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46)화 (145/1,192)

제146화

추문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저 애가 먼저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하였는데?”

“저 애가…….”

추문은 말하기 부끄러운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왕비 마마께서 저 애에게 직접 물어보시고, 제가 손을 댈 만했는지 판단해 주십시오.”

백천범은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월규를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도 온통 빨개진 게 무슨 나쁜 말을 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만약 집안이나 가족 욕을 했다면 추문의 손이 날아간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백천범이 월규에게 물었다.

“추문에게 뭐라고 한 것이냐?”

월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우, 우쭐대는 모습에 소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본인을 뭐라고 여기는 것이냐고, 어린 마마님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왕야 눈에 들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월규가 사실대로 털어놓자 뒤에 있던 시녀 몇 명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추문이 화를 내며 말했다.

“왕비 마마, 그것 보십시오. 차라리 절 헐뜯었다면 참았을 것입니다. 헌데 왕야를 들먹거리다니요. 이것은 불경죄가 아니옵니까? 뺨 한 대는 너무 가벼운 처사일 정도입니다.”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했던 수원상도 그녀의 말에 곧장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어찌 그런 말을 뱉을 수 있단 말이냐? 왕야께 말씀드려 곤장 서른 대를 맞아야 속이 후련하겠느냐?”

월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 난 붉은 손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백천범은 동떨어진 화제에 이목이 집중되자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 일은 나중에 얘기하고, 우선 월규를 때린 일부터 얘기하자. 추문아, 그래도 다른 이를 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야. 먼저 월규한테 사과하거라.”

이런 상황에서 사과를 하고 싶을 리 없던 추문은 슬쩍 수원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차를 들이켜는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꾀가 떠오른 추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 애가 제게 먼저 사과해야 옳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입에 담으랍니까?”

월규가 말했다.

“이 일은 네가 일으킨 거야. 측비 마마께 고하기만 했어도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네가 일부러 일을 이렇게…….”

“헛소리하지 마.”

추문이 목청을 높였다.

“주인께서 쉬고 계시는데 내가 대신 묻지도 못하는 것이냐? 내게 말해 보라고 했다고 갑자기 성을 내다니, 이 일은 다…….”

두 시녀가 말싸움을 하자 백천범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

“그만!”

그러더니 추문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네가 먼저 사람을 때렸으니 먼저 사과를 해야 한다.”

추문은 다른 곳만 바라본 채 그녀를 상대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다시 물었다.

“사과 안 할 것이냐?”

추문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두 차례 휘갈겼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은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수원상이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언니, 언니의 시녀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치는 법을 몰라 제가 대신 가르쳐 주었어요.”

몸집은 작았지만 힘은 셌던 그녀였기에 추문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붉게 부어오른 추문은 두 볼을 감싸더니 왈칵 울음을 쏟으며 수원상의 발밑에 엎드려 고했다.

“마마, 억울하옵니다!”

수원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 또한 화가 치밀었지만, 왕비인 백천범에게 똑같이 뺨을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하인들 앞에서 백천범의 체면을 깎았다가 나중에 초왕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잘못이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수원상은 추문에게 호통쳤다.

“형편없는 것 같으니라고. 억울하다니! 왕비 마마께서 잘못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반성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것이냐?”

그녀는 백천범이 다시 손을 들기만 바랐다. 묵용감이 돌아오면 낱낱이 고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악독한 여인이라면 모든 사내들이 질색하기 마련이었다. 사람을 매섭게 때리는 모습을 보니 백천범은 약한 노비를 괴롭히는 악랄한 주인이 틀림없었다.

추문은 여전히 엉엉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 백천범이 천천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울지 말거라. 다음부터 주의하면 되지. 무작정 손부터 날아갈 게 아니라 월규가 듣기 거슬리는 말을 하면 월규에게 너도 똑같이 말해 주면 돼.”

“…….”

“…….”

“…….”

추문도, 수원상도, 월규도, 그 자리에 있던 하인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추문이 아무 미동도 없자 백천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걱정 말거라. 나는 누구보다 공평한 사람이니까.”

그녀는 월규 앞에 다가가더니 한 손은 허리에 얹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어린 마마님? 그것도 왕야의 눈에 들어야 가능한 일이지!”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추문에게 말했다.

“내가 대신 말해 주었으니 이제 되었지?”

“…….”

“…….”

“…….”

수원상과 모든 하인들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백천범은 남월각 시녀들에게 손짓하더니 당당한 모습으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수원상과 낙성각 시녀들은 홀연히 떠나는 백천범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 *

남월각에 돌아온 월향은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웃음이 터져 탁자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왕비 마마,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거의 다 갚아 준 듯합니다. 기홍 언니와 녹하 언니가 왕비 마마를 잘 지켜 드리라고 늘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오늘 보니 두 언니가 걱정이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단하신 주인이라면 앞으로 저희도 후원에서 어깨 좀 펴고 다녀도 되겠습니다.”

