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기홍이 발을 걷어 올리자 수원상이 사뿐거리며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앞에서 인사를 올린 뒤 입을 열었다.
“소첩 왕야를 뵈옵니다. 어인 일로 소첩을 부르셨는지요,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묵용감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본왕은 내일 황제 폐하와 함께 순행을 떠나야 하오. 후원을 잘 좀 부탁하오.”
수원상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드러났다.
“왕야, 얼마나 오래 가셔야 하는 것입니까?”
그녀의 표정에 묵용감은 문득 백천범을 떠올렸다. 그 배은망덕한 계집아이에게서 저런 표정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이 그렇게나 잘해 줬는데…….
그의 기분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참으로 양심도 없는 계집이었다.
“최소 열흘, 길면 보름 정도 될 것이오.”
그가 말했다.
“중추 전에는 올 수 있을 것이오.”
수원상이 한숨을 내뱉었다.
“왕야, 밖에서는 건강에 더욱 유의하셔야 합니다. 저택은 걱정 마시옵소서. 소첩이 잘 돌보겠습니다.”
“학평관보다 더 세심히 관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 측왕비가 수고가 많소.”
“왕야를 돕는 것은 소첩이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이곳은 소첩의 집이기도 하니 최선을 다해 돌볼 것입니다.”
묵용감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여인이라면 어떤 사내라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것이었다. 현명한 데다 언행과 처신도 늘 적절했고 집안일도 곧잘 관리했다. 만약 백천범이 없었다면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린 이상 그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자신을 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며 물었다.
“측왕비는 올해 몇 살이오?”
그의 말에 수원상은 조금 우습기도,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시집온 지 한 달이 되었는데 아직 그녀의 나이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소첩 올해 세는나이로 열여섯입니다.”
“몇 월에 태어났소?”
“소첩 음력 섣달에 태어났습니다.”
묵용감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더 어렸다. 그녀만 원한다면 좋은 신랑감을 찾아봐 줄 수 있었다. 맨 처음 계획했던 대로 남매가 되어 성대하게 혼사를 치러 줄 수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갑작스레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짙은 눈썹과 커다란 눈, 위엄 있는 표정을 가진 자였다.
그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또 이 자식이라니! 감히 백천범에게 기웃거리려 하다니,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수원상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대학사의 적녀이자 장녀인 데다가 외모도 아리따웠고 현명하기까지 하니 구하기 어려운 신붓감이었다. 비록 재혼이긴 했지만 사장풍에게도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혼사였다.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높아 보이자 그의 얼굴에 옅은 화색이 돌았다.
수원상은 그런 그의 표정에 의아하면서도 조금 부끄러웠다. 갑작스레 생일을 물은 그가 이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걸 보니 아마 선물을 주려는 듯했다.
그녀는 금은보석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토끼 한 쌍을 선물해 준다면 그녀는 충분히 만족할 것이었다. 돈을 얼마나 쓰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그녀도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동물을 한창 좋아할 나이였다. 적막한 후원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분명 덜 답답할 것이었다. 한참이나 속으로 생각한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소첩, 오늘 처소를 나서는데 왕비 마마와 마주쳤습니다.”
사장풍에 대해 고심하고 있던 묵용감은 갑작스레 들려온 왕비라는 두 글자에 눈을 반짝였다. 이미 머릿속이 하얘진 그였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대꾸했다.
“오, 그랬소? 본왕은 며칠이나 왕비를 보지 못했소. 왕비는 무얼 하고 있소?”
“토끼와 산책을 하셨습니다.”
수원상이 웃으며 말했다.
“보송보송해 보이는 게 아주 귀여웠습니다.”
토끼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그의 말투가 점점 제멋대로 변해갔다.
“어찌 측왕비와 함께 오지 않았단 말이오? 기홍이 새로운 간식을 만들었으니 먹으러 오라고 부르기까지 했거늘.”
“소첩이 왕비 마마께 함께 가자고 청하였지만, 왕비 마마께서 토끼와 산책을 해야 해서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수원상은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묵용감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그의 눈 속에서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백천범이 회림각에 오지 않자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왕비 마마께서 토끼를 받으신 날부터 어디든 함께 데리고 다니시며 진심으로 아껴 주십니다. 소첩은 마마께서 날마다 밖을 나가시기에 산책을 하시다가 왕야를 뵈러 가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날마다 밖을 나다니면서 회림각에는 발길도 주지 않다니. 묵용감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비는 어린아이지 않소. 애지중지할 게 생겼으니 거기에만 마음을 쓰느라 어디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소?”
그의 말투에 담긴 씁쓸함을 알아차린 수원상은 기쁘면서도 처량했다. 자신이 회림각을 찾지 않을 때에도 왕야가 이렇게 씁쓸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정 문제에서는 마음이 더 큰 쪽이 늘 패자였다.
두 사람은 몇 마디 시답잖은 말을 더 주고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감이 그녀를 돌려보냈다.
초왕이 순행을 간다는 소식을 알고 있던 추문이 기뻐하며 말했다.
“마마,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 왕야와 왕비께서도 서로 관계가 좋지 않으실 때이니 이참에 왕비를 끌어내리십시오.”
