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월규는 백천범을 끌고 빠르게 걸어가다가 사람이 적은 곳에 다다라서야 그녀를 놓아 주었다. 백천범이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날 끌고 나온 거야? 이제는 제대로 말하기 더 어려워졌잖아.”
월규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마마께서 제대로 잘 말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측왕비와 추문이 미리 손을 쓴 게 뻔합니다. 어쩌면 하인들의 시답잖은 말도 미리 계획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거기서 계속 멍하니 계셨다가 또 무슨 일을 당하시려고요?
그것 보십시오. 마마께서는 측왕비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마께서는 계략을 쓰는 분도 아니신 데다 너무 단순하십니다. 월향 때문에 화를 낼 줄만 아셨지, 지금 상황 좀 보십시오. 이제는 악랄한 주인이 되어 버리셨습니다.”
“난 상관없어.”
“왕야의 귀에 들어가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왕야께서 떠나는 날까지 마마를 찾아오지 않으실 만큼 화가 단단히 나셨는데, 이제 악랄한 주인이라는 평판까지 얻으셨으니 마마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저택에 왕비 마마만 계셨다면 그나마 상황이 나았겠지요. 지금은 두 분이나 더 계시질 않습니까. 왕야께서 마마를 지켜 주지 않으신다면, 그 두 분이 개미를 밟아 죽이듯 마마를 잡으려 들 것입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왕비 마마?”
백천범은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였다.
지금까지 백천범은 수원상과 고청접을 이씨 부인 같이 악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질투심에 서로 다투는 정도라고만 생각했지 자신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머지않아 저택을 떠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아닐 거야. 내가 딱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뭐.”
월규가 속으로 생각했다.
‘잘못하신 일은 없지만, 마마께서 존재하시는 이상 그들은 영원히 첩으로 지내야 하니 원한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요.’
백천범이 고민하며 말했다.
“원상 언니는 내게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청접 언니는 아닐 거야. 월향이를 구해 주기까지 했잖아.”
월규가 말했다.
“서왕비께서 월향을 구해 주신 것은 감사 드려 마땅한 일이지만, 어쨌든 보통 대갓집 아씨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우니 주의하시는 게 좋습니다.”
백천범이 탄식했다.
“예전에 유모도 그렇게 말했었어. 이곳에서도 그 말을 듣게 되다니, 세상에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없구나.”
“왕야는 믿으셔도 됩니다. 사실 왕야께서는 왕비 마마께 정말 잘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 두 분에게 대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부디 왕비 마마의 복을 제 발로 차지 마십시오.”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는 두 언니를 처로 들이셨고 나는 여동생으로 삼으셨잖아. 그러니 자연스레 날 귀여워해 주시는 거고, 처에게는 좀 더 예를 갖춰 존중해 주시는 것이니 당연히 다르지.”
월규가 그녀를 흘기며 물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여동생으로 삼았다고 누가 그럽니까?”
“왕야께서 직접 말씀하셨어. 내 신랑감도 구해 주시겠다고 말이야.”
월규는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초왕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초왕은 왕비를 여동생이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인으로 대했기 때문이었다.
초왕의 생일날 왕비가 선물한 요상한 향낭에 이렇게 오래 화가 나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정말 왕비를 여동생으로 여겼다면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한 왕비에게 말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초왕 스스로도 그의 마음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으니, 월규가 말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는 어린 왕비도 분명 초왕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었다.
* * *
남월각으로 돌아온 백천범은 월향을 보러 갔다.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거리는 그녀는 이마에 잔뜩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를 돌보던 무수리가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월향 언니가 너무 불쌍합니다.”
백천범은 수건을 받아 들고 월향의 이마를 닦아 주며 말했다.
“오랫동안 간호하느라 힘들었지? 어서 가서 쉬어.”
무수리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나섰다.
백천범은 월향의 수척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려 온 백천범은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월향아, 어서 일어나. 내가 이미 네 대신 전씨에게 화도 내고 때려 주고 왔어. 내일 다시 찾아가서 사실대로 털어놓게 만들 거니까 걱정 마. 네 결백도 밝힐 수 있을 거야.”
월향이 어렴풋이 뜬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마마, 소인은 마마의 돈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알아. 난 널 믿어. 그 악랄한 전씨 같은 놈을 어떻게 믿겠어. 분명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그런 놈 때문에 속앓이하지 말고 좋게 생각해 봐. 이러다 건강 다 상하겠어.”
월향이 울먹거렸다.
“측왕비께서 제 잘못을 적은 방을 붙인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쯤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절 손버릇이 나쁜 애라고 생각하겠지요.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을 텐데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습니다.”
월규가 한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대단하다, 대단해. 고작 그런 일로 죽으려 들고. 그런 정신머리로 뭘 하겠다는 거야? 왕비 마마께서는 너 때문에 악랄한 주인이라는 오명까지 얻으셨는데, 전혀 개의치 않으시잖아. 왕비 마마께 좀 배워.
네 발이 네 몸에 달려 있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니?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거지 남들을 뭘 그렇게 신경 써? 내가 정직하면 남의 말도 두렵지 않은 법이야. 내가 안 했으면 그만이지!
