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월향은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후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월각에 다다랐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남월각의 무수리가 먼발치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가 맞는지 긴가민가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황하에 뛰어들어도 그 오명을 씻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명예와 절조를 목숨보다 더 중시하는 월향이 지금은 부도덕한 행실을 저지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뒤에서 자신을 헐뜯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명호에 다다랐다. 구불거리는 장랑을 지나 호수 가운데에 자리한 정자에 도착한 그녀는 난간을 넘어 기둥에 기대섰다. 그리고는 남월각 방향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백천범과 자신의 자매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용서를 빈 뒤 눈을 감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큰 물보라가 일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몇 차례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가라앉았다.
창가에 서 있던 자초는 아무렇지 않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마, 이 정도면 되겠지요?”
고청접이 차를 들이켜며 말했다.
“그래. 이제 그만 구해 주거라.”
자초는 곧장 밖으로 나가 깜짝 놀란 척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어서 구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어서 구해야 합니다!”
밖은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졌고, 다들 허겁지겁 명호로 뛰어갔다. 어떤 이는 배를 타고 호수 중앙으로 향했고, 어떤 이는 그대로 물에 뛰어들었다.
한바탕 구조 소동을 벌인 끝에 월향을 찾을 수 있었지만, 핏기 없는 얼굴에 몸은 차디찼고 숨도 쉬지 않았다.
무관 집안 출신이었던 고청접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인에게 그녀의 흉부를 압박한 뒤 그녀의 입 안에 숨을 불어 넣으라고 분부했다.
한참 동안 반복한 끝에 월향이 물을 토해냈고, 천천히 호흡을 되찾았다. 잠시 눈을 뜬 그녀는 누가 자신을 구해 주었는지 보지도 못한 채 다시 정신을 잃었다.
고청접은 하인에게 서둘러 그녀를 방에 눕힌 뒤, 남월각에 이 소식을 전하라고 분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천범이 월규와 함께 벽하각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신을 잃은 창백한 월향의 모습에 백천범은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그녀에게 월향과 월규는 노비가 아니라 자매였다. 자신에게 진심을 다하는 두 사람에게 늘 최선을 다해 마음을 보답하려 한 그녀였으니 이런 꼴이 된 월규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청접이 그녀를 위로했다.
“왕비 마마, 너무 심려 마십시오. 월향은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많이 놀란 나머지 정신을 잃은 듯합니다. 입추가 지나 물이 차가워졌으니 병이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어서 의원을 불러 진맥을 받는 게 좋겠습니다.”
정신이 퍼뜩 든 백천범은 서둘러 월향의 손을 주무르며 월규에게 말했다.
“어서, 어서 의원을 불러와.”
고청접이 말했다.
“지금은 측왕비께서 집안일을 돌보시니 의원을 부르는 것도 우선 측왕비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너무 조급하게 행동하시면 괜한 트집을 잡힐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규야, 우선 측왕비께 말씀드려.”
월규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날이 어두워지고 바람까지 불자 몸이 으스스 떨려 왔다. 월규는 그제야 냉정을 되찾았다. 방금 전 월향의 소식을 접한 그녀와 백천범은 깜짝 놀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멀쩡하던 월향이 왜 갑자기 물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단 말인가? 당근을 사려던 돈을 되찾기 위해 측왕비를 찾아갔을 뿐인데 왜 명호에서 발견되었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생사를 고민했단 말인가?
낙성각에 도착한 월규는 수원상의 눈치를 살피며 월향이 병이나 왕비 마마께서 의원을 부르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고했다.
이미 월향의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던 수원상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잿빛이 되어 있었다. 혼을 좀 냈다고 곧장 물에 뛰어들다니! 대체 이게 무슨 심보란 말인가? 손찌검을 한 것도 아니거늘…….
노비를 죽게 한 악랄한 주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간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체면을 가장 중시하는 그녀가 체면을 잃는다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치가 떨릴 만큼 화가 난 그녀였지만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더니, 어찌 병이 났다는 것이냐?”
월규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아마 밤중에 이불을 걷어차 감기에 걸린 것 같습니다. 지금은 상태가 좋지 않아 왕비 마마께서 소인에게 서둘러 의원을 불러오라 분부하셨습니다.”
수원상이 퍽 소리가 나도록 탁자를 내리치더니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허튼소리! 월향이 명호에 뛰어들어 지금 벽하각에 있다는 소식은 본비도 이미 알고 있다. 밤중에 이불을 걷어차 감기에 걸리다니, 월향도 너도 온통 허튼소리뿐이구나. 왕비 마마도 너희 같은 뻔뻔한 애들에게 나쁜 물이 들까 참으로 걱정이다.”
월규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더욱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측왕비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월향이 물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이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닌지라 측왕비 마마의 귀를 더럽힐까 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란 걸 너도 아는 것이냐?”
수원상이 냉소를 지었다.
