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아까만 해도 묵용감은 잠시 현기증이 나는 듯하더니 이내 정신이 맑아져서는 하나둘 술잔을 비우며 후련해했다. 살짝 상기된 얼굴에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두운 그의 두 눈빛에 사람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드디어 연회가 끝나고 학평관과 가동, 여러 저택 관리들은 손님들을 배웅했다. 묵용감은 자리에 앉아 홀로 술을 들이켜다 몸을 일으켜 세워 회림각으로 향했다.
영구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영구의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있는 힘껏 밀쳤다. 다시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던 영구는 그저 가만히 그를 뒤따랐다.
하필이면 그때, 잎이 무성한 계수나무 아래 또 다시 함께 있는 그 두 사람을 발견했다.
묵용감은 자신이 술에 취해 헛것을 본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영구도 발걸음을 멈추자 그가 입을 열었다.
“왕비와 사 제독이군.”
백천범은 사장풍의 손에 주머니를 쥐여 주고 있었다. 옅은 자색에 주머니에 줄기가 이어진 연꽃 두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지난번 그녀의 방에서 본 적 있던 자수였다.
그땐 녹하에게 줄 거라더니 이제 보니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사장풍이 지난번에 준 주머니를 버렸으니 하나 더 만들어 주려 한 것이었다.
자신의 선물을 버렸다 한들 새로 다시 만들어 줄 만큼 사장풍에게 잘하면서, 자신에게는?
실이 잔뜩 뭉친 주머니는 아직도 큰 주머니 속에 담겨 매일같이 그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보물이라도 되는 듯 쉽게 곁에서 떼놓는 일이 없었다. 밤에는 침대 아래 두고 잘 정도였다.
그녀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니 그녀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는 이제껏 무엇인가를 이렇게 진지하게 간직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잃어버렸다 한들 그녀가 그에게 다시 만들어 줄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에게는 평범한 선물이었고, 사장풍에게는 증표였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그는 그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플 뿐이었다.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그의 마음을 후벼 파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듯 아팠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눈빛은 조금 흐릿했지만 그는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를 발견한 사장풍이 곧장 주머니를 손에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왕야, 주량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저 감탄밖에는 나오질 않습니다. 이제 그만 쉬시지요. 소인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묵용감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본왕이 오니 어찌 그리 급히 가려는 것이냐? 내 험담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겠지?”
“왕야의 좋은 점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백천범이 끼어들었다.
“왕야께서 마음이 어질고, 저를 여동생으로 삼아 진심으로 아껴 주시고 잘해 주신다고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여동생은 무슨 얼어 죽을, 다들 알아차린 사실을 정작 본인만 모르면서. 하기야 이미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으니 다른 누군가 보이기나 했을까.
그는 백천범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사장풍에게 말했다.
“지난번 약속한 술을 끝내 마시지 못했으니 다음번에 시간이 나거든 그때 마음껏 마시도록 하지.”
사장풍은 웃으며 그리하겠다고 답한 뒤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쨌든 백천범은 부녀자니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부적절했다. 앞으로 또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 그도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씩 성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사장풍이 가고 나자 백천범은 묵용감을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친 채 어두워진 얼굴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백천범은 깜짝 놀라 영구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왜 저러시는 것이에요?”
영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술에 취하신 듯합니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왕비 마마.”
그간 변덕이 심한 묵용감의 모습을 많이 보았던 그녀였으니 당연히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갑작스레 아직 선물을 전하지 못한 사실이 떠올라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왕야, 왕야! 잠시만요!”
백천범이 그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묵용감의 귓가에 울렸지만 이내 뾰족한 바늘로 변해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가 낙담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날 마음에 두지도 않으면서 무엇 하러 그리 신나게 부른단 말이냐.’
이내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멈춘 그가 불편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이거요.”
백천범이 향낭을 꺼내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수를 잘 놓진 못했지만 너무 노여워 말아 주시어요.”
그녀가 자신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는 사실에 묵용감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 향낭에는 고양이도 호랑이도 아닌 것이 수놓아져 있었고, 실도 잔뜩 뭉쳐져 있었다. 사장풍에게 주었던 주머니는 바늘땀도 가지런하고 뭉친 것도 없더니……. 마음을 기울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게 훤히 드러났다.
그는 당장에라도 그녀 얼굴에 향낭을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짤막하게 고맙단 인사를 건넨 뒤 더 서둘러 돌아섰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정말 그녀의 얼굴에 향낭을 던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는 늘 가장 좋은 것들만 그녀에게 주었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이도 저도 아닌 작은 향낭이라니.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가 끝난 뒤 평범한 부부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 했거늘 그 또한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 * *
방에 돌아온 그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어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구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가 술에 취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학평관은 연회가 끝난 후, 왕비를 찾아가겠다던 초왕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 차례나 문 앞에서 그의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더 늦은 저녁에나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묵용감은 유시酉時에야 눈을 떴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그에게 학평관이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왕야, 저녁에 왕비 마마를 모셔올까요?”