남들이 뒤에서 헐뜯을수록 내가 더 잘해서 보여 주면 되잖아. 진실은 거짓으로 가릴 수 없고 거짓도 진실이 될 수 없어.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들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씩씩한 그녀의 말에 백천범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월규 너 말 정말 잘한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이 바로 그거였어. 월향아, 나처럼 남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 봐. 만약 시집오기 전에 억울하게 누명 쓴 일마다 내가 다 따지고 들었으면 몇 번이나 죽고도 남았을 거야. 하지만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나 스스로 잘 지내면 되지 무엇 하러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신경 써. 월규 말처럼 내가 정직하면 남들이 뭐라 해도 두려워할 것 없어. 내가 안 했으면 그만이지. 진실은 거짓으로 가릴 수 없고, 거짓도 진실이 될 수 없어.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들 같이 지내다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월향은 두 사람의 말에 마음이 동요되긴 했지만 성격 탓에 갑자기 마음을 다잡기란 쉽지 않았다.
왕비가 자신 때문에 악랄한 주인이라는 오명을 얻었다는 말에 더욱 죄책감이 커진 그녀는 정말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자신 때문에 왕비까지 이 일에 휘말리게 되자 그녀는 또다시 흐느꼈다.
월규는 눈을 부릅뜨며 한 차례 더 모진 말을 하려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백천범은 월향을 일으켜 세워 품에 끌어안았다.
“내가 안아 줄게. 예전에 내가 슬퍼할 때마다 우리 유모가 나를 이렇게 꼭 껴안고 조용히 위로해 주었거든. 예전에 유모가 겪은 수모야말로 정말 비참한 일이었다고, 내가 겪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이야.
세상에 이것보다 더 비참한 일을 당한 사람은 훨씬 더 많다고 하더라고. 내가 시집오기 전에 당했던 일들을 들으면 아마 너도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될 거야.”
월향은 백천범이 자신을 안아 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잠시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월향은 몸을 빼내고 싶었지만, 몸에 기력이 없어 움직이지 못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월규는 갑작스레 눈시울이 붉어져 등을 돌리고는 눈물을 훔쳤다.
백천범은 월향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천천히 말했다.
“난 어릴 때부터 엄마가 안 계셨어. 이씨 부인은 날 눈엣가시처럼 대했지. 늘 온갖 트집을 잡아서 괴롭히고 벌을 줬어. 어느 겨울날이었지. 처마 밑에서 무릎을 꿇고 벌을 받는데 고드름이 녹아서 내 머리 위로 얼음물이 떨어지는 거야. 어찌나 차갑고 추운지 머리에 구멍이 생기는 것 같았어.
그 물이 머리카락을 따라 목에도 흘렀고, 옷 안까지 적셨어. 피부가 꼭 마비되는 것 같더라고. 벌을 다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온몸이 얼어붙어서 다리가 펴지지 않았어. 하지만 그래도 이씨 부인에게 가서 고맙다고 절을 올려야 됐지.
온몸이 굳어서 절을 하기 힘들었던 나는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어. 이씨 부인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계속 절을 하게 했어…….”
월향이 엉엉 울며 말했다.
“왕비 마마, 그만 말씀하시어요.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죽으려 하지 않겠습니다…….”
* * *
백천범은 이튿날 전씨를 다시 찾아갈 계획이었지만, 월향과 월규가 무릎을 꿇고 막아서는 통에 그만 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악랄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하인들은 토끼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왕비의 모습에 뱀이라도 본 듯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회림각으로 향했다. 기홍과 녹하는 언제 가도 그녀를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림각은 독립된 처소였기 때문에 밖으로 심부름을 가는 몇몇 머슴을 제외하곤 처소 안의 하인들은 쉽게 밖을 드나들 수 없었다. 다른 하인들과는 달리 묵용감을 직접 보필해야 했기 때문에 규율을 지키는 데에도 더욱 엄격했다.
그래서 바깥의 사소한 소식도 쉽사리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홍과 녹하는 백천범이 악랄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도 듣지 못한 채였다. 백천범이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꺼낸 뒤에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왕비를 들인 뒤로, 기홍과 녹하는 백천범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줄곧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예상대로였다.
불같은 성격의 녹하는 백천범의 말에 곧장 앞뜰로 향했고, 관리 안덕수를 한바탕 꾸짖었다.
계급을 따지자면 안덕수는 저택 관리였고, 녹하는 시녀였다. 하지만 초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에 녹하의 위상이 더 높았다. 저택의 총 관리인인 학평관마저 그녀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고, 단 한 번도 소홀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물론 녹하도 마냥 호되게 꾸짖은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의 수준을 지켰다.
“안 관리님. 어제 우리 왕비 마마께서 억울한 일을 당하셨다지요? 왕야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이 왕비 마마라는 건 안 관리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곤장을 맞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상처가 아물고 나니 그 고통까지 잊으셨나 봅니다.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
그럼 제가 다시 알려드리지요. 왕야께서는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실지언정 왕비 마마께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가만히 지켜만 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분명 곤장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