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마음을 놓을 수 없던 월규는 백천범의 뒤를 몰래 밟다가 그녀가 회림각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백천범이 도착했을 때, 묵용감은 이미 처소를 비운 상태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초왕의 전갈을 전하지 못했던 학평관은 백천범을 보자마자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리 예를 갖추실 거 없어요, 어르신.”
백천범이 물었다.
“왕야는요?”
“앞뜰에 손님을 맞이하러 가셨습니다. 좀 전에 왕야께서 오늘 저녁에 남월각을 찾아가시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볼일 보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녀는 잽싸게 회림각을 빠져나온 뒤, 목을 길게 빼고 앞뜰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한 그녀는 앞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떠들썩한 연회를 잠시 구경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오색 천으로 장식된 앞뜰은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가 났다. 하인들은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빨간 초롱이 길을 수놓으니 대낮이긴 했지만 제법 경사스러운 정취를 자아냈다.
백천범은 한 걸음 내딛고 멈춰서 구경하기를 반복하던 중, 갑작스레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가 몇 차례 눈길을 주자 그 사람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다가와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숙였던 허리를 펴자 젊고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짙은 눈썹과 커다란 눈, 위풍당당한 기세를 가진 구문제독 사장풍이었다.
백천범은 옛 친구라도 만난 듯 기뻐 반갑게 말했다.
“구문제독님도 왕야의 생신을 축하드리러 오셨군요?”
“예. 왕야께서 소인을 각별히 신경 써 주시니 응당 축하를 드리러 와야지요.”
백천범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물었다.
“이건 뭐예요?”
사장풍이 조금 쑥스럽다는 듯 답했다.
“배나무를 조각한 공예품입니다. 왕야께서 좋아하신다고 들어 준비했습니다.”
백천범이 갑작스레 무엇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제가 지난번에 사부님에게 보낸 주머니는 잘 받으셨어요?”
“예. 잘 받았습니다. 그저 보잘것없는 일을 했을 뿐인데 그리 마음을 써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보잘것없다니요. 구문제독님이 안 왔으면 산에서 길을 잃어 들짐승한테 잡아먹혔을지도 몰라요. 구문제독님은 제 생명의 은인인데 주머니 하나 수놓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요.”
백천범이 그의 허리춤을 흘깃 살폈다. 매화가 수놓아진 짙은 남색 주머니를 차고 있자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제가 드린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이에요?”
“마음에 듭니다.”
사장풍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말씀드리기 조금 부끄럽지만 소인이 부주의한 탓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연히 지니고 다녔겠지요.”
“잃어버렸구나.”
백천범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하나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예쁠 거예요. 지니고 다니는 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만들 수 있어요.”
사장풍이 미소를 지었다. 지니고 다니기 부끄러운 솜씨였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니.
사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차마 들고 다닐 수 없었던 것이었다. 사내가 울퉁불퉁 실이 뭉친 주머니를 차고 다니다니, 영 체면이 서질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또 하나를 만들어 주겠다니…….
그는 곧장 두 손을 공손히 맞잡고 허리를 숙이며 황송하다는 듯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힘들게 만드신 걸 잃어버린 것도 이미 그릇된 처신이거늘, 어찌 감히 또다시 청할 수 있겠습니까.”
“에이, 괜찮아요. 뭐 이런 걸 가지고.”
백천범이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빼어난 그녀의 미소에 사장풍이 잠시 멈칫했다.
오늘 보니 그날과는 조금 다른 듯한 모습이었다. 이목구비는 그대로였지만 자세히 보니 키도 조금 큰 듯하고, 눈꼬리도 살짝 올라간 듯했다. 웃을 땐 작게 보조개가 들어가는 게 제법 소녀다운 분위기를 뽐냈다.
그가 지난번 초왕의 수상했던 언행을 떠올렸다. 가동 말로는 초왕이 왕비를 여동생으로 여겨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한 줄기 붉은 기운이 그의 얼굴에 감돌았다.
이렇게 보니 어린 왕비도 제법 빼어난 외모였다. 조금 더 크면 더욱 아름다워질지도 몰랐다. 괜스레 마음이 들뜬 그는 행동이 조금 부자연스러워졌다.
그가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요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럼요. 왕야께서 저를 여동생처럼 대해 주셔서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제 친오빠들보다 잘해 주세요.”
사장풍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린 왕비마저도 이렇게 말하다니! 가동의 말이 거의 틀림없는 듯했다.
그가 얼버무리며 말했다.
“가동 말로는 왕비 마마께서 나중에 이곳을 나가신다고 하던데…….”
“맞아요. 왕야께서 조금 더 돌봐 주신 뒤에 내보내신다고 하셨어요.”
