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묵용감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이 아니오. 대여섯 명은 될 것이오. 오른쪽 뒤에도 있소.”
백천범이 물었다.
“설마 절 잡으러 온 건 아니겠죠?”
묵용감이 실소를 터뜨렸다.
“본인을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오?”
백천범이 멋쩍게 말했다.
“이씨 부인이 사람을 보내 절 죽이려는 줄 알았죠.”
“계집아이 하나 죽이겠다고 이리 많은 사람을 보낸단 말이오?”
그가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게 바짝 붙어 따라오시오. 반걸음도 떨어져서는 안 되오.”
나름 자신만의 계획을 세운 백천범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왕야, 가지고 계신 무기 좀 빌려 주세요.”
“검도 두고 나왔는데 무슨 무기가 있단 말이오?”
“몽둥이 있으시잖아요. 저 좀 잠시만 빌려주세요.”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까지 몽둥이 얘기라니, 묵용감은 어처구니가 없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몽둥이 얘기는 꺼내지도 마시오. 알겠소?”
백천범이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쩨쩨하게…….”
“좋소. 나중에 실컷 갖고 놀게 해 주지.”
묵용감은 이를 꽉 깨물고 말을 내뱉었다.
“그때 가서 싫다고 했다간 본왕이 벌을 내릴 줄 아시오.”
그때,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혼잡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설상가상 그 소리는 두 사람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끌고 저택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 다다르자 두 사람을 뒤따르던 자들은 더욱 대범하게 행동했다. 하나둘 무기를 꺼내 들고 두 사람 앞을 가로막더니 이내 완전히 그들을 포위했다.
백천범은 복면을 쓴 채 까만 눈동자만 내놓은 괴한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세를 보니 하나같이 무술에 능한 이들이었다.
백천범은 갑작스레 묵용감의 손을 뿌리치고는 앞으로 두 발짝 걸어 나가더니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했다. 그녀가 넉살 좋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형씨들. 저와 제 큰오빠는 지금껏 다른 이의 원한을 산 일이 없는데 다들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실수로 잘못 죽이는 것은 피해야 하니까요.”
모두 합해 열 명이었던 괴한들은 다들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람? 설마 초왕이 겁을 먹은 것이란 말인가?
묵용감이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끌며 작게 질책했다.
“어찌 이리 말을 안 듣는 것이오? 반 발짝도 멀어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백천범은 소매에서 표창 두 개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받으세요. 저한테는 탄환이 있으니까 같이 혼쭐을 내 주자고요.”
뒤에서 벌벌 떨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려 하다니! 그는 그녀의 침착함에 또 한 번 감탄했지만, 이 또한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왔다.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괴한들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노점에서 산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져 괴한들에게 적중시킨 뒤, 곧바로 탄환을 꺼내 들어 있는 힘껏 던지며 소리쳤다.
“죽고 싶은 사람만 덤비거라!”
기세가 어찌나 등등한지 그녀가 무엇을 던진 줄도 모른 채 괴한들은 이리저리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에워싸던 벽이 허물어져 틈이 생기자 백천범이 서둘러 묵용감을 그 틈으로 밀쳤다.
“먼저 가서 사람들을 더 데리고 와서 절 구해 주세요!”
묵용감의 얼굴은 화가 나 잔뜩 일그러졌다. 대체 자신을 무엇이라고 여기길래 이리 행동한단 말인가? 가동에게 조금 배웠다고 본인이 천하제일의 무술 고수라도 되는 줄 알고? 부인이 남편을 지켜 주는 꼴을 만들고 저더러 먼저 가라 한단 말인가?
그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한 대 때리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 한 번 더 지껄였다간 곤장을 내릴 것이오!”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자 화가 난 백천범은 똑같이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어찌 이리 바보같이 구신단 말이에요! 한 명이라도 도망가야죠. 이제 둘 다 죽게 생겼잖아요.”
괴한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의아해했다. 대체 누구길래 감히 초왕의 엉덩이를 때린단 말인가? 게다가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도 눈속임을 쓰려 하다니! 애초 자신들은 그다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런 속임수로 얼렁뚱땅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괴한들은 그녀의 기이한 행동이 수상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본분은 다해야 했다.
괴한들이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검을 휘둘렀다.
백천범은 제대로 자세를 잡고 그들과 겨루고 싶었지만, 묵용감이 한쪽 팔로 있는 힘껏 그녀를 감싸 안았기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몸을 피하며 한 손으로 괴한들과 대적해야 했다.
그가 힘겹게 홀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던 백천범이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어서 놔 주세요. 저도 같이 싸울 수 있단 말이에요. 적어도 한두 명은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
괴한들이 칼을 쓰는데 묵용감이 어찌 그녀를 놓을 수 있을까. 그는 괴한을 상대하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가만히 좀 있으시오. 아무 일 없게 해 줄 테니.”
