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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50)화 (149/1,192)

제150화

수원상이 지난번 일로 일부러 농간을 부리며 월향의 트집을 잡는 것쯤은 백천범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월향과 월규에게 수원상은 공정한 사람이라고 확신에 차 말했다.

공정하긴 개뿔! 백천범은 사람을 볼 때 늘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지만, 역시 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었다. 월규의 말처럼 돈 몇 푼으로 그녀의 인품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던 데다 수원상과 입씨름할 마음도 없었던 백천범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건 둘째 치고, 의원을 부르라는 지시서를 써 줄 거예요, 말 거예요?”

“왕비 마마, 그리 억지를 쓰시면 아니 되옵니다.”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남을 비난하는 그녀의 모습에 백천범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저는 원래 억지를 잘 부려요. 그게 뭐 어때서요? 전 왕비고 언니는 측왕비에요. 언니가 더 윗사람이에요, 아니면 제가 더 윗사람이에요?”

수원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백천범이 끝끝내 입 밖에 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백천범이 차지한 왕비 자리가 곧 끝난다 해도, 어쨌든 지금은 그녀 머리 위에 있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물론 왕비 마마께서 윗사람이시지요.”

“좋아요. 언니도 내가 윗사람이라고 인정했으니 언니께 명령을 내릴게요. 월향이를 봐 줄 의사를 불러 주세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수원상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렇게 태도를 바꾸시겠다? 마음껏 그리해 보라지. 초왕이 돌아온 뒤, 백천범이 어떻게 자신을 업신여겼는지 말해 주면 될 일이었다.

수원상은 냉담한 표정으로 지시서를 써서 그녀에게 건넸다. 하지만 쉽게 손을 놓지 않았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제게 이 저택을 잘 관리하라 분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제가 참으로 난처합니다.”

백천범이 있는 힘껏 지시서를 빼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왕야께 다 고자질해서 제게 벌을 내리라고 하세요.”

* * *

월향은 심한 병치레를 겪었다. 약을 세 첩이나 먹었는데도 얼이 빠져 있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깨어나길 반복했다.

정신이 들 때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렸고, 혼미해졌을 땐 왕비의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느니, 억울하다느니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내뱉는 통에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월규는 여기저기 물어본 끝에 드디어 그녀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냈다. 화가 난 그녀는 눈이 새빨개진 채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이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월향이는 마음의 병을 얻은 것입니다. 이 계집애가 생각이 너무 깊어 목숨보다 명예를 중시한 것이지요. 반드시 이 애의 결백을 밝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측왕비께서 음흉하게 저 애를 죽음으로 내모신 것입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백천범은 어릴 때부터 억울한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다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씨 부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저택의 형제자매들 모두 별별 일을 다 그녀에게 뒤집어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찍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누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월향이 이리도 명예를 중요하게 여길 줄이야.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여인이 오명을 쓴다면 나중에 혼사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다 큰 여인이 시집을 가지 않으면 친정의 오라버니와 남동생, 올케들에게 미움과 원망을 살 텐데, 저 방법 말고는 또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는가?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었던 백천범은 서둘러 전씨를 찾아갔다.

전씨는 왕비가 직접 찾아왔는데도 무서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계집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초왕의 총애도 받지 못한다고 하니 얼마나 더 이곳에서 지낼지도 불분명했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그는 침대에 엎드린 채 손 인사로나마 예를 갖췄다.

백천범은 뒷짐을 진 채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씨, 솔직히 말해 보거라. 월향이 정말 돈을 주지 않았다고?”

“주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소인이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월향 아가씨가 당근을 사다 달라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인이 거절하였는데 월향 아가씨가 왜 돈을 주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월향은 분명히 돈을 주었다. 어서 말하거라, 그 돈 어쨌느냐?”

“소인은 정말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왕비 마마, 무고한 사람을 압박해 자백을 받으려 하시다니요!”

백천범이 냉소를 지으며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녀의 손에는 등나무 덩굴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허공에 덩굴을 내리치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깜짝 놀란 전씨가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왕, 왕비 마마.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소인 아직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죽을 수도 있사옵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너는 월향을 죽일 뻔했는걸. 어서 사실대로 말하거라.”

그녀가 덩굴을 들어 올려 전씨를 협박했다.

“말 안 하면 정말 때릴 것이다.”

전씨는 앓는 소리만 냈다. 측왕비가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했지만, 겁 없는 왕비는 늘 제멋대로였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가 정말 때릴 것 같진 않았기 때문에 전씨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주인이 노비를 벌할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때리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분명 그녀의 명예가 더럽혀질 것이었다.

“왕비 마마, 월향 아가씨는 정말 소인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덩굴이 그의 몸에 날아들었다. 이제 막 딱지가 앉기 시작하던 상처에 통증이 더해지자 그는 돼지 멱을 따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그의 비명에 놀란 부엌 관리 안덕수가 황급히 달려왔다. 어린 왕비가 덩굴을 들고 전씨를 때리는 모습에 깜짝 놀란 그는 서둘러 예를 갖춘 뒤 그녀를 말렸다.

