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가을 문턱에 들어서자 며칠 동안 비가 조금 내렸다. 물소 가죽으로 만든 천막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땅에 깔린 두꺼운 천 위를 걸을 때마다 부드러운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묵용감은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불안한 기운이 계속 그를 엄습했다.
저택을 떠나기 전날, 그는 마침내 후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가진 못했고, 꽃무늬가 새겨진 돌길을 따라 명호 정자로 향할 뿐이었다.
강직한 성격의 그가 후원을 찾아간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노력이었다. 백천범이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면 그를 찾아와 먼저 인사를 건넸을 것이었다. 설령 그게 형식적인 행동이라 해도 좋았다.
그가 후원을 찾았을 때 그녀도 분명 소식을 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자에서 한나절이나 기다려도 그녀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태양이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위로 안개가 밀려오듯 어둠이 내려앉았다. 결국 그는 절망감에 가득 차 한숨을 내쉬고는 천 근 같은 발걸음을 옮겨 회림각으로 돌아갔다.
남월각을 지나쳤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어두워지니 노랑이를 그만 둥지로 들여보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또랑또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쓴웃음만 지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그는 닭 한 마리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닭에게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으면서 내일이면 먼 여정을 떠날 자신의 지아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 일로 또다시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학평관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막사幕舍에 소식도 전하지 말라고 분부했다. 그녀와 관련된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주 사소한 소식마저 끊고, 그녀를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눈치 없는 학평관은 며칠 동안 정말로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고 괴로워졌다.
그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막사 가장자리에 난 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대열을 이룬 사병들이 빗속을 뚫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막사 주변을 훤히 밝히는 등불이 활활 타오르며 옅은 송유松油 냄새를 풍겼다. 군사들이 묵는 군영은 사방에 분산되어 있었고, 황제와 그의 막사는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어쨌든 후회가 되긴 했다. 떠나기 전 그녀와 몇 마디라도 나누었다면 지금까지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분명 이렇게 밤낮으로 몸을 혹사시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긴 한숨을 내뱉는데 가동이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왕야,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이내 한 소태감이 들어와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 황제 폐하께서 전하들의 활 솜씨를 살펴 달라고 하십니다.”
이번 순행에는 태자와 몇몇 황자들이 함께했다. 황제는 엄격한 아비였기 때문에 황자들도 엄하게 가르쳤다. 순행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무리 비바람이 불지언정 평가는 평가였다. 만약 꾀를 부리고 뺀질댄다면 궁으로 돌아가 유실幽室에서 벽을 보는 벌을 받아야 했다.
황자들은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매를 맞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훈계를 듣거나 벽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들이 전부였다. 그들의 모든 언행은 항상 신중해야 했고,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어야 했다. 아주 조금의 잘못도 저질러서는 안 되었다.
영구는 묵용감에게 도료가 칠해진 우의를 걸쳐 준 뒤, 삿갓과 사슴 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장화까지 준비해 주었다.
광활한 풀밭에는 과녁이 놓여 있었고, 여덟 살의 태자가 활시위를 당긴 채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그 기세만큼은 얕볼 수 없었다.
묵용감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관찰했다. 태자는 한쪽 눈을 감고 반대쪽 눈으로 빗속을 꿰뚫을 만큼 날카로운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를 놓는 순간 기다란 화살이 핑 소리를 내며 과녁 정중앙에 꽂혔다.
묵용감이 감탄하며 그를 칭찬했다.
태자와 여러 황자들은 그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다.
황제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짐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수준인데, 네가 태자의 체면을 과하게 세워 주는 듯하구나.”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태자의 솜씨가 지난번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마땅히 칭찬을 들어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진지한 표정의 태자는 예를 다해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과찬이십니다, 황숙皇叔.”
어린 꼬마가 어른 흉내를 내니 묵용감은 또 왜인지 모르게 백천범이 떠올랐고 이내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 어린 계집은 정말 골칫덩어리가 틀림없었다. 지금껏 그는 이렇게 마음을 애태운 일이 없었다. 황제 앞에서마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다니.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잘 먹고 잘 자고 있긴 한 걸까. 가끔 자신을 생각하긴 할까. 입추가 지나 날이 서늘해졌는데 시녀들이 이불은 바꿔 주었을까…….
생각에 잠긴 그가 남몰래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대장군 초왕이 점점 수다스러운 여인네의 모습으로 변해 가다니, 그깟 정 하나 때문에 그의 위엄이 바닥을 칠 기세였다.
“셋째야, 셋째야.”
