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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36)화 (135/1,192)

제136화

어림도 없다는 황제의 모습에 묵용감은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 마마, 혹 지난번에 만드신 과실즙이 아직 남아 있으신지요?”

황후가 웃으며 물었다.

“그럼요. 드시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드리지요.”

묵용감이 부끄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저희 왕비가 아직 어린 탓에 단 것을 좋아하여 과실즙을 잘 마십니다.”

백천범을 마음에 들어 했던 황후는 그녀가 언급되자 기뻐하며 말했다.

“시간이 나면 입궁을 한다더니 어찌 지금까지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왕비가 설마 본궁을 속인 것은 아니겠지요.”

묵용감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황후 마마, 부디 노여워 마시옵소서. 왕비가 아직 어려 철이 없는 탓에 혹 황궁에서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할까 봐 제가 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의 바른 사람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보았으니, 이제는 왕비처럼 자유분방한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혹여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다음번에 왕비와 함께 오십시오. 이 형수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습니다.”

이윽고 다시 과실즙이 떠오른 황후가 말했다.

“그때 왕비가 무슨 맛의 과실즙을 가장 좋아했더라…….”

“귤즙을 가장 좋아합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귤즙을 가장 좋아했지요.”

황후는 궁녀를 불러 귤즙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묵용감이 말했다.

“그리 번거롭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문에 대기하고 있는 무사가 있으니 그곳에서 받아 가겠습니다. 그럼 황제 폐하, 황후 마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제가 대답했다.

“그래. 밖을 다닐 땐 더욱 조심하고 호위무사를 몇 명 더 데리고 다니거라.”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묵용감은 인사를 올린 뒤 남서방을 나섰다.

그가 돌아가자 황후가 웃음을 보였다.

“백 승상에게는 그리 적대적인데 초왕비에게는 아주 잘해 주는 듯합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승상이 싫어하는 사람이니 자신이 기어코 잘해 주겠다는구려. 이 또한 백 승상에게 맞서는 것에 불과하오.”

황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집이든 곤란한 일은 있는 법이지요. 지난번 그리 큰일을 겪지 않았다면 신첩은 초왕비가 시집오기 전 얼마나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는지 아직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씨 부인은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듣자 하니 승상도 부인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하오. 지난번 일로 이씨 부인을 불당에 연금하여 지금은 둘째 부인이 주인 역할을 한다는구려.”

“그리되었다니 잘 되었습니다.”

황후가 말머리를 돌렸다.

“폐하께서는 셋째가 습격을 당한 일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본인조차도 감을 잡지 못하더군. 요즘 들어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많아 알아내려면 시일이 제법 걸릴 듯하오.”

“폐하, 셋째에게 궁에 있는 무예 실력자들을 붙여 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어찌 되었든 폐하의 일을 도맡다가 미움을 산 것이니 말입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본인이 천하제일의 실력을 가진 데다 두 호위무사도 보통이 아니니 크게 문제 되진 않을 것이오.”

* * *

묵용감은 빠르게 말을 몰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중문에 다다른 그가 학평관에게 분부했다.

“가서 왕비를 데려오너라.”

학평관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몸을 돌려 차씨를 남월각으로 보냈다. 차씨는 쏜살같이 달려갔다가 다시 쏜살같이 돌아왔다. 차씨는 묵용감의 방 앞에 서서 고했다.

“왕야, 월향의 말이 왕비 마마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지금 침대에 누워 계신다고 하옵니다.”

깜짝 놀란 묵용감은 성큼성큼 문을 나서며 말했다.

“몸이 아픈데 어찌 나에게 고하지도 않았단 말이냐? 의원은 불렀느냐? 학평관! 총 관리인이 일을 어찌 하는 것이냐? 주인이 아픈 것도 모르다니? 지난번 맞은 곤장이 부족한 것이더냐?”

학평관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저택의 총 관리인이지 남월각의 관리인이 아니었다. 백천범만 지키고 있지 않는 이상 시녀가 보고를 하지 않으면 그곳의 일은 그 또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초왕의 앞이니 그저 죄를 시인하고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소인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아침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갈 때만 해도 커다란 만두를 드시며 건강해 보이셨습니다. 아마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인 듯합니다. 소인이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송구하옵니다. 잠시 뒤 형방에 가서 곤장을 맞고 오겠습니다.”

묵용감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맞고 싶어 안달이 났나 보구나. 재빨리 맞으러 가겠다고 하는 걸 보니.”

곤장을 면한다는 의미를 알아챈 그가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왕야께서 벌하시면 군말 않고 받는 것은 당연지사이지요. 다만 또다시 며칠 몸져눕는 탓에 왕야의 시중을 들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될 뿐입니다.”

* * *

묵용감은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남월각으로 향했다. 백천범의 침실로 뛰어 들어가자 월향과 월규가 침대 옆에서 그녀를 간호하고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들여다보는 두 시녀에게서 초조한 기색이 묻어났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백천범은 이불을 덮은 채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이불이 살짝 위로 솟았을 뿐, 얼굴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침대에 사람이 누워 있다는 것조차 모를 뻔했다.