백천범은 말을 내뱉고 나니 지난번 초왕과 이 말을 나누었던 때가 떠올랐다.
묵용감이 사장풍을 언급했던 것은 분명 그가 사장풍을 좋게 봤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신랑감 후보 중 한 명일 뿐이겠지만 어쨌든 부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한껏 붉어진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연회가 끝나고 곧바로 가지 마시어요. 제가 다시 찾아올게요.”
그녀가 저 멀리 꽃밭 가운데 솟은 외딴 계수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기다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스스럼없이 행동하던 어린 왕비가 갑작스레 부끄러워하자 사장풍의 심장도 더욱 빠르게 뛰었다. 초왕과 왕비는 이미 언질을 주고받은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굳이 주머니를 다시 만들어 준다고 했겠는가?
대개 여인들은 사랑하는 낭군에게 주머니를 선물하고 싶어 했다. 몸에 지니고 다니며 늘 자신을 떠올리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도 붉어진 얼굴로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왕비 마마, 걱정 마십시오. 소인 날마다 몸에 조심스럽게 지니고 다니겠습니다. 두 번 다시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백천범은 사장풍과 밀회를 하는 듯한 느낌에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서 가서 연회 음식 좀 드세요. 이따 다시 찾아올게요.”
사장풍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왕비 마마.”
그는 가만히 서서 백천범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길게 한숨을 내뱉은 그는 왠지 모를 기쁜 마음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높게 걸린 해가 뜨거운 열을 뿜어냈지만 묵용감에게서는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뼛속까지 냉기가 도는 듯 그의 마음은 끝없이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몇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린 남녀가 깊은 감정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정말인지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정말 사장풍이 있었다. 사장풍 또한 그랬다.
지난번만 해도 사장풍은 주머니를 잃어버렸다고 하기에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풋풋한 모습을 보이다니! 누구라도 곧장 상황을 알아차릴 만큼 노골적이었다.
사실 가만히 지켜보니 두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다. 특히 평소보다 더 많이 치장한 백천범은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는지 유독 늘씬해 보였다. 얼핏 보면 성숙하고 아리따운 여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를 당장에라도 품에 감싸 안고 애지중지 아껴 주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좀도둑처럼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간 심장이라도 꺼내서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그녀에게 진심을 다했건만, 그녀는 애당초 그를 조금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은 것이었다. 초왕비라는 칭호를 가진 게 뭐 그리 대수냐는 듯 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게 다 헛수고였다.
갑작스레 현기증이 난 묵용감은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절망 비슷한 감정이 솟구쳤다. 다 쓸모없었다.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니 아무리 잘해 준다고 한들 그녀는 절대 그를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것이다.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그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대청에 들어섰다.
사람들 앞에 선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올해 생일은 그에게 있어 가장 기분이 좋지 않은 생일이었다.
사실 그는 더 바랄 게 없었다. 백성들은 어진 황제 밑에서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보내고 있었고, 자신은 두 왕비를 맞이했으니 마음 놓고 자손을 낳아 가문을 번성시킬 수 있었다. 대부분 다 이리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아직 자신의 감정을 다 보여 주지도 못했는데 다시 삼켜야 하다니. 이제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았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체구가 조금 작긴 해도, 경국지색은 아닐지라도, 가끔 조금 바보 같은 짓을 하더라도 그녀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끔찍이 원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오직 일편단심으로 평생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니 머지않아 그녀가 저택을 나가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마음속으로 연거푸 탄식만 내뱉던 묵용감은 술잔을 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술을 빌려 번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이었다. 평소 주량이 많았던 그는 누군가 술을 권할 때마다 그대로 들이켰다. 얼마나 마셨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점점 정신이 어질했던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고, 누가 누구인지도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의 곁을 지키던 영구는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에 누군가 그에게 내민 술잔을 받아 들고 대신 들이켰다. 그러자 묵용감이 크게 성을 내며 영구를 발로 걷어찼다.
“이게 감히, 누가 네게 받으라 했느냐?”
그의 발길질에 밀려난 영구는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영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타일렀다.
“왕야, 이미 많이 드셨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러하다!”
묵용감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본왕이 오늘 기분이 좋아 취하도록 마시고 싶은 것이거늘, 말이 많다!”
옆에서 술을 권한 사람이 말했다.
“암요, 암요. 왕야께서 기분이 좋으시니 마음껏 드셔야지요. 자, 자, 소인이 왕야께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영구는 묵용감의 눈에 담긴 쓸쓸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어린 왕비와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초왕의 기쁨과 슬픔은 대부분 어린 왕비와 관련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왕비가 초왕에게 선물을 주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말다툼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위엄 있는 초왕이었지만 사랑만큼은 순탄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