황제가 연달아 두 차례나 그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이 애들이 우리 동월국 군신의 활솜씨를 보고 싶다는구나. 한번 보여 주는 게 어떻겠느냐?”
묵용감은 아무 말도 없이 옆에 있던 하인에게 활과 화살통을 건네받았다. 화살통을 어깨에 멘 그는 곧장 활을 하나 뽑아 들어 활시위를 당겼다.
그는 앞으로 세 걸음을 걸으며 조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활을 쏘았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또다시 활을 꺼내 활시위를 당겨 활을 쏘고, 또다시 걸음을 옮기며 활을 쏘았다.
그렇게 다섯 걸음을 걸으며 총 다섯 개의 활을 쏘았고, 모든 활이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그 모습에 황자들은 박수와 환호를 금치 못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보았느냐, 셋째 황숙의 실력이야말로 대단한 것이다. 열심히 연습하거라. 아직 너희들은 황숙에 비해 한참 모자란 수준이니.”
황자들은 공손히 가르침을 받았다.
“부황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가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황제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동생들을 데리고 어서 들어가 보거라.”
태자는 대답을 올린 뒤, 황자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묵용감은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훌륭한 교육 방법이 이 아우는 참으로 부럽습니다.”
황제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막사로 향했다.
“짐이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 것이냐? 왕비를 한 번에 둘이나 들인 지가 언젠데 어찌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냐?
짐도 네가 그 일을 태만하게 여긴다는 것 잘 안다. 하지만 후대를 잇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다. 제사상의 향이 꺼질 수는 없지 않느냐. 이번에 돌아가거든 부지런히 힘써 보거라. 짐이 태의원太醫院에 분부하여 네게 기력을 보충하는 대력환大力丸을 보내라…….”
묵용감은 새빨개진 얼굴로 황제의 말을 끊었다.
“폐하, 제발 그런 말씀은 아껴 주십시오.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군주이십니다. 이런 일에까지 그리 마음을 쓰시다니요. 대력환까지 언급하시다니, 이 아우, 정말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하는 말이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왕비들과 자주 만나 서로 감정을 나누어야지. 감정도 없이 어찌 그런 일에 흥미가 생기겠느냐? 나는 황제이자 네 형이기도 하다. 그러니 너의 규방 일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은…….”
“폐하!”
묵용감이 또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또다시 이 일로 물고 늘어지시면 관직을 그만둘 것입니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일 좀 언급했다고 아주 불같이 성을 내는구나.”
황제가 탄식했다.
“짐이 널 위해 어렵사리 두 왕비를 구해 주었는데도, 너는 시종일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몇 마디 잔소리를 했기로서니, 그게 그리도 듣기 싫은 것이냐?”
“예, 폐하께서는 잔소리하십시오. 저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릴 뿐입니다.”
“이놈이 정말…….”
황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후대를 잇지 않는 게 가장 큰 불효이니라. 네 스스로 잘 생각해 보거라.”
* * *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 온 세상이 희뿌옇게 물들었다. 날씨 탓인지 다들 기운 없이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구구를 품에 안은 백천범은 부드러운 장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때때로 구구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마치 정신 수양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손동작을 멈추었고,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잠이 든 듯했다.
월향이 조심스레 다가와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별안간 눈을 번쩍 떴고, 그 모습에 월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왕비 마마, 주무시는 것이 아니셨습니까?”
물론 잠이 들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잠결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월향이 빈손으로 서 있자 백천범이 물었다.
“또 없는 거야?”
월향이 고개를 저었다.
“부엌 하인들 말이 지금은 필요한 양을 일일이 따져 재료를 구입하기 때문에 여유분이 없다고 합니다. 제가 보니 관리인도 주기 싫어서 그리하는 건 아닌 듯 보였습니다. 측왕비께 찾아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됐어. 측왕비는 이 집 전체를 관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이렇게 작은 일로 찾아갈 순 없지. 밖에서 사는 게 좋겠어. 물건을 사 오는 하인에게는 말했어?”
“예. 전錢씨란 자가 물건을 사들이는 하인인데, 규율에 어긋난다며 별로 내켜 하지 않았습니다. 규율에 어긋난다니, 예전에 시녀들이 연지나 분첩을 살 때, 늘 그자에게 부탁을 했었는데 말입니다.
소인이 보기에는 심부름 값을 얹어 주겠다고 해야 재빨리 승낙할 듯합니다. 다들 그자를 돈구멍이라고 부르던데… 정말 돈밖에 모르는 사람인가 봅니다. 이런 사람이 물건 매입을 담당하다니, 조만간 일을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원상 언니에게 말해 줘야지. 그래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