동정을 얻으면서 뒤로는 음흉한 흉계를 꾸미는 꼴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역겨웠다.

대학사 집안 출신이니 분명 정정당당하게 문제를 처리해야 했지만, 교활한 계략을 쓴 것도 모자라 왕비의 시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까지 했다. 초왕이 돌아오면 분명 크게 봉변을 당할 것이었다!

* * *

이렇게 사건이 일단락된 후, 또다시 평온한 날이 이어졌다.

낙성각과 남월각은 거리가 가까웠지만 왕래는 전혀 없었다. 설사 마주치더라도 보지 못한 척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고청접은 종종 남월각에 찾아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씩 백천범에게 선물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친정 하인에게 부탁하여 토끼가 먹을 당근까지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왕비에게 아첨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이, 벗을 만나듯 고상하고 담담하게 행동했다. 백천범은 그런 방식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고청접에게도 호감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저녁, 백천범은 여느 날처럼 노랑이를 둥지로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노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인을 불러 노랑이를 찾아보았지만 온 저택을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월규가 장난을 쳤다.

“요즘 노랑이가 왕비 마마께 푸대접을 받았으니 분명 화가 나 숨었을 것입니다.”

백천범은 조금 불안했다.

“매일 이쯤 되면 알아서 돌아왔는데 오늘은 대체 어딜 간 거야?”

날이 더 어두워졌는데도 노랑이가 돌아오지 않자 백천범뿐만 아니라 남월각의 모든 하인들이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을 든 채 후원 곳곳을 누비며 노랑이를 찾았다.

소란스럽게 노랑이를 찾는데 낙성각은 도리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심지어 정원에서 보초를 서는 하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의심스러웠던 월규가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노랑이가 낙성각에 가진 않았을까요? 예전에도 들어간 적이 있지 않습니까. 왕비 마마께서 초조해하시라고 측왕비가 일부러 잡아 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근거 없는 말이었지만 확인해 보면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백천범은 곧장 낙성각으로 향했다. 그녀가 복도에 서 있는 무수리에게 물었다.

“우리 노랑이를 보지 못했느냐?”

무수리가 고개를 저었다.

“못 봤습니다.”

추문이 나와 멀리서 인사를 올린 뒤 쌀쌀맞게 말했다.

“왕비 마마의 말씀은 꼭 저희가 노랑이를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들립니다.”

“평소에도 종종 이곳을 오기에 물은 말이다. 없으면 관두거라.”

두 사람의 말소리에 수원상이 밖으로 나왔다. 희미한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녀는 멀리서 인사를 올리더니 추문에게 말했다.

“너를 때리실 수도 있으니 왕비 마마께 예를 갖추거라!”

노랑이를 찾는 데 급급했던 백천범은 그녀와 말씨름할 시간이 없었다. 몸을 돌려 밖을 나서려는데 또다시 수원상이 입을 열었다.

“닭이 없어졌다고 이렇게까지 초조해하시는 분께서 사람은 어찌 그리 매섭게 때리셨을까요.”

백천범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짙은 어둠을 뚫고 충돌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점점 더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백천범은 갑작스레 몸이 떨렸다.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었다.

남월각 하인들이 명호 주변을 샅샅이 뒤지자 소식을 접한 고청접도 자신의 하인을 보내 함께 노랑이를 찾았다. 하지만 후원을 이 잡듯 뒤져도 노랑이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백천범은 멍하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살아 있다면 노랑이가 나타나야 했고, 혹여 죽었다면 사체라도 발견되어야 했다.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물이 머리카락과 얼굴을 적시고 바람까지 불자 한기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월규는 백천범에게 그만 들어가라고 타일렀다. 비를 맞으며 찾으러 다니다간 왕비가 병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하인들이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백천범은 결국 하인들에게 그만 철수하고 돌아가라고 분부했다. 그저 남월각으로 돌아갔을 때, 노랑이가 둥지에 얌전히 들어가 있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녀의 기도를 들어준 적 없었던 하늘은 이번에도 무심했다. 방 한쪽에 놓인 노랑이의 둥지는 텅 비어 있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에 백천범의 슬픔은 더욱 깊어만 갔다.

백천범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월규가 한쪽에서 조심스레 그녀를 타일렀다.

“왕비 마마, 그만 주무시지요. 왕비 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닭은 날이 저물면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노랑이는 밖에서 두세 시진씩 머물며 돌아오지 않은 적이 많지 않습니까. 소인 생각에는 노랑이가 이미 다른 곳에 둥지를 만든 듯합니다. 오늘은 그곳에서 머물고 내일이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럴까? 정말 돌아올까?”

백천범은 크고 까만 눈동자로 애처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백천범의 입꼬리가 축 처지더니 금방 눈시울이 붉어졌다.

“월규 네가 그랬잖아. 내가 요즘 노랑이를 푸대접해서 화가 난 거라고. 노랑이는 똑똑해서 혼자서 다 잘하니까 내가 걱정을 안 해도 되는데, 설구랑 구구는 아니란 말이야. 얘들은 너무 어리고 겁도 많아서 밥도 잘 못 먹는걸. 하지만 사실 나한텐 노랑이가 제일 중요한데…….”

“노랑이도 설구와 구구를 돌봐 주는 걸 이해할 것입니다. 요즘은 설구와 구구를 놀라게 하는 일도 거의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화가 난 게 아니라 날이 어두워지니 어딘가에서 가만히 누워 쉬고 있는 것일 겁니다. 닭들은 밤눈이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그런 것뿐이니 너무 걱정 말고 우선 좀 쉬십시오.”

그녀의 말에 조금 위안이 된 백천범은 그제야 몸을 뉘였다. 옆으로 몸을 돌려 누운 그녀는 침대 옆 병풍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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