묵용감이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얼굴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고, 혈색 없이 창백한 안색이 여전히 통증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난 그는 옆에 서 있던 월규에게 손찌검을 했고, 월규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시녀가 있어도 전혀 소용이 없구나! 왕비가 이리 병이 났는데 보고도 할 줄 모르는 것이냐? 죽게 내버려 두려던 참이냐?”

초왕이 무섭게 화를 내자 방 안에 있던 모든 하인들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그의 호통 소리에 눈을 뜬 백천범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묵용감이 그녀를 다시 눕혔다.

“어찌 된 일이오? 어디가 아픈 것이오? 조금만 참으면 의원이 곧 올 것이오.”

방 안 가득 하인들이 무릎을 꿇고 있자 백천범이 힘없이 말했다.

“어서 일어나라고 하시어요. 저들 잘못이 아닙니다.”

그녀가 이불 안에서 손을 몇 차례 더듬더니 양가죽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주머니를 밖으로 꺼내 애매모호한 말을 내뱉었다.

“물이 차가워졌어.”

가까이에 있던 월향이 급히 주머니를 받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묵용감이 물었다.

“뭐에 쓰는 물건이오? 추운 것이오?”

백천범이 말했다.

“배가 아플 땐 배를 따뜻하게 해 주면 많이 좋아지거든요.”

묵용감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에도 배를 따듯하게 해 줘야 한단 말인가? 막 물어보려던 찰나 백천범이 자그마한 얼굴을 또다시 잔뜩 찌푸렸다. 숨까지 참는 모습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란 그는 서둘러 그녀를 품에 안고 초조하게 물었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이오. 내게 말해 보시오. 어디가 아프오?”

그가 아래로 손을 뻗자 있는 힘껏 배를 문지르고 있는 그녀의 손이 만져졌다.

그녀는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 손은 유독 더 차가웠다. 그녀를 따뜻하게 해 주고 싶은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가 손을 붙잡자 백천범은 자신의 손을 배에서 떼더니 그의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왕야 손이 따뜻하니까 제 배 좀 따뜻하게 해 주세요.”

커다란 손 아래로 보드라운 배가 만져지자 마음이 들뜰 법도 했지만 묵용감은 그런 생각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그녀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문지르면 조금 낫소?”

“네. 힘껏 문지르면 많이 좋아져요.”

백천범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에게 힘없이 웃어 보였다.

뜨거운 물을 받아 온 월향이 주머니를 건네자 백천범이 묵용감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왕야께서 제 대신 좀 문질러 주세요. 저는 이제 손이 다 시큰거려요.”

백천범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줄곧 가냘픈 음색으로 말했다. 몸이 아팠던 탓인지 어리광 섞인 그녀의 말투에 마음이 요동친 묵용감은 그녀를 품에 감싼 채 나긋하게 말했다.

“좀 쉬시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때마침 도착한 유일첩이 서둘러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잠시 멍해졌다. 이리 껴안고 있으면 어찌 진맥을 한단 말인가?

그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그는 눈을 내리깐 채 공손하게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의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

묵용감이 따뜻한 목소리로 백천범에게 말했다.

“의원이 진맥을 할 수 있게 손을 내밀어 보시오.”

백천범이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자 월향이 서둘러 그녀의 손을 붙잡아 진맥을 할 수 있게 도왔다. 유일첩은 그제야 가까이 다가가 두 손가락을 올려 맥을 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뗀 그는 허리를 숙인 채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경맥經脈에 냉기가 들어 월경 장애가 생기신 듯합니다. 몸에 혈기가 제대로 돌지 않아 복통이 생긴 것입니다.”

묵용감이 물었다.

“멀쩡하다가 어찌 이리될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날씨가 더운데 경맥에 냉기가 들다니?”

유일첩이 설명했다.

“이 병은 단기간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추위 등으로 인해 몸에 냉기가 쌓여 있다가 제대로 몸을 보양하지 못해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특히 매달 월경을 할 때 증상이 더욱 심해집니다.”

묵용감은 그의 말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매달 월경을 할 때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는 말은 매달 한 번씩 이 통증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통증을 겪는다니!

묵용감은 백천범이 몹시 가여웠던 나머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무의식적인 그의 행동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했고, 온통 자신의 배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던 백천범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작 두 사람이 아무렇지 않아 하자 노비들은 서둘러 놀란 표정을 감추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물었다.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오?”

“이 증상은 부인과에서 흔히 볼 수 있사온데 근본적으로 치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저 천천히 몸을 다스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지요. 특히 가을 겨울철에 몸에 냉기가 들지 않게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소인이 자궁을 따뜻하게 하는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다만 지금 드시면 자궁 출혈이 있을 수 있으니 반드시 월경이 끝난 후에 복용하셔야 합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만약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왕비가 좋아진다면 큰 상을 내리겠소. 하지만 또다시 이리 고통스러워하는 날에는…….”

그의 말투에 점차 냉기가 서렸다.

“약방 유일첩의 간판을 뜯어낼 것이니 그리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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