수원상이 그녀에게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왕야께서 특별히 저택을 잘 부탁한다고 부르셨거늘. 내가 어찌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이냐? 왕야의 신임을 잃으면 집안일마저도 더 이상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럼 어찌합니까?”
추문이 급히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왕비에게 이제 겨우 조금 소홀해지셨는데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나중엔 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마, 대감마님께서 신신당부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서 왕야의 대를 이어 정비의 자리에 오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수원상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참으로 이상하다. 왕야와 왕비께서 화해를 하신 뒤로 서비는 벽하각에만 틀어박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나. 대체 무슨 심산이란 말이냐?”
“그간 서왕비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보면 그리 쉬운 상대는 아닐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고 오시는 것은 어떠실런지요? 우리 쪽에서 손쓰기 전에 서왕비가 먼저 왕비와 맞붙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땐 그저 어부지리로 편히 구경만 하는 것이지요.”
“왕야께서 떠나시면 벽하각의 동태를 잘 살피거라.”
“예. 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수원상은 나무 그늘 아래를 천천히 걸어갔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솨솨 소리를 내며 서로 스쳤다.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 위를 바라본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무처럼 끝없는 욕심이 그녀의 마음을 자꾸만 흔들었다. 곧 다가올 긴 시간 동안 초왕의 저택은 평화롭지 않을 듯했다.
* * *
백천범은 초왕이 떠난 지 이틀째가 되어서야 소식을 전해 듣고는 월향과 월규를 원망했다.
“왕야를 배웅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나에게 말해 주지 않은 거야. 지금은 날 싫어하시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월향이 말했다.
“소인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왕야께서 내일 아침 떠나시니 인사라도 드리시라고 말입니다. 헌데 소인에게 왕야께서는 날마다 밖으로 나가시니 딱히 할 말도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소인이 이번에는 멀리 가시는 거라고도 말씀드렸지만, 사내들은 어딜 가든 문제없다며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셨지요. 나중에는 소인이 시끄럽다며 설구와 구구가 놀랄 수도 있으니 그만 나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백천범은 멍한 표정으로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렸다. 회색 토끼가 자꾸 울어 대는 통에 정신이 팔려 월향의 말에는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묵용감이 하루나 이틀씩 저택을 비우는 것은 예삿일이었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열흘이나 넘게 떠나는 것이었다니. 성 외곽을 돌며 순행하는 것은 정말 머나먼 여정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혹시라도 초왕이 화가 났다면 넉살 좋게 굴어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백천범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토끼를 데리고 놀았다. 한참 동안 토끼를 관찰한 그녀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는지 환호성을 지르며 말했다.
“구구가 왜 자꾸 우는지 알아냈어!”
월향과 월규는 그런 그녀를 흘겨보았다. 정말 팔푼이가 따로 없었다. 그녀에게 초왕은 토끼 한 마리보다도 중요치 않은 듯했다. 측비가 정말 초왕의 눈에 든다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었다.
백천범은 두 시녀가 거들떠보지도 않자 아랑곳 않고 혼자 얘기했다.
“구구는 노랑이가 무서운 거야. 노랑이가 올 때마다 울거든.”
잠시 지켜보던 월향과 월규도 그녀의 말이 정말 맞는 듯했다.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토끼와 닭이 천적이라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노랑이는 담이 크고 구구는 담이 작아서 그런 거야.”
그녀가 노랑이에게 말했다.
“노랑아, 너는 나가서 놀아. 앞으로는 토끼들 앞에 너무 자주 나타나지 말고. 토끼들이 무서워서 밥도 잘 못 먹잖아.”
그녀가 정색하자 노랑이는 얌전히 밖으로 향했다.
백천범이 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
“너희는 나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많이 먹어. 나이는 먹는데 몸집은 그대로면 어떡해.”
그녀는 그렇게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 * *
수원상은 집안일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의 지시를 받기 위해 저택 관리들은 끊임없이 낙성각을 찾았다.
그에 반해 남월각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학평관이 두어 차례 찾아와 별 탈 없이 지내는 백천범의 모습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을 뿐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저택 밖에 일이 생겨 그는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곧장 저택을 떠났다.
그가 저택을 떠나자 수원상 홀로 모든 일을 관리했다. 그 덕에 낙성각의 시녀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뭐라도 되는 양 위세를 떨었다.
백천범이 당근을 얻기 위해 앞뜰 부엌에 월규를 보냈을 때였다. 남월각의 시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부엌 하인들은 매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관리가 자리를 비웠던 탓에 부관리가 우거지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제가 드리기 싫은 게 아니라 지금은 상황이 예전 같지 않아 바늘 하나를 사더라도 구매 장부에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미리 보고를 하지 않아 기록된 게 없으니 드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당근 두 근을 받긴 했지만 음식에 넣을 것인데 왕비 마마께 드리고 나면 어찌 음식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월규가 사정하며 물었다.
“남는 것이라도 몇 개 없는지요?”
“없습니다. 아니면 측왕비께 여쭤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측왕비께서 넘겨도 좋다는 지시만 내리시면 아가씨께 모두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