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38)화 (137/1,192)

제138화

묵용감은 그의 노골적인 말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동병상련이 느껴져 마음이 복잡했다.

진왕의 말처럼 황족의 혼사에서 그들의 진심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나마 묵용감은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부일처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난감한 상황을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가 진왕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이 너무 많으면 성가신 일이 생기는 법이니 알아서 잘 처신하거라.”

이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상황도 이런 꼴이 되어 버렸으니 묵용감은 아우를 훈계할 자격이 없었다.

* * *

초왕이 구호금과 관련된 일을 맡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던 백 승상은 이번 일로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예상했고, 그 또한 암암리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왕이 찾아왔다는 말에 그는 놀란 기색 없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밖으로 나간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묵용감이 수없이 많은 무리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줄지어 정원으로 들어오는 무리를 바라보니 삼품 이상의 문무 관료들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던 그가 서둘러 묵용감 앞으로 가 예를 갖추었다.

“초왕야께서 오시는데 멀리 마중을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묵용감은 턱을 잔뜩 들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 나름의 답례였다.

그의 뒤를 따라온 수많은 관료들이 백 승상에게 인사를 올리자 순식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택을 가득 메웠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머리가 다 울릴 지경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백 승상은 서둘러 손님들을 안으로 청했다.

모두 자리에 앉고 차를 내온 뒤에야 백 승상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초왕야와 관료들께서 이 누추한 집에 어인 일로 귀한 발걸음을 내어 주셨는지요?”

묵용감이 품 안에서 고이 접힌 종이를 꺼내더니 백 승상의 앞에 펼쳤다.

“아무런 용무도 없이 찾아오진 않지. 돈을 요구하러 왔소. 남쪽 지역의 가뭄이 심각하다는 것은 백 승상도 잘 알 것이오. 지금은 국고가 넉넉지 않아, 폐하께서도 당장 국고를 바닥낼 수 없으니 본왕에게 모금을 진행하라 명하셨소.

승상께서는 조정의 기둥이니 응당 솔선수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다들 조금씩 제 몫을 낸 뒤 승상의 차례를 보러 왔소.”

백 승상이 종이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기부자와 기부 금액이 낱낱이 명시되어 있었다. 대충 계산해 보니 적어도 은자 삼사만 냥은 될 것 같았다.

가장 많은 금액을 낸 사람은 은괴 오천 냥을 낸 대학사 수민이었다. 그와 수민은 각각 승상과 내각 장관으로 같은 지위를 지닌 황제의 왼팔과 오른팔이었다. 수민이 이미 오천 냥을 냈으니 그도 응당 똑같이 내야 했다.

그가 곧장 웃으며 말했다.

“좋은 일에 쓰이는 것이니 소관小官도 마땅히 할 도리를 해야지요. 단지… 승상으로 임명되어 녹봉이 적지는 않지만, 이리 많은 식구를 홀로 부양하느라 모아 둔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원래 딸아이들의 혼수를 대비해 준비해 둔 것이 있사온데, 보잘것없는 금액이지만 좋은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우선은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은자 오천 냥을 준비해 올 테니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왕야.”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백 승상은 조정의 숨겨진 대부호가 아니오? 헌데 오천 냥을 내는 것이오? 인색하기 짝이 없군그래.”

“왕야, 소관 수중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사옵니다. 집안에 이리 많은 사람들을 좀 보십시오. 이들을 먹여 살리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천 냥도 딸아이들의 혼수 비용에서 가져올 만큼 어렵사리 준비한 것이라 소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묵용감이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관료들도 가진 게 없는 이들이 대다수요.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라 한들 다들 사정이 좋지 않소. 그런데도 자발적으로 모아 둔 돈을 꺼내 이렇게 기부를 했단 말이오.

헌데 백 승상은 가진 게 넘쳐흐르질 않소? 이 사실은 모두가 눈감아 주는 것일 뿐, 다들 마음속으로는 훤히 다 알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시오.”

초왕이 많은 관료들 앞에서 그를 헐뜯자 백 승상은 얼굴부터 귀까지 온통 새빨개졌다. 목청을 가다듬고 초왕에게 반박을 하려 했지만 도리어 자신의 명성만 흠집 낼 뿐이니 이 일은 말을 아끼는 게 좋았다.

“그것은 왕야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조정을 위한 소관의 마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입니다. 지금껏 한 번도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해 본 적이 없사옵니다. 늘 정직하고 착실하게 살아왔을 뿐입니다. 설사 황제 폐하께 고하신다 한들 소관은 두려울 게 없사옵니다.”

“그렇소?”

묵용감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가동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동이 목을 가다듬고 우렁차게 외쳤다.

“칠월 칠석 백 승상 댁의 걸교 비용은 은자 오천 냥입니다. 셋째 아가씨의 비취 마갈락을 구입하는 데에만 삼천 냥을 썼습니다.”

백 승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일이 있었다니요. 칠석은 소관의 안사람이 주관하여 얼마를 사용하였는지는 소관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이 사실을 알았으니 소관이 반드시 엄하게 가르치겠습니다.”

묵용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턱 끝을 살짝 들었다 내리며 가동에게 계속하라는 뜻을 내비쳤다.

“유월 이십구일, 백 승상께서 보여재寶如齋에 가셔서 은자 만오천 냥을 주고 진대晉代 서첩을 구입하셨습니다.”

