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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40)화 (139/1,192)

제140화

칠월 십팔일은 초왕의 생일이었다. 떠들썩한 생일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몇몇 부하들이 함께 식사를 하자고 조르는 통에 그도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묵용감은 생일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저택에 새로운 사람을 들였으니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뒤 백천범과 단둘이 만나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들으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해 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는 분명 아주 소중하게 그녀의 선물을 간직할 터였다.

어쨌든 저택에 새로 들인 사람이 한 명은 아니었으니 묵용감도 정도를 지켜 처신해야 했다. 그는 남월각과 낙성각으로 하인을 보내 생일 기념으로 만든 만두를 보냈다.

초왕에게 까맣게 잊힌 사람이 있다면 바로 고청접이었다.

그녀는 백천범과 수원상을 찾아가지도 않고 늘 자신의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저택의 소식만큼은 누구보다 빠르게 전해 들었다. 초왕이 자신만 빼놓고 후원에 생일 만두를 보냈다는 소식도 물론 이미 알고 있었다.

시녀 자초가 화를 내며 말했다.

“마마,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마마께서 서비이시긴 해도 정식 부인이신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 왕야께서는 마마를 맘에 두고 계시는데 하인들의 생각이 너무 짧은 듯합니다. 왕야께서 벽하각을 자주 찾으시지 않는 걸 보고 그자들이 감히 마마에게 푸대접을 하는 것이지요. 소인이 마마 대신 따져 물어야겠습니다. 세 왕비 마마 중에서 서비 마마를 결코 빼놓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

고청접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나도 내지 않는 화를 네가 무엇 하러 낸단 말이냐. 왕야께서 찾아 주시진 않지만 먹고 사는 데 문제없이 돌봐 주시질 않느냐.

만두는 보내지 않으셨지만 난 괜찮다. 난 그분과는 다르지. 그저 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집을 온 것뿐이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우리 가문에서 왕야의 서비가 된 것만으로도 이미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니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곳 벽하각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나 진짜 화가 날 사람은 그분이지. 처소를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날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곤욕이겠느냐. 난 매일 재미난 일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자초는 전혀 뜻밖이라는 듯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그녀의 성격은 전혀 이렇지 않았다. 늘 표정에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던 그녀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역시 절박하게 내몰리다 보면 누구든 성장을 하는 듯했다.

“마마, 그 말씀도 맞습니다. 왕야께서 찾아 주시지 않는 것은 사실 그리 큰 문제도 아니지요. 더 멀리 내다봐야 합니다. 사실 사내들은 싫증을 잘 내지 않습니까? 정말 믿을 만한 것은 결국 아이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마마께서 아기씨만 낳으시면 왕야께서 새로 부인을 맞이하신다고 해도 두려울 게 없을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법이지.”

고청접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두고 보거라. 우리가 손쓰지 않아도 분명 누군가 참지 못할 것이다.”

“그분께서도 참으로 힘드시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희에게 그리 있는 척을 하시더니 요즘은 그럴 수도 없겠지요. 모르는 것이 약인데 두 처소가 가까우니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띌 것 아닙니까.

차라리 이곳이 훨씬 낫습니다. 풍경도 예쁘고, 그런 난잡한 꼴을 보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습니까? 다만 그분께서 손을 쓰시려 한다 해도 저택에 늘 왕야께서 계시는데 쉽사리 기회가 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옵니다.”

“기회는 곧 올 것이다.”

고청접이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이번 달 말, 폐하께서 순행을 가시니 왕야께서도 함께 가셔야 한다. 아마 적어도 열흘에서 보름 정도 걸릴 테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단 말이냐?”

자초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자기들끼리 물어뜯길 기다리면 되겠네요. 왕야께서 그 두 분에게 성이 나시면 분명 다시 마마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 * *

생일 연회를 준비하는 학평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이니 손님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그는 저택의 격이 떨어지지 않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세심히 살폈다.

그러다 생일 만두를 남월각과 낙성각에만 전해 줬다는 소식을 들은 학평관은 눈을 부릅뜨고 하인에게 호통쳤다.

“머리가 어찌 되지 않고서야, 벽하각에 계신 분은 왕비가 아니시란 말이냐? 어서 갖다 드리거라!”

머슴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야께서 남월각과 낙성각에 가져다주라고 하셨지 벽하각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왕야께서 분부하지 않으신 일을 소인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머슴의 말에 학평관은 묵용감이 고청접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고청접의 아버지도 연회에 올 텐데, 자신의 딸이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걸 알면 어찌 생각하겠는가?

그는 충직한 노비로서 주인의 걱정과 고민을 함께 나눠야 했다.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 없던 그는 관리에게 몇 가지 분부를 내린 뒤 회림각으로 돌아갔다.

묵용감은 근면 성실한 왕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일이라 할지라도 공무를 소홀히 하는 법 없이 평소처럼 행동했다. 학평관이 도착했을 때 그는 서재에서 바삐 업무를 보고 있었다.

학평관이 조용히 인사를 올렸다.

“왕야, 앞뜰의 연회 준비는 잘 마쳤습니다. 보러 가시겠습니까?”

묵용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손님은 왔느냐?”

“예. 주 참령, 장 대인, 소 상서께서 오셔서 차를 들고 계십니다.”

묵용감이 짤막하게 대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뒤에 가 보겠다. 소 상서와 장 대인이 모두 왔다니 상차림을 더 준비해야 할 것이다. 모두 손님으로 오는 것이니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충분히 신경 써야 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학평관은 잠시 주저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왕야, 남월각과 낙성각에 생신 만두를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허면 벽하각은…….”

