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백천범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월규에게 물었다.
“나랑 차씨 중에 누가 더 빨리 달릴까? 다음에 나랑 시합하자고 해 볼까?”
월규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눈치가 없으셔도 너무 없으십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입니까? 왕야께서 왜 측왕비만 청하고, 왕비 마마는 청하지 않으셨을까요?”
백천범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오늘 왕야와 다투셨습니까?”
“아냐. 다투는 걸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데. 아까 뵈었을 때 조금 이상해 보이시긴 했어. 내 향낭을 받으시고도 별로 기뻐하지도 않으셨고.”
“아휴!”
월규가 자신의 다리를 치며 말했다.
“그것 보십시오, 월향의 말이 맞질 않습니까. 마마의 그 향낭에 고양이도 호랑이도 아닌 것이 수놓아져 있는데 왕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분명 이 일로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입니다. 어서 다른 걸로 다시 선물해 드리십시오. 생신날 이렇게 기분을 언짢게 하시다니요?”
조금 민망했던 백천범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진작 알았으면 연꽃 두 송이를 수놓은 걸 가져다드릴걸. 그건 이제 익숙해서 손가락도 안 찌르고 잘 놓는데 말이야. 호랑이는 이렇게 손가락이 다 찔려 가면서 놓은 건데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다니.”
말하다 보니 조금 성이 난 그녀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안 줄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늘 이렇게 변덕이 심하니 미움을 사지!”
깜짝 놀란 월규가 황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나, 마마. 안 드리실 거면 그냥 관두십시오. 이런 말을 또 입에 담으셨다 왕야의 귀에 들어가는 날엔 분명 화가 폭발하실 것입니다.”
* * *
차씨가 회림각으로 돌아와 상황을 보고하자 묵용감이 물었다.
“왕비는 만났느냐?”
“예. 왕비 마마께서 제게 어찌된 일인지 물으셨습니다.”
“그래?”
묵용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뭐라 묻더냐?”
“왕야께서 측왕비 마마만 부르신 거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오전만 해도 왕야께서 찾아오시기로 되어 있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묵용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뭐라 답하였느냐?”
“소인은 잘 모르옵고 왕야께서 측왕비 마마를 청하셨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또 왕비 마마와 서왕비께는 장수면을 보낼 것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한 줄기 옅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퍼지더니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왕비는 어찌 답하더냐?”
“왕비 마마께서는 장수면을 보내 주신다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먹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으니 남월각에서 장수면을 드시면서 왕야의 무병장수를 빌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문득 왕야의 안색을 살핀 차씨의 허벅지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돌연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탓에 감히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또 뭐라 하였단 말이냐?”
묵용감이 성을 내며 호통쳤다.
“꺼낸 말을 끝내지도 않다니. 곤장이라도 맞고 싶은 것이냐?”
차씨는 몸을 벌벌 떨며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제게 학평관 어르신이 기다리실 것이니 어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다냐?”
“예.”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던 화가 솟구친 묵용감은 그대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검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차씨의 얼굴을 찌르는 통에 그는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덜덜 떨었다.
묵용감은 차씨를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의 발은 마치 허공에 고정이라도 된 듯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묵용감은 기분 나쁜 소식을 가져온 머슴을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꾹꾹 참아 내며 마음을 다스렸다. 계속 이렇게 행동했다간 스스로가 경멸스러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슴에게 괜스레 분풀이를 하는 것은 그의 성향도 아니었다.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다니,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묵용감은 이 일로 며칠이나 울적해했다. 매일 저택에 돌아오면 회림각에 틀어박혀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고, 백천범이 회림각에 왔을 때에도 정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와 만나려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변덕스런 그의 태도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시기로 돌아간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위험천만한 백 승상의 집에서 자란 그녀에게 초왕의 저택은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음식과 옷도 충분했고 이제는 그녀를 해하려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 * *
묵용감이 만나 주지 않자 백천범은 금방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남월각에서 토끼를 돌보며 더 이상 회림각을 찾지 않았다.
보들보들한 털을 가진 아기 토끼들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백천범은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토끼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정원에 풀어 주었다.
하지만 아직 너무 작았던 토끼는 우리에서 꺼내 바닥에 내려놓으면 그 자리에 몸이 붙은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빨간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먹이로 무 조각을 주었지만 토끼가 먹지도 않고 끊임없이 몸을 떨자 그녀는 가만히 몸을 쓰다듬으며 토끼를 달랬다.
“겁내지 마. 앞으로 여기가 너희 집이야. 내가 잘 보살펴 줄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착하니까 너희를 괴롭힐 일은 없을 거야. 착하지, 먹어 봐. 많이 먹고 어서 커야지. 나처럼 어릴 때 잘 못 먹으면 나중에 커서도 이렇게 작은 거야. 사실 나도 벌써 열다섯이거든.
못 삼키는 거야? 물 좀 가져다줄까? 아니면 과실즙 좀 마셔 볼래? 얼마나 맛있다고. 무려 황후 마마께서 직접 담그신 걸 가져온 거야. 너희가 세상에서 제일 복 많은 토끼일걸.”
