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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39)화 (138/1,192)

제139화

묵용감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백천범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채 소리쳤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그녀는 부끄러우면서 성이 났는지 묵용감에게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왕야께서는 어찌 늘 아가씨의 일을 그리 캐물어 보십니까?”

묵용감이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물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오. 나도 뭐 궁금한 줄 아시오?”

백천범이 물었다.

“왕야, 절 왜 찾아오신 것이에요?”

“별거 아니오. 누가 토끼 두 마리를 줘서 왕비를 주려고 가져왔소.”

그의 말에 백천범은 곧장 환호성을 지르더니 큰 소리로 노랑이를 불렀다. 묵용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왕비에게 토끼를 준다는데 노랑이는 왜 부르는 것이오?”

밖에 있던 노랑이는 그녀의 부름에 잽싸게 뛰어 들어와서는 먹을 것을 달라는 듯 백천범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허리를 숙여 노랑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 새로운 단짝이 생겼어. 토끼 두 마리래. 신나지? 가자, 같이 가서 보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다시 묵용감에게 물었다.

“왕야, 토끼는요?”

“입구에 있소.”

백천범은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입구에 도착하니 자그마한 우리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작은 아기 토끼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차씨가 우리 문을 열어 새하얀 토끼 한 마리를 조심스레 그녀의 손에 올려 주었다.

“왕비 마마, 조심하십시오. 새끼 토끼라 온순하긴 하지만 성이 나면 물지도 모릅니다. 토끼도 벼랑 끝에 내몰리면 사람을 문다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백천범이 조심스레 토끼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몰아세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진심을 다해 대해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토끼를 땅에 내려놓고 다른 토끼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 이번엔 온몸이 회색인 토끼였다. 흰색과 회색의 자그마한 토끼 두 마리는 땅 위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많이 놀란 듯 미세하게 떨고 있는 모습에 백천범이 토끼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들 비켜 주세요. 토끼가 무서워하고 있어요.”

그녀는 또다시 노랑이를 불렀다.

“노랑이 네가 함께 있어 줘. 그럼 아마 덜 무서워할 거야.”

노랑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아기 토끼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장에라도 토끼를 쪼아 대려는 모습에 백천범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너, 쪼기만 해. 내일 당장 버섯 닭볶음탕을 해 먹을 테니까.”

사람과 친숙했던 노랑이는 백천범의 표정만으로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곤 했다. 노랑이는 작은 부리로 땅 위를 몇 차례 쪼아 댄 뒤 한쪽으로 물러났다.

백천범은 한 팔에 한 마리씩 안아 들고 신이 나 어쩔 줄 몰라 했다.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의 기분도 즐거웠다.

“그리도 좋소?”

“네, 좋습니다.”

백천범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맘에 든다니 잘 길러 보시오.”

물론 그녀가 좋아할 줄 알고 그가 기를 쓰고 얻어 온 것이었다. 그녀가 기뻐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

백천범은 아기 토끼만 신경 쓰느라 묵용감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잠시 뒤, 묵용감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선물한 토끼 덕분에 왕비의 기분이 좋아졌는데 어찌 보답할 것이오?”

백천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고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보답하면 좋을지 왕야께서 말씀해 주시어요. 이미 수는 놓아 드렸으니까요.”

묵용감은 입맞춤 한 번이면 족했다.

하지만 까만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차마 내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늘 큰오빠 같다는 핑계로 그녀와 겨우 가까워졌는데 갑작스레 남녀 간의 정으로 변한다면 이 어린 계집이 얼마나 놀랄까. 어쩌면 그에게 다시 경계심이 생겨 다시는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녀가 주저하며 말했다.

“주머니에 또 수를 놓아 드릴까요?”

“됐소.”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또 손가락에 잔뜩 피나 맺히겠지.”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비가 잘하는 것은 딱히 없질 않소. 식탐이 많고 입맛이 좋을 뿐이지. 왕비가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본왕도 평소보다 입맛이 좋아지는 듯하오. 그러니 자주 와서 나와 함께 밥을 먹으면 그게 보답이라 여기겠소.”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또 있을까? 백천범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제가 많이 가도 공짜로 얻어먹는다고 싫어하시기 없기예요.”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왕비가 얼마나 많이 먹든 난 초왕이오. 왕비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할 일은 없소. 공으로 얻어먹는다니, 그리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이오? 왕비는 본왕의 정실이오. 내 것이 곧 왕비의 것이란 말이오. 기억하시오.”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물었다.

“그럼 왕야께 갖고 싶은 것을 말하면 다 주실 것입니까?”

묵용감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기홍은 꿈도 꾸지 마시오.”

기홍을 주었다간 이 어린 계집은 회림각에 올 생각은 않고 날마다 남월각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었다. 그가 매일같이 그녀를 만나러 뛰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 기홍만큼은 줄 수 없었다.