묵용감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백천범이 만두를 좋아해 남월각에 보내 주려다가 남월각에만 보내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여 낙성각에도 보낸 것이었는데! 그 또한 부족한 처사였다.

“본왕이 깜빡 잊었구나. 어서 벽하각에도 보내 주거라.”

“예. 소인이 곧장 보내겠습니다.”

묵용감이 붓을 내려 두고 물었다.

“왕비는?”

학평관은 앞뜰에서 정신없이 일한 자신이 어찌 알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답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아마 남월각에 계실 것입니다. 소인이 월향과 월규에게 앞뜰에 사람이 많고 분주해 왕비 마마께서 부딪힐지도 모르니 후원에 계시라고 미리 일러두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본왕이 점심에는 시간이 없으니 저녁에 찾아가겠다고 이르거라.”

학평관은 알겠다고 대답을 올린 뒤 발걸음을 돌렸다.

* * *

백천범은 자그마한 향낭을 집어 들고 조심스레 향나무로 만든 구슬을 밀어 넣었다. 심각한 표정이 제법 진지해 보였다.

하지만 향낭은 차마 봐 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무엇을 수놓은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고양이 같긴 했지만 이마에 새긴 세 가닥 줄무늬를 보니 호랑이 같기도 했다.

월향의 손에도 향낭이 들려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원앙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자수 솜씨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색의 조화도 훌륭해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월향이 백천범을 타일렀다.

“왕비 마마, 그것은 들고 다니기가 조금……. 이걸로 하십시오. 얼마나 예쁩니까? 담청색은 사내들이 차기 가장 적합한 색이니 왕야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것입니다.”

백천범은 눈을 그대로 내리깐 채 대답했다.

“아냐, 왕야께서는 호랑이띠라 생신 선물로 이게 제격이라니까. 이 호랑이 좀 봐봐, 얼마나 위풍당당해. 게다가 선물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야지. 네 것은 내가 수를 놓은 것도 아니니 거짓말을 해야 하잖아.”

“마마께서 직접 만드신 건 아니라 할지라도 소인이 특별히 왕비 마마를 위해 준비한 것이지 않습니까. 호랑이가 좀 더 그럴싸했다면 소인도 이렇게까지 말씀드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백천범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자수 솜씨가 별로라는 거야?”

그녀는 향낭을 들어 올려 월향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어딜 봐서. 여기 불쑥 솟은 큰 귀 좀 봐봐, 얼마나 귀여운데.”

월규가 다가오더니 웃으며 월향에게 말했다.

“그만두는 게 좋을걸. 왕비 마마께서는 다른 이의 권유는 듣지 않으시니까 말이야. 네가 권할수록 더 고집을 피우실 거야. 어쨌든 왕비 마마의 마음이 담긴 거니 아무리 이상해도 왕야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백천범이 향낭을 그녀의 눈 밑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이상하다고? 대체 어디가 이상한데?”

월향은 보지도 않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안 이상합니다. 고양이가 참으로 귀엽습니다.”

백천범이 불평스럽게 말했다.

“고양이라니, 딱 봐도 호랑인데.”

월향이 일부러 자신을 놀리는 걸 알았지만 백천범은 개의치 않고 다시 향 구슬을 담았다.

향낭을 가득 채운 그녀는 입구를 잘 여미고 소매에 집어넣은 뒤 두 시녀에게 말했다.

“나 나갔다 올게.”

월규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왕비 마마, 어디 가시는 것입니까? 학평관 어르신께서 연회가 열리니 손님이 많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괜스레 사람들과 부딪힐지도 모르니 나가지 마십시오.”

“앞뜰은 안 가고 멀리서 보기만 할 거야. 그럼 되지?”

“그래도 안 됩니다.”

월규는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학평관 어르신께서 아셨다간 소인의 목이 날아갈 것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백천범이 말했다.

“그럼 회림각에 가서 왕야께 선물만 드리고 올게. 이건 되지?”

월규가 손을 풀고 말했다.

“소인이 모시고 갈 테니 함께 가시지요.”

“그럴 필요 없어. 둘 다 아침부터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어서 쉬어. 이따가 돌아오면 점심을 먹을 거니까.”

월향과 월규는 초왕의 생일을 맞아 백천범을 치장해 주느라 분주한 아침을 보냈다. 생일 주인공의 정실 부인이니 치장에 결코 소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백천범은 유려한 곡선을 살려 머리를 올리고, 머리 가장 끝에 화려한 진주알 장신구를 꽂았다. 장신구에 달린 가느다란 은술 장식이 백천범의 이마에 드리워졌고, 화려한 장신구를 몇 가지 더해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제법 멋스러운 모습을 뽐냈다.

미간에는 화전을 그려 넣은 뒤 눈썹먹으로 눈썹에 색을 더한 뒤 눈꼬리에도 가볍게 덧칠했다. 두 뺨에 붉은 연지를 옅게 바른 덕에 새하얀 얼굴에 붉은빛 생기가 돌았다. 입술에는 연분홍색 연지를 발랐는데 멀리서 보면 꼭 봄에 핀 자그마한 꽃송이 같았다.

연꽃이 크게 수놓인 비단 웃옷에 하늘거리는 분홍색 치마를 입었고, 노란색 고허리끈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사뿐히 둘렀다.

이렇게 치장하자 그녀에게서 제법 성숙한 소녀의 발랄함이 묻어났다. 월규와 월향은 초왕이 그녀를 보자마자 분명 감탄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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