“왕비 마마, 부디 노여움 푸시옵소서. 대체 무슨 일이신지요?”

백천범은 그를 흘깃 보더니 수원상의 말투를 따라 했다.

“본왕비가 노비 하나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냐?”

“물론 그러실 수 있으시지요.”

안덕수는 그녀 때문에 곤장을 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망설여졌다. 하지만 측왕비가 저택을 관리하고 있는 이상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쥔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역시나 측왕비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다만 노비를 벌하실 때에는 그에 합당한 명목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이렇게 이유 불문하고 마구 때리시면 노비들이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이 자가 거짓말을 하여 월향의 명예를 더럽혔다. 물에 뛰어든 월향이는 지금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내가 이 자를 때리지 않으면 누굴 때린단 말이냐?”

“그 일은 소인도 들었습니다. 측왕비께서 판결한 일이시니 왕비 마마께서는 응당 측왕비께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아직 몸이 낫지 않은 전씨에게 이러시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분이십니다, 왕비 마마.”

“이 자가 문제의 원흉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측왕비가 어찌 월향을 책망하였겠느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벌까지 받으면 그 누명이 진실이 될 것이다. 한 여인이 그런 오명을 안고 대체 어찌 살라는 것이냐? 오늘 이 자가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때까지 때릴 것이다.”

다시 덩굴을 들어 전씨를 때리려 하자 안덕수가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

“왕비 마마, 부디 다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그간 노비들에게 진심을 다해 잘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리 감정적으로 행동하시어 왕비 마마의 명예를 실추시키시면 아니 되옵니다.”

백천범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예? 월향과 나는 다르다. 내게 명예는 돈 한 푼만도 못한 것이지. 저자를 때려 죽여 악랄한 주인이 된다 해도 난 그리할 것이다!”

소식을 전해 들은 수원상이 서둘러 달려왔다. 대갓집 규수였던 그녀는 언행에 늘 빈틈이 없었다. 수많은 하인들 틈을 비집고 들어온 그녀가 왕비에게 공손히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 아직 일이 분명히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손을 대시다니…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소첩이 판결을 내린 것이니 마음이 상하시거든 차라리 소첩에게 화를 내 주십시오.

이 자는 이미 벌을 받고 이제 막 나으려던 참인데, 또다시 매질을 하시면 어찌 버틸 수 있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 월향을 끔찍이 여기신다는 것은 소첩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씨도 이곳의 노비인데, 어찌 전씨는 아껴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백천범이 입을 열려는데 수원상이 갑작스레 무릎을 꿇어앉았다.

“왕비 마마, 월향이 그런 마음을 먹은 것은 다 소첩이 혼을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소첩을 때리시지요. 소첩이 월향을 물에 뛰어들게 만들었으니 소첩의 잘못입니다. 그러니 소첩을 벌하십시오, 왕비 마마.”

입구를 둘러싼 하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말이 백천범에게도 들려왔다.

“역시 측왕비 마마께선 교양 있는 대학사 가문 출신이라 이치에 맞는 말씀만 하시는군. 왕비 마마는… 어휴, 누가 백 승상 딸 아니랄까 봐.”

“누가 아니래. 역시 아버지를 닮아 딸도 대단하네. 이런 대단한 주인을 모시고 있으니 앞으로 다들 조심해야 할 걸세.”

“불쌍한 전씨,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또 매를 맞다니, 몸이 어찌 나을 수 있겠는가? 재수 옴 붙었구먼 그래. 하필 왕비 마마 손에 걸려 가지고.”

“왕야의 총애도 받지 못하면서 뭘 저리 우쭐대는지, 원. 왕야께서 떠나실 때에도 측왕비와 서왕비 마마는 대문까지 배웅을 나왔는데 왕비 마마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니만, 어디 한번 두고 보라지. 측왕비 마마를 업신여기다가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어찌 처리하실지 말이야!”

백천범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두 대를 때렸을 뿐인데 악랄한 주인이라는 소문이 퍼지다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 우스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생 남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 같던 자신이 지금은 다른 누군가를 업신여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백천범이 아무 말도 없자 추문이 털썩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저희 마마를 용서해 주십시오. 몸이 좋지 않으신 데다 바닥까지 차가우니 더 무릎을 꿇으셨다간 병이 날 것입니다. 부디 은덕을 베풀어 주십시오, 왕비 마마. 저희 마마를 용서해 주십시오, 왕비 마마…….”

추문은 말을 내뱉으며 이마가 빨갛게 부어오를 만큼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백천범은 처음 겪는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는 것은 역시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릴 때 다른 이들에게 중상모략을 당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넋을 놓고 있는데 월규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그녀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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