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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45)화 (144/1,192)

제145화

월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들 더 높은 지위를 얻은 주인에게 아첨하는 것이었다.

초왕과 왕비의 사이가 좋을 때만 해도 왕비에게 아첨하려고 기를 쓰더니, 요즘은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가 측왕비가 집안일을 맡자 벌떼처럼 그녀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비는 초왕이 애지중지하는 사람이었다. 초왕이 돌아오면 분명 그런 하인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줄 것이었다.

사실 묵용감이 백천범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는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만 알 수 있었다. 거리가 먼 곳의 하인들은 그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행동했는데, 소문의 내용이 대체로 사실과 일치하긴 했다.

낙성각에 들어선 월규는 때마침 밖으로 나오는 추문과 마주쳤다. 추문이 뜨뜻미지근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 월규 아가씨가 아닙니까? 어쩐 일로 이곳을 다 찾으셨는지요? 설마 처소를 착각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월규는 가슴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기괴한 말투에 기분이 언짢아진 탓이었다.

“측왕비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추문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월규 아가씨는 한낱 노비가 아닙니까? 우리 주인 마마께서는 만나고 싶다고 아무나 그리 쉬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월규는 스스로를 노비라 일컫긴 했지만, 주인 앞에서나 칭하는 말이었다.

일개 시녀가, 그것도 밖에서 굴러들어 온 주제에 그녀를 노비라 일컫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회림각에 있을 때 늘 매몰차게 말하던 녹하마저 단 한 번도 그녀를 노비라 칭한 적 없었다.

월규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꼭 본인은 노비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요. 노비도 노비 나름이지요. 저는 남월각의 노비, 그쪽은 낙성각의 노비가 아닙니까? 누가 누구 앞에서 낯을 세워야 하는지는 너무나 뻔한 일인데 말입니다.”

추문도 냉소를 지었다.

“그리 높으신 남월각 노비께서 우리 낙성각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월규는 말문이 막혔다. 범도 산 밖에서는 개한테 물린다더니, 가장 존귀한 신분인 왕비가 지위를 잃으니 당근 몇 개를 얻으려 측왕비에게 청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추문과 얽히고 싶지 않던 월규는 서둘러 해야 할 말을 꺼냈다.

“소인이 측왕비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아가씨께서 좀 전해 주십시오.”

추문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싸움닭 같이 굴더니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두 시녀의 말소리가 작지 않았으니 수원상도 분명 들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 또한 월규의 콧대를 꺾고 싶은 것이었다.

추문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마마께서는 잠시 휴식을 취하시고 계십니다. 할 말이 있거든 제게 해 주십시오.”

월규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한낱 노비가 뭐라도 되는 양 행동하다니. 회림각 무수리 출신이자 정비의 시녀인 월규에게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그쪽에게 말할 수는 없지요.”

월규는 코웃음을 치며 추문을 지나쳐 곧장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추문은 곧장 그녀를 잡아끌며 매섭게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함부로 들어가려 하다니요? 대체 누구에게 규율을 배웠단 말입니까?”

월향처럼 온화하지만은 않던 월규는 강경하게 맞서는 데 능숙했다. 그녀는 추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대체 어디서 규율을 배웠단 말입니까? 측왕비를 뵙고 싶다는데 들어가 여쭙지도 않고 끝까지 막아서다니요? 대체 스스로를 뭐라 여기는 것입니까? 어린 마마님? 그것도 왕야 눈에 들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화가 난 추문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휘갈겼다. 월규는 잠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힘껏 뺨을 맞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월규는 이내 추문의 머리를 잡고 바닥으로 잡아끌었다. 그녀들이 마당에서 한데 뒤엉켰다.

낙성각의 다른 하인들이 곧장 두 시녀를 에워쌌다. 누군가는 서둘러 측왕비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누군가는 싸움을 말리는 척 추문을 도와 함께 월규를 때렸다.

수원상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더니 큰 소리로 호통쳤다.

“당장 멈추거라!”

대갓집 규수 출신인 그녀가 화를 내자 제법 위엄이 느껴졌다. 추문과 월규는 곧장 싸움을 멈추고는 초라해진 몰골로 몸을 일으켰다.

수원상은 한쪽 편만 들지 않고 두 사람을 똑같이 질책한 뒤, 보름치의 봉급을 삭감하는 벌을 내렸다. 두 시녀의 싸움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 * *

월규는 울며 남월각으로 뛰어 들어왔다.

낙성각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어린 무수리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긴 했지만 설마 월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초라한 행색으로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무수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월규 언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월규가 거실로 뛰어 들어와 백천범에게 무릎을 꿇었다.

“왕비 마마, 소인 억울하옵니다!”

토끼와 놀아 주고 있던 백천범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는 급히 그녀를 일으키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누가 이런 거야?”