그와 꽤 오랜 기간 함께한 백천범은 그가 겉으로만 위엄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헤헤, 왕야, 걱정 마시어요. 기홍 언니는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지난번에 기홍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은 외로운 남월각에서 함께 지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니 시녀이자 초왕의 첩인 기홍과 녹하를 마음대로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쨌든 두 시녀는 왕야의 밤을 함께해야 하는데, 그런 시녀를 데려온다면 초왕 홀로 얼마나 쓸쓸한 밤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럼 뭐가 필요하오?”

백천범은 토끼 두 마리를 다시 우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번도 본 적 없던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마 뒤면 유모의 기일입니다. 가서 인사를 하고 오고 싶습니다.”

묵용감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전혀 문제없소.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고 있소?”

백천범이 말했다.

“예. 몰래 가 본 적이 한 번 있거든요. 아주 먼 곳이라 마차를 빌려야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녀는 비통해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능력이 없어 아직까지 유모의 무덤은 모양새도 갖춰지지 않았어요. 그저 황토로 흙을 덮고 판자 하나만 꽂아 주었거든요. 지난번에 큰비가 내렸으니 쓸려 내려갔을지도 몰라요. 왕야께 말씀드리려니 너무 부끄럽네요.”

묵용감이 관심 있던 말은 그녀가 앞서 꺼낸 말이었다.

“홀로 마차를 빌려서 갔다고 했소? 그때가 몇 살 때였소? 간이 얼마나 부었길래 그런 짓을 했소? 마차를 모는 사람이 팔아넘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열 살 때였을 거예요. 돈을 냈는데 어찌 절 깔볼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제가 탔던 건 여러 사람이 함께 타는 커다란 마차였고, 함께 탄 사람들도 다들 착했던걸요. 어떤 오빠는 저한테 찐빵을 주기도 했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점점 더 마음이 아팠다.

열 살의 어린 계집이 감히 그런 마차를 타다니. 그 또한 여러 명이 타는 마차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말이 좋아 마차지 그저 허름한 운송 수단이었다. 마차 안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볏짚 위에 함께 앉아서 가야 했다.

정말 악랄한 사람이라도 타서 홀로 탄 어린 계집을 몰래 뒤따라가 소리 소문 없이 해쳤더라도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던 그는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마차는 타지 마시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시오. 내가 저택에 없거든 학평관에게 말해 그와 함께 가시오. 아시겠소?”

표정은 엄격했지만 백천범은 그가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진 그녀는 그의 팔을 껴안고 얼굴을 문지르며 사랑스럽게 말했다.

“알겠어요.”

묵용감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가 마음을 쓴 오랜 시간 동안 바라던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렇게 망설임 없이 그를 가깝게 대하고 응석을 부리는 모습이면 충분했다.

* * *

두 사람이 친밀하게 껴안고 있을 때 입구 밖에 서 있던 수원상의 얼굴은 조금씩 창백해졌다. 이제는 이리 대놓고 서로 껴안는단 말인가? 백천범이 이렇게 여우처럼 초왕을 홀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였다.

어느 집 규수가 이리도 경거망동한단 말인가? 아무리 부인이라고 한들 보는 눈이 없을 때에만 서로를 다정하게 대해야 했다. 손을 잡는 것 또한 이미 충분히 과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하인들 면전에서 대놓고 불쾌한 짓을 일삼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조용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정원에 놓인 꽃모종을 발견한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추문에게 분부했다.

“저것들을 치우고 깨끗하게 정리하거라.”

추문이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마마, 저것은 왕야께서 잠시 내버려 둔 것인데 혹 다시 오셔서…….”

수원상이 눈을 감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참한 미소를 지었다.

“다신 오시지 않을 것이다.”

방금 전 일로 그녀가 큰 상처를 받았다는 걸 알아차린 추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백천범이 그리 여우같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걸핏하면 사내들에게 몸을 기대는 꼴 좀 보십시오. 백 승상 댁 아가씨가 어찌 저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백천범을 언급하자 수원상은 더욱 기분이 언짢았다.

“되었다. 그만하거라. 준비하라는 가죽은 마련하였느냐?”

“예. 아주 부드러운 최고급 청노루 가죽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추문이 말했다.

“마마, 왕야께서 생신 선물을 받으시면 분명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마마께서 이리 마음을 쓰셨는데 왕야께서 어찌 모르실 수 있겠습니까. 후에 출정을 가실 때에도 마마께서 만드신 가죽신을 신으시면 분명 마마님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수원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위로할 것 없다. 내가 왕야의 눈에 들지 못했으니 내 선물도 당연히 눈에 차지 않으실 것이다. 그저 홀로 만들어 보는 것뿐이지.”

“마마.”

추문은 그녀의 모습에 조급해하며 말했다.

“마마, 왕야께서 분명 무슨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마마께 집안일을 맡기셨겠습니까?”

수원상도 그 사실로나마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녀의 말에 수원상이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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