백 승상이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왕야, 소관은 유월 이십구일에 보여재를 간 일이 없사옵니다.”

묵용감이 느릿느릿 물었다.

“설마 상점 주인이 대낮에 귀신이라도 봤단 말이오? 그자를 데려오너라.”

영구가 서둘러 문밖을 나서더니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왔다. 대략 쉰 살은 되어 보이는 수염이 듬성듬성 난 남자였다. 작은 눈에 대나무 잎이 그려진 비단 옷을 입은 보여재의 주인장 진 씨였다.

백 승상이 어두워진 얼굴로 물었다.

“이보게, 진 씨. 본관이 유월 이십구일에 물건을 산 일이 있나? 사실대로 말하지 못할까!”

백 승상은 문관이었지만 그의 말투에서 당찬 기세가 넘쳐흘렀다.

진 씨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예. 유월 이십구일 백 승상께서 쇤네의 가게에서 진대의 서첩을 만오천 냥에 사셨습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부렁을 내뱉는 것이냐!”

백 승상이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쳤다.

“네 이놈, 조정의 관리를 모독한 네놈을 관아에 보내야겠다.”

“관아에 보낼 게 뭐가 있소. 우리가 다 관료 아니오?”

묵용감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백 승상, 수치심이 분노로 바뀌기라도 한 것이오? 만오천 냥을 주고 그깟 종이 쪼가리를 살 돈은 있으면서 기부를 할 돈은 없나 보오. 수리사의 종삼품 유 시랑은 노모의 생신 잔치에 은괴 이백 냥도 안 되는 금액을 쓰고 삼천 냥을 기부했소.

본왕이 그의 집을 직접 방문해 보니 대발에 구멍이 나 모기가 들어오는데도 유 시랑은 버리기 아깝다며 손수건을 덧대었지. 그자야말로 수중에 가진 것 없는 청렴결백한 관료란 말이오. 은자 삼천 냥을 모으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겼다는 말에 유시랑은 두말 않고 꺼내 와 내게 건넸소.

본왕이 이번 일로 집집마다 다녀 보니 모든 관료들이 청렴결백했소. 만오천 냥을 주고 종이 쪼가리를 사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단 말이오. 승상, 폐하께 알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여기서 그쳐선 안 될 것이오.”

백 승상의 당초 계획은 초왕 앞에서 엄살을 떨며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그들에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꽃차까지 내어왔건만. 초왕이 이리도 비겁하게 자신의 뒤통수를 가격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나하나 조사해 온 걸 보면 그뿐만 아니라 돈 쓰는 귀신인 그의 아들들도 덫에 걸려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관료들 앞에서 자신과 아들들의 사치가 낱낱이 까발려졌다간 그의 체면이 땅에 곤두박질칠 것이었다.

백 승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묵용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계속 읽거라.”

가동이 다시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유월 이십, 하당월색에서 술을 드시고 기녀 수선水仙에게 은괴 삼천 냥에 달하는 옥팔찌를 상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하인을 보내 귀걸이 한 쌍을 추가로 보내…….”

“그 입 다물거라!”

백 승상의 수치심이 정말로 분노가 되어 있었다.

“초왕야, 일부러 소관의 트집을 잡으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욕적인 일은 소관도 참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당장 폐하께 고해야겠습니다!”

조정의 법규대로라면 관원이 기생과 놀아나는 것은 중죄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그가 순순히 인정할 리 만무했다.

백 승상의 당황한 모습에 묵용감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승상, 무엇 하러 그리 조급해한단 말이오? 이 일들은 내 수하들이 탐문하여 알아낸 것들이니 오해가 있을지도 모르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소? 승상과 본왕이 잠시 대화를 통해 어떤 오해가 있는지 따져 보면 말이오. 그리하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오.”

백 승상은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다. 초왕이 자신을 거듭 몰아세우면 자신 또한 필사적으로 대적해 앞으로의 관계를 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는 백 승상이 원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이게 다 그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초왕에게 단단히 약점을 잡혀 은자를 내놓을 수밖에 없던 그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 은자를 기부한다 해도 조만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우선 이 난관을 잘 넘긴 후에 다시 고민하는 게 상책이었다.

초왕과 백 승상은 문을 닫고 협상에 들어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초왕의 승리를 확신하는 기색이었다. 오늘만큼은 교활한 백 승상도 초왕의 손아귀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 * *

눈을 뜬 백천범은 묵용감이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 앉았다

“왕야, 어찌 그리 쳐다보시는 것이에요?”

그녀는 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입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침이라도 흘린 것입니까?”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묵용감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의 얼굴은 까닭 없이 붉은 기가 돌았지만 말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멋대로였다.

“오늘은 무슨 일이오? 또 아픈 것이오?”

“아픈 것은 진작에 나았습니다.”

백천범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이불을 걷어 올리고 침대에서 내려 와 신을 구겨 신었다.

“어제 오후에는 제기도 찬걸요.”

옆에 있던 월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기는 말씀하시지 마시어요.”

묵용감이 물었다.

“어째서? 왕비가 제기를 차다 넘어지기라도 한 것이냐?”

묵용감을 마주하자 월규는 조금 부끄러워했다.

“넘어지신 것이 아니라 옷이 더러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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