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흠칫 놀란 유일첩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등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지금까지 왕비의 병을 진료하러 저택에 왔을 때마다 나름 예를 갖추던 초왕이 오늘은 인정과 무자비함을 고루 보여 주었다. 그로 인해 그는 왕비가 왕야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유일첩이 물러나고, 이어서 왕비의 소식을 들은 수원상이 급히 남월각을 찾았다.
여전히 침대에서 백천범을 끌어안고 있는 묵용감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방 안에 하인들이 이리도 많은데 저리 대놓고 끌어안고 있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다가가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왕야께서도 계셨군요. 왕비 마마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에 소첩이 뵈러 왔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던 묵용감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본왕이 지난번에 측비에게 말하지 않았소? 왕비의 나이가 어리니 처소가 가까운 측비가 신경 좀 써 달라고 말이오. 병이 나 이 꼴이 되었는데도 본왕은 아무런 전갈도 받지 못했소. 측비도 이제야 찾아온 걸 보니 왕비를 이런 식으로 돌보는가 보오?”
수원상은 억울했지만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던 추문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고했다.
“왕야, 부디 저희 측비 마마를 나무라지 말아 주시옵소서. 오늘 아침 측비 마마께서도 두통이 심하셔서 계속 몸져누워 계셨습니다. 왕비 마마의 일은 소인이 고하지 않아 측비 마마께서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추문의 말에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었다.
“말솜씨가 아주 유창하구나. 네가 중간에서 소식을 막아 일을 그르쳤으니 잠시 뒤 형방에서 곤장을 맞고 오거라.”
정신이 몽롱했던 백천범은 곤장이라는 말에 눈을 절반도 채 뜨지 못하며 웅얼거렸다.
“왕야, 곤장을 내리지 마시어요. 저들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왕비의 뜻이 그러하다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허나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오늘 일까지 합쳐 벌을 내릴 것이다. 측비도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어서 가서 쉬고 많이 움직이지 마시오.”
수원상은 창백해진 얼굴로 가볍게 인사를 올린 뒤 추문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 * *
그녀가 낙성각에 들자 정원을 관리하는 머슴이 측비에게 물었다.
“마마, 남아 있는 꽃모종의 상태를 보니 서둘러 심어야 할 듯합니다. 어찌 하는 게 좋을지…….”
머슴이 말하는 모종은 묵용감이 남긴 것이었다. 언젠가 그가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에 그녀는 줄곧 모종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과 사이가 좋아진 그날 이후로 묵용감은 이곳 낙성각을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상황을 곱씹어 보니 참으로 비참했다. 시집온 뒤 합방은 말할 것도 없고, 그와 눈을 마주친 적도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저택의 살림을 아직 빼앗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왕비가 아직 어려 일을 맡을 수 없으니 자신에게 맡겼을 뿐이란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 * *
백천범이 줄곧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이내 기운을 차렸다. 아픈 것이 가셨는지 백천범은 생기가 도는 얼굴로 배가 고프다고 재잘거렸다.
묵용감이 그런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늘 먹을 생각뿐이니 정말 대단하오. 아침에 커다란 고기만두를 먹었다던데?”
백천범이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배가 아파서 고기만두를 두 입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방금 힘을 너무 많이 써 버려서 배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묵용감은 대갓집 규수의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가 매우 우스웠다. 배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니. 어쩌면 황후의 말처럼 그 또한 다소곳한 사람을 수도 없이 본 탓에 이렇게 자유분방한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이 먹고 싶소?”
생사의 고비를 그와 함께 넘긴 이후, 백천범은 초왕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다 사라졌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잘해 주려는 그의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유롭게 말했다.
“기홍 언니가 해 주는 흰쌀죽에다 삼색 야채 볶음이면 충분합니다.”
묵용감이 학평관에게 턱을 들었다 내리며 말했다.
“왕비가 죽과 삼색 야채 볶음이 먹고 싶다고 하니 어서 가서 전하거라.”
평관은 서둘러 차씨를 보낸 뒤 자신도 그의 뒤를 따라 급히 돌아갔다.
땀을 잔뜩 흘린 백천범의 모습에 묵용감은 월향과 월규에게 목욕 시중을 들라 분부했다. 마침 머슴이 묵용감에게 진왕이 찾아왔다고 고했다. 그는 몇 마디 더 분부를 내린 뒤 남월각을 나섰다.
백천범은 두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통 안에 몸을 담갔다. 백천범은 그제야 말 많은 월규가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자세히 바라보니 월규의 얼굴에 희미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백천범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가 때린 거야?”
월규는 회림각에서 일할 때에도 겪지 못한 일을 남월각에서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묻지 마십시오, 왕비 마마. 소인은 괜찮습니다.”
백천범은 초왕의 총애를 받아도 위세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시녀를 업신여기는 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걱정 말고 말해 봐. 누구 짓이야? 내가 혼 좀 내야겠어.”
월규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마마, 소인 때문에 왕야와 다투시면 절대 아니 되옵니다. 마마께서는 괜찮으실지언정 소인은 가죽이 벗겨질지도 모릅니다.”