얼굴이 많이 가라앉은 월규는 조금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괜스레 소인 때문에 측왕비의 미움을 사셔서 어찌한단 말입니까. 혹여 그들이 왕비 마마께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다면 소인은 정말…….”

“그럴 일 없어.”

백천범이 품에 설구를 안아 들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추문은 추문이고 원상 언니는 원상 언니야. 언니는 옳고 그릇된 걸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안 그럼 왕야께서 이렇게 식구가 많은 저택을 어떻게 맡기셨겠어.”

월규가 말했다.

“사실 왕비 마마께서 정비이시니 마마께 맡기셨어야 합니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늘 현자가 높은 지위를 얻는 법이니까. 나는 아직 부족한 게 많잖아. 원상 언니가 관리를 잘하는지 종종 앞뜰에 가면 하인들끼리 언니 얘기를 하면서 진심을 다하더라고. 그게 다 언니가 공정하게 일을 잘 처리한다는 뜻이겠지.”

월규가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되었으니 마마께서도 무방비 상태로 계실 수만은 없습니다. 마마께서 측왕비의 가장 가까운 시녀를 때리셨으니 어쨌든 체면을 심하게 깎으신 것입니다. 왕비 마마, 측왕비께서 아량을 가지고 기분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늘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응.”

백천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다 생각해 둔 게 있어.”

* * *

두 처소에서 거의 패싸움이 벌어질 뻔했다는 소식은 벽하각에도 곧장 전해졌다.

자초는 꼭 직접 상황을 목격한 사람처럼 생생하게 소식을 전했다.

“왕비가 아주 매섭고 빠르게 손을 날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민첩한 추문도 곧바로 반응을 보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어찌나 서럽게 울어 대는지 거의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번 일로 왕비가 이름을 제대로 날렸습니다. 그동안은 무르고 속이기 쉬운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사람을 때릴 땐 아주 똑 부러지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왕비는 진짜 실력을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습니다.”

고청접은 허리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그림 속 인물의 옷 주름을 그려 넣고 있었다. 자초가 신이 난 표정으로 떠들어도 그녀의 작품 세계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듯했다.

마지막 붓질까지 마무리한 뒤에야 허리를 편 그녀는 붓을 내려놓고 한쪽에 놓인 구리 대야에 손을 씻었다. 그리고는 자초에게 수건을 건네받아 손을 닦은 뒤, 찻잔을 집어 들며 물었다.

“측왕비는 뭐라고 하더냐?”

“왕비가 직접 노비를 훈계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마음속으로만 화를 삭였겠지요. 그저 추문을 혼내는 시늉만 했다고 합니다.”

고청접이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이번 일로 두 사람 사이에 원한이 생겼겠구나. 둘 다 보통내기가 아니니 좀 더 지켜봐야겠다. 재미있는 일은 늘 막바지에 일어나는 법이지.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그녀가 그림 속 인물을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에 기개가 넘치는 장군이었다. 갑옷을 입은 그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긴 창을 손에 쥔 채 군마 앞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먹이 다 말랐는지 확인해 보고 그만 정리하거라.”

자초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그림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가볍게 입김을 불었다.

“다 말랐습니다.”

그녀는 그림을 돌돌 말더니 벽장에서 사각형 모양의 바구니를 꺼냈다. 그림을 말아 보관하는 바구니였다. 안에는 온통 묵용감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청접은 바구니를 다시 벽장에 넣는 자초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초왕이 얼마나 오래 이곳을 찾지 않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흐릿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선명해졌다.

사실 며칠 전 그를 본 적 있었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봐야만 했다. 방 안에 있는 그녀에게 시녀가 찾아와 묵용감이 명호 정자에 있다고 귀띔을 해 주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먼 곳으로 떠나기 전 부부의 도리를 생각해 그가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기쁜 마음으로 치장한 뒤 거실에 앉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고 있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러 다녀온 시녀는 그가 정자에 서서 멍하니 먼 곳만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방은 정자와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레 창가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석양이 지자 그의 풍채는 더욱 위엄 있어 보였고, 준수한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해 보였다. 정자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고,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꼭 망부석 같았다.

그는 그녀의 지아비였지만 그녀의 남자는 아니었다. 시집 온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아직 그와 부부 간의 결실도 맺지 못했다. 수원상과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 또한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초왕에게는 오직 백천범, 그 자그마한 계집뿐이었다. 백천범이 있는 한 그녀와 수원상의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에 감추어 둔 생각을 어느 누구에도 털어놓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걱정 없이 평온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수원상보다 더 백천범을 증오했다.

그녀도 묵용감과 백천범이 사이가 좋지 않은 시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초왕이 후원을 찾지 않고, 왕비도 회림각에 발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정자에 서 있던 초왕의 모습도 꼭 넋이 나간 사람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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