키가 작았던 백천범은 그의 품에 안겨 고개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서로 맞붙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자 더욱 초조해진 그녀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 저를 놓아주시어요. 손발도 쓰시지 못하면서 어찌 저들을 상대하신단 말입니까? 혹여 다치기라도 하시면 저는 평생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묵용감은 괴한에게서 검 한 자루를 빼앗은 뒤 곧장 휘두르며 말했다.
“혹여 내가 다치거든 평생 내 곁에 있으면 될 것 아니오.”
괴한들의 참혹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초왕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 확신한 백천범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놓이니 긴장이 풀린 그녀는 자신이 봐도 스스로의 행동이 너무 우스웠다. 천하제일의 고수인 초왕에게 고작 이런 좀도둑들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녀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싼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흔들리자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몇 차례 맞서 싸운 괴한들은 자신들이 초왕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검을 집어 던지고는 우르르 도망쳤다.
묵용감은 더 이상 그들을 쫓지 않았고, 서둘러 검을 내던진 뒤 품 안에 있는 백천범을 내려다보았다. 두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들다니, 그녀의 단잠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리고 천천히 저택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대체 누가 보낸 괴한들이란 말인가? 이 시간에 그가 밖에 있다는 사실은 어찌 알고? 실력이 제법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뛰어나진 않았다. 누군가 일부러 경고를 한 것인가, 아니면 그의 실력을 한참 얕본 것이란 말인가?
조정에 돌아온 지 채 삼 년이 되지 않았지만, 이미 수많은 적을 만든 그였다. 게다가 최근 구호금과 관련해 또다시 많은 이들에게 미움을 샀으니 누구의 짓인지 알아내기 더욱 어려웠다.
* * *
칠석 밤에 있었던 습격에 대해 묵용감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영구에게 은밀히 사건을 조사하라고 분부했다. 하지만 황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황제는 묵용감에게 조회가 끝난 뒤 잠시 남으라고 명했다.
두 형제는 남서방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황제가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리 큰일을 겪고도 어찌 짐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냐? 짐은 황제이자 네 형이거늘!”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별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좀도둑 몇 명이 덤빈 것뿐이니 입에 올릴 가치도 없는 일이지요.”
“누가 벌인 짓인지 알아냈느냐?”
“아직입니다. 그리 뛰어나지도 않는 자들을 보내 일을 꾸미니 저도 더욱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누군가 널 떠보려는 게 아니더냐?”
“그럴지도 모르지요. 워낙 제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많으니 알아보려 해도 손 쓸 길이 없을 듯합니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짐 때문이다. 늘 네게 악역을 맡기니 누군가의 원한을 살 수밖에.”
“폐하의 근심을 함께하는 것이 저의 도리인데 이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황제가 물었다.
“구호금은 어찌 되어 가고 있느냐?”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모이긴 했지만 아직 크게 부족한 상황입니다. 내일은 백 승상에게 찾아갈 계획입니다.”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초왕비의 체면은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백 승상은 네 장인이니 최소한의 체면은 세워 줘야지.”
묵용감이 냉소를 지었다.
“백씨 가문이 왕비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데 그자가 장인이 될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집안사람들 전부가 그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황제가 얼굴을 살짝 굳혔다.
“그리 말하면 짐의 귀비마저도 욕보이는 것이 아니더냐.”
그때, 황후가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폐하, 셋째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시면서 무엇 하러 그리 논쟁을 벌이십니까.”
묵용감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황후가 그릇을 들고 있자 그가 웃으며 물었다.
“황후 마마께서는 참으로 세심하십니다. 늘 이리도 폐하를 생각하시는 걸 보니 역시 천하제일의 현모양처이십니다.”
황후가 그를 책망했다.
“아이참, 이 황후를 놀리시다니요. 셋째께서도 두 현모양처를 새로 들이지 않으셨습니까?”
이 문제를 꺼내자 묵용감은 머리가 아파 왔다. 어쩌다 보니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탓에 이제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참으로 난감했다.
그가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폐하,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왕비와 헤어지겠다는 일 말입니다. 혹 세 왕비와 모두 그리하면…….”
황제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세 부인과 다 헤어지겠다니! 짐이 맺어 준 혼인이 장난이더냐? 고항은 몰라도 수민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네 정비가 되길 고대하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묵용감은 황제의 꾸짖음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때 황후가 묵용감에게 물었다.
“이 형수에게 솔직히 말씀해 보십시오. 셋 다 맘에 들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묵용감이 조금은 어색하게 답했다. 한 명은 좋았기 때문이다. 다른 두 명은 그저 충동적으로 들인 실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황제의 말이 맞았다. 혼인은 장난이 아니었다. 비록 그 두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한들, 그들은 엄연히 자신에게 시집온 부인이자 그의 측왕비와 서왕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