월향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이렇게 많이 말씀하셔도 그저 토끼 귀에 경 읽기일 뿐입니다.”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며 울적해했다. 노랑이는 그렇게 사람을 잘 따르는데, 이 토끼들은 어째서 이렇게 겁을 낸단 말인가?
“내가 이름을 지어 줄게. 너희는 이제부터 하랑이랑 회랑이야.”
월향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왕비 마마, 이름이 하나같이 너무 단순합니다. 노랑이, 하랑이, 회랑이, 예전 쇠귀뚜라미 이름은 깜장이였다면서요. 농부들이나 이런 이름을 짓지요.”
백천범이 물었다.
“그럼 우아한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말이야?”
“예. 하얀 토끼는 설구雪球가 어떠신지요?”
백천범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설구라고 부를게. 회색 토끼는?”
월향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이름을 짓는 것은 왕야께 여쭤보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셔서 박학다식하시니 분명 아주 멋진 이름을 지어 주실 것입니다.”
백천범이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왕야께서 날 거들떠보시지도 않는데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면 욕만 잔뜩 얻어먹을 거야. 회림각에 찾아가면 날 쳐다보지도 않으시는걸.”
“사내들은 어쩔 땐 어린아이같이 심술을 부리는 법이지요. 오늘 왕야의 화가 누그러지셨는지 확인해 보는 것은 어떠십니까? 왕야께 드릴 선물을 준비해서 전에 드렸던 그 향낭과 바꾸신다면 분명 아무렇지 않아 하실 것입니다.”
백천범이 코웃음을 쳤다.
“장군은 아량이 넓어야 한다는데, 이렇게 작은 일로 아직까지 화를 내시다니. 안 갈 거야. 왕야 마음대로 하라지!”
그때. 차씨의 외침이 들렸다.
“측왕비 마마, 왕야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월향이 조급해하며 말했다.
“보십시오. 왕야께서 또 측왕비 마마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왕비 마마께서 더 소심하십니다. 가끔씩은 마마께서 먼저 져 주기도 해야 하는 법입니다. 계속 이렇게 강경하게 행동하시다가는 찬밥 신세가 되실 것입니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찬밥이 뭐 어때서? 맛만 좋은걸.”
“그저 비유일 뿐이지요. 어쨌든 제 말을 듣지 않으시면 조만간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더 차갑게 대하실 것입니다.”
“차갑게 대하시라지, 뭐. 내쫓기기밖에 더하겠어? 어차피 조만간 이곳을 나가야 할 텐데.”
월향은 들은 척도 않는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렸다. 그때, 백천범이 신이 난 듯 말했다.
“생각났다! 회색 토끼는 생쥐라고 해야겠어.”
월향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멀쩡한 토끼에게 어찌 생쥐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려는 것입니까?”
“생쥐가 회색이니까. 다른 이유는 없어.”
성격이 좋았던 월향마저도 그런 그녀의 모습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때 노랑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회색 토끼는 노랑이가 옆을 지나자 몸을 한 차례 떨더니 ‘구구’같은 소리를 냈다.
백천범이 말했다.
“구구는 어때?”
월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랑이보다는 낫습니다.”
“근데 왜 운 거지? 배가 고픈가? 여기 이렇게 무도 있는데 먹지도 않고. 계속 이런 식이면 이름을 갖자마자 황천길로 가는 수가 있어.”
여전히 토끼에만 정신이 팔린 그녀의 모습에 월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토끼를 데리고 산책 좀 다녀오십시오. 이 애들도 바깥 구경을 좋아할지도 모르니까요.”
백천범은 그녀의 말에 토끼를 우리에 넣고 신나게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입구를 나서자마자 막 처소를 나선 수원상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백천범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물었다.
“언니, 회림각 가세요?”
“예. 왕야께서 절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수원상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왕비 마마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뇨.”
백천범이 우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얘네가 답답할까 봐 산책 좀 하려고요.”
말을 마친 그녀는 성큼성큼 명호로 향했다.
그녀의 말에 추문이 콧방귀를 뀌었다.
“뽐내는 것도 아니고. 왕야께서는 그저 어린아이 달래듯 데리고 놀라고 주신 것입니다. 조만간 왕야께서 마마님께 분명 더 좋은 걸 상으로 내리실 것입니다.”
* * *
묵용감은 며칠이나 얼이 빠진 사람처럼 지냈다. 그 일이 있고 백천범이 회림각을 몇 번 찾았지만, 그는 그녀를 외면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끝내 후회가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며 화가 가라앉은 그는 남월각에 찾아가고도 싶었지만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내일은 순행 출발일이었다. 내일이 지나면 중추中秋나 되어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던 그는 차씨에게 수원상을 데려오라고만 분부할 뿐이었다. 어쩌면 백천범이 그 소리를 듣고 함께 자신을 찾아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확신이 서지 않던 그는 오늘도 방 안을 서성거리며 초조해했다.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그는 서둘러 의자에 앉았다. 수원상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 소첩입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백천범은 오지 않았다. 만약 함께 왔다면 분명 더 떠들썩했을 것이다.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들어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