월규의 말에 백천범은 정신이 희미할 때 어렴풋하게 울려 퍼진 소리가 떠올랐다. 그게 월규에게 손찌검을 하는 소리였다니. 백천범도 초왕을 찾아가 혼을 낼 만큼 간이 크진 않았기 때문에 멋쩍게 말했다.
“왕야도 참, 왜 애꿎은 너에게 손찌검을 하신단 말이야. 따뜻한 물주머니도 네가 생각해 낸 건데 도리어 뺨을 맞다니, 내가 다 미안하네.”
월규가 말했다.
“소인의 언니도 마마와 같은 증세를 앓고 있습니다. 통증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따뜻한 물을 담아 배에 얹어 놓지요. 잠시 뒤면 괜찮아지기에 의원을 모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왕비 마마의 귀하신 옥체가 어찌 언니의 몸과 같을 수 있다고……. 이게 다 소인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입니다. 마마께서는 마음 쓰지 마십시오. 소인에게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월향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이고, 역시 왕야께서 직접 군기를 잡으시니 겸손해졌네.”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이 저택에서 왕야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나랑 학평관 어르신이 유일할걸? 부러워 죽겠지? 너도 다음에 왕야께 가서 깨달음 좀 얻게 해 달라고 말씀 드려 봐.”
두 시녀가 말장난을 할 때가 가장 재미있던 백천범은 목욕통에 몸을 기댄 채 웃으며 말했다.
“학평관 어르신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 같아. 왕야께서 화를 낼 때마다 매번 가장 먼저 화를 입잖아. 상황이 안 좋으면 서둘러 숨어 버리면 될 텐데 말이야.”
월향이 말했다.
“저택의 총 관리인이니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매달 받는 봉급도 적지 않고 왕야의 신임을 받아 권력까지 갖추었는데 어찌 좋은 것만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왕야께서 학평관 어르신에게 화를 내시지 않으시면 저희 같은 하루살이들이 그 화를 들어야 하는걸요. 제게도 그리 많은 봉급을 주신다면 기꺼이 왕야께 가슴팍을 걷어차일 것이에요.”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봉급을 더 받겠다고 기꺼이 맞겠다는 저 당돌한 모습 좀 보십시오. 왕야께서 걷어찼다간 네 목숨이 그대로 날아가는 수가 있어.”
“왕야께서도 그리 쉽게 목숨을 앗아 가시진 않으셔. 게다가 나는 왕비 마마의 시녀인데 죽이시기야 하겠어? 개를 잡을 때에도 주인은 가려서 잡는다잖아.”
그녀의 비유에 월규가 실소를 터뜨리며 그녀를 간질였다.
“알고 보니 우리 월향이가 강아지였구나, 점심은 널 잡아 보신탕을 먹어야겠다.”
월향이 웃으며 몸을 피했다. 두 시녀 때문에 목욕간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백천범은 몸을 담그고 있으니 금세 노곤해졌지만 두 시녀의 장난에 끼어드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두 시녀에게 마구 물을 끼얹었다.
* * *
진왕은 칠석 밤에 초왕이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묵용감의 모습에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 다행입니다. 누구의 짓인지는 알아내셨습니까?”
“아직이다. 그저 좀도둑일 뿐이니 그리 염려할 것 없다. 이번에 처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을 보면 틀림없이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 처리하는 수밖에.”
“맞습니다. 셋째 형님이라면 열 명이 넘는 무리가 찾아와도 별일 아닌데 그깟 좀도둑 몇 명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다만…….”
그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누군가 형님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상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 없습니다.”
“알고 있다.”
묵용감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듣자 하니 기방에 홀려 집에도 돌아가지 않는다면서?”
묵용택이 민망한 듯 코를 만지작거렸다.
“형님, 말도 마십시오. 태비 마마께서 어찌 아셨는지 이 일로 오늘 한바탕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황제 폐하를 뵈러 갔다가 또 한참이나 훈계를 들었다니까요. 황후 마마께서 나서지 않으셨으면 오늘 이 아우가 남서방 앞에서 무릎을 꿇고 크게 망신을 당할 뻔했습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그리 바보 같은 짓을 하라 시키더냐? 기방을 집이라 여기다니? 후원에 그리 많은 처를 들였으면 그들의 체면도 세워 줘야지.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네 장인들이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누가 아니랍니까.”
묵용택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저 자유로운 왕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왕들의 혼사는 늘 궁에서 주관하니 이런 일은 저도 어쩔 도리가 없지요. 조정 대신들을 위하느라 황제 폐하의 후궁이 넘쳐나니 이젠 왕과 맺어 줄 수밖에요.
집안끼리 가족이 되면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니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 좋으련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 뒤에서 못된 술수만 꾸민다니까요.
오늘은 이 사람이랑, 내일은 저 사람이랑 싸우는 통에 정말 미칠 지경입니다. 차라리 밖에서 지내는 게 마음 편하지요. 기방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제 기분을 세심히 살피면서 상냥하게 대하는 데다 어찌나 능숙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