백천범은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주변 사람이 당하는 꼴은 절대 참지 못했다. 월규의 모습에 그녀는 자신이 맞은 것보다 더한 분노를 느꼈다.

월규가 울면서 사실을 털어놓자 백천범은 더욱 화가 나 이마에 핏줄이 설 정도였다. 그녀는 쏜살같이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탁자에 무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표창, 탄환, 비수, 새총 등등… 각양각색의 무기가 탁자에 놓였다.

시녀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서로 시선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설마 전투라도 벌이려는 것이란 말인가? 월향이 겁에 질려 말했다.

“왕비 마마, 이게 다 무엇입니까? 이치에 맞게 따지면 되는 것을 전투라도 하시려는 생각이십니까?”

백천범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치는 무슨 이치, 맞서 싸워야지.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리다니, 살기 싫은가 보지?”

우두산 도적 소굴에서 지냈던 적이 있어서인지 백천범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이를 갈며 험한 말을 내뱉으니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그녀는 인원수를 센 뒤, 시녀들에게 무기를 쥐여 주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겁도 많았고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정말 패싸움을 시켰다간 벼랑 끝으로 등을 떠미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다들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월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이것은 그리 좋지 않은 방법인 듯합니다. 저택 규율에 싸움을 하는 자는 내쫓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다 함께…….”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왕야가 안 계시잖아. 호랑이가 없는 굴에 토끼가 왕 노릇한다는 말도 있는데, 뭐. 우선 싸우고 난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면 돼.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내가 왕야께 죄를 고할게. 곤장이든 채찍이든 무슨 벌을 받아도 상관없어.”

그녀의 말에 월규는 조금 주저되었다. 추문에게 맞아 이성을 잃은 그녀였지만, 왕비가 자신 때문에 앞장서다 괜스레 함께 휘말린다면 더 큰일이 생길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초왕이 왕비를 냉대하고 있는 이 시기에 일을 크게 만들면 안 되었다.

“왕비 마마, 월향 말이 맞습니다. 그만 두십시오. 일을 크게 만들면 다 같이 해를 입을 것입니다.”

백천범은 시녀들을 훑어보더니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너희는 손 떼. 왕야께서 인정사정없이 쫓아내실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가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월규가 맞았는데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어. 반드시 공정하게 처리해야 해. 다 같이 찾아가 싸우는 것 대신 우리도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려 주자.”

싸우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 여긴 왕비는 서둘러 앞장섰고, 별로 무서울 것 없던 시녀들도 당당하게 백천범을 따라 낙성각으로 들어섰다.

이 소식을 접한 수원상이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백천범 뒤에 서 있는 시녀들을 흘깃 살피더니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백천범은 수원상에게 평소처럼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언니, 방금 이곳에서 추문이라는 시녀가 월규를 때렸다기에 잠시 얘기 좀 하려고 찾아왔어요.”

수원상이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처리했습니다. 서로 의견이 달라 신경전을 벌이다 싸움을 했다더군요. 저 또한 누구 하나 편들지 않고 두 시녀 모두에게 보름치의 봉급을 벌금으로 책정하였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이렇게 처리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저는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죄의 경중을 따져야 하니까 말이에요. 추문이 먼저 월규를 때리지만 않았어도 그 뒷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똑같은 금액을 내라는 건 월규에게 불공평한 처사예요.”

“그럼 왕비 마마께서는 어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추문은요? 좀 불러 주세요.”

“월규에게 맞아 방에서 울고 있습니다.”

백천범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먼저 사람을 때려 놓고 울다니요, 우리 월규도 안 우는데 말이에요.”

수원상은 당최 그녀의 사고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다 큰 여인들 중 누가 그리 싸움을 즐겨 한다고,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백천범이 방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추문이 나오기 싫다면 제가 들어갈게요. 그 애가 심하게 다쳤는지 우리 월규가 심하게 다쳤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수원상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들도 우르르 몰려 방 앞을 둘러쌌다.

백천범이 추문을 만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기에 수원상은 무수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추문을 데려오라 분부했다.

방 안에 있던 추문은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백천범이 월규의 일로 자신을 찾아온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무서울 것 없었던 추문은 무수리가 방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스스로 밖을 나왔다.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추문을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백천범은 곧장 월규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 깜빡였다. 그녀의 용맹함에 대한 칭찬이었다.

수원상은 아무 말도 않고 백천범이 마음대로 소란을 피울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시끄럽게 굴수록 더 좋았다. 초왕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가 낱낱이 고자질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양 없는 여인이 정비 자리에 앉아 있으니 초왕도 분명 골머리를 앓을 것이었다.

그러나 백천범은 단정하게 앉아 정비다운 모습을 뽐냈다.

“추문아, 네가 먼저 월규에게 손을 댄 것이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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