“어찌 죽으려 뛰어들었단 말이냐? 내가 몇 마디 혼을 내었다고? 그런 노비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냐? 주인은 멀쩡한데 노비가 죽으려 하다니, 진작에 내쫓아야 했다.”
“측왕비 마마, 월향을 내쫓으시더라도 병이 다 나은 뒤에 내쫓아 주십시오. 지금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당장 의원을 부르지 않았다가 혹여 월향이 정말…….”
“본비를 위협하지 말거라. 월향의 상태를 확인한 하인이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더구나. 명이 참으로 질긴 아이다.”
수원상은 찻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들이켰다.
“크게 놀랐을 것이니 한숨 자고 나면 좋아질 것이다. 의원까지 부를 것 없다.”
월규가 흠칫 놀라 입을 열었다.
“측왕비 마마, 월향은 정말 상태가 좋지 않사옵니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왕비 마마께서…….”
“입만 열면 왕비, 왕비. 왕비 마마께서 아직 나이가 어려 괜스레 조급해하시는 것뿐이다. 어서 가 보거라. 본비는 피곤하여 잠시 눈 좀 붙여야겠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소로 향했다.
월규가 그녀의 뒤를 몇 걸음 따랐지만 이내 추문에게 가로막혔다. 추문은 월규를 비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이더니 이내 수원상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화가 난 월규는 몇 차례 발을 굴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 다시 벽하각으로 돌아와 백천범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백천범이 대꾸도 하기 전 고청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월향이 이 꼴이 되었는데 의원을 부르지 말라니! 정말 애를 죽게 할 심산이시란 말이냐?”
월규가 말했다.
“왕비 마마,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습니다. 월향이 돈을 받으러 찾아갔을 때, 측왕비께서 분명 돈을 줄 수 없다며 월향을 혼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월향이 나쁜 마음을 먹어 명호에 뛰어든 것이겠지요.
이 일로 더 화가 난 측왕비께서 의원을 부르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왕비 마마, 마마께서 직접 가 보셔야겠습니다. 측왕비께서 마마의 말씀까지 거절하진 못하시겠지요.”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다녀와야겠다.”
백천범은 말을 마친 뒤 쏜살같이 뛰어갔다.
월규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측왕비께서 왕비 마마까지 난처하게 하시면 안 되는데.”
고청접이 말했다.
“측왕비께서 어찌 감히 왕비 마마를 난처하게 하겠느냐? 우선 내가 생강차를 준비하라 이를 테니 월향이 깨어나는 대로 서둘러 먹이거라. 몸에 찬기가 들어 큰 병이라도 들었다간 정말 큰일이다.”
그녀의 말에 크게 감격한 월규는 절을 올리며 말했다.
“서왕비 마마,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마께서는 월향을 구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소인이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한 일이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 * *
쏜살같이 낙성각에 도착한 백천범은 눈앞에 보이는 무수리를 붙잡고 물었다.
“측왕비는?”
무수리가 말했다.
“측왕비 마마께서는 침소에서 잠시 주무십니다.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백천범은 곧장 그녀의 침소로 향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추문이 방을 나와 그녀를 막아섰다.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저희 마마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금방 잠이 드셨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백천범은 단순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방금 전 월규가 다녀갔을 때만 해도 멀쩡하다가 갑자기 몸이 안 좋다니! 일부러 그녀를 피하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눈썹을 치켜세운 추문의 표정에서 담담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추문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던 백천범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추문이 서둘러 그녀 뒤를 쫓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이렇게 함부로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그곳은 저희 마마의 침소입니다. 왕비 마마, 그리 하시면…….”
백천범은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침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원상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백천범이 성큼성큼 다가가 말했다.
“원상 언니, 몸이 안 좋다면서요. 어서 의원을 불러 진맥을 받으세요. 마침 월향도 몸이 좋지 않으니 의원에게 둘 다 치료해 달라고 하면 되겠네요.”
목청을 높여 큰 소리로 떠드는 백천범 때문에 수원상은 안 들리는 척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앉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늘 앓는 고질병이라 그리 문제 될 것 없습니다.”
“별문제 아니라면 어서 지시서 좀 써 주세요. 하인에게 의원을 불러오라고 해야 하거든요.”
수원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월향 때문이신지요. 방금 월규가 다녀갔습니다. 왕비 마마,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왕비 마마의 시녀들은 너무 버릇이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너무 나약하기까지 합니다.
월향이 왜 명호에 뛰어들었는지요? 제가 몇 마디 혼을 내었다고 그런 것이 아닙니까? 주인이 몇 마디 혼을 냈다고 물에 뛰어들다니, 다른 노비들이 보고 배우면 이 저택이 어찌 되겠습니까?”
“왜 월향이를 혼냈는데요? 어떻게 혼을 냈길래 월향이 죽겠다고 물에 뛰어든 것인데요?”
백천범이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