묵용감은 이불 밑에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힘을 주었지만 말투는 담담했다.
“아니, 함께 식사를 들게 측왕비를 불러오너라.”
학평관은 흠칫 놀랐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왕비가 아니라 측왕비라니?
원칙대로라면 생일날 저녁 식사는 세 왕비와 함께 해야 했다. 평소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명절이나 생일을 맞이했을 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게 도리에 맞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초왕을 흘깃 바라보니 기분을 알 수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가 침대에서 내려와 신을 신으려 하자 학평관이 서둘러 그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그리고는 학평관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데 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씨에게 전하거라. 처소에 들어가서 전할 것 없이 정원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라고 말이다.”
학평관은 더욱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소식을 전하는데 얼굴도 보지 않고 정원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라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왕야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던 그는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방을 나서기 전 학평관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왕야, 왕비 마마의 처소에 소인이 장수면長壽面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대꾸했다.
“보내거라. 물 한 잔이라도 불공평하다는 말이 나와선 안 되니 서왕비에게도 보내고.”
그간 물 한 잔은 물론이거니와 누가 봐도 왕비만 총애했던 그였다. 얼마 전에 보낸 토끼처럼 새로운 것만 생기면 늘 남월각에 보내질 않았는가?
측왕비는 총애를 받진 못했지만 어쨌든 집안일을 담당하니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벽하각에 홀로 떨어져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서왕비야말로 가장 가여운 존재였다.
오전엔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초왕이 생일 만두조차 보내지 않을 정도였으니, 참으로 딱했다.
* * *
서둘러 낙성각으로 향한 차씨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측왕비 마마, 왕야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머슴이 안으로 들어와 대신 말을 전하자 수원상은 굳은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추문에게 상황을 확인해 보라 일렀다.
추문의 질문에 차씨가 다시 한번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쳤다.
“왕야께서 측왕비 마마와 함께 식사를 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수원상은 의아함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추문이 환한 표정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다시 상황을 고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차씨가 잘못 전한 것이 아니더냐? 나를 부르시다니, 왕비가 아니고?”
추문이 말했다.
“아이고, 마마. 소인이 물어봤사온데 마마가 확실하답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왕야의 생신이 아닙니까? 평소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오늘 같은 날 왕야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마마를 신망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왕야께서도 마마를 특별히 여기시는 게 분명합니다.”
추문은 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준비를 도왔다. 초왕의 생일이었기에 수원상도 평소보다 더 치장을 한 상태였지만 추문은 이마저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눈썹먹으로 그녀의 눈썹을 그린 뒤 눈꼬리도 몇 차례 덧칠했다.
긴 눈매가 완성되자 그녀에게서 요염한 자태가 풍겼다. 하지만 이런 풍의 화장을 싫어했던 수원상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이냐, 어서 지우거라.”
추문이 말했다.
“오늘 보니 왕비도 이렇게 치장을 했던데 마마라고 못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수원상은 살짝 화를 내며 말했다.
“외모로 얻은 환심이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느냐? 왕비는 왕비고, 나는 나다. 왕야께서도 어쩌면 그런 왕비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으셔서 나에게 식사를 하자고 하신 건지도 모르지.”
추문은 하는 수 없이 눈 화장을 지우고, 연지만 살짝 덧칠한 채 그녀와 회림각으로 향했다.
* * *
차씨가 낙성각에서 외친 말은 자연스레 남월각에도 전해졌다. 정원으로 나가 차씨의 말을 듣던 월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왕야께서 왕비를 뵙자 청하신 것입니까? 측왕비를 뵙자 청하신 것입니까? 헷갈리지 마십시오.”
차씨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왕야께서 측왕비께 식사를 청하셨으니 낙성각으로 가라는 분부를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내가 하루이틀 일한 것도 아닌데, 틀릴 일 절대 없지.”
백천범도 밖으로 나와 웃는 얼굴로 차씨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측왕비만 부르셨어요? 오전엔 저를 찾아오겠다고 하시더니!”
차씨는 왕비에게 예를 갖춘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까지는 소인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어쨌든 왕야께서 측왕비 마마를 모셔 오라고 하셨지요. 학평관 어르신께서 다른 하인에게 왕비 마마와 서비 마마께 장수면을 가져다주라고 분부하시는 걸 듣긴 했습니다.”
백천범은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장수면을 보내 주신다니 그걸로 충분해요. 함께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저도 이곳 남월각에서 장수면을 먹으면서 왕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면 되죠. 어서 가 보세요. 어르신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차씨는 그녀에게 다시 인사를 올리고 쏜살같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