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왜 웃는 거야? 몽둥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거야?”
월규는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였다.
“사내들의 금기이니 마마께서도 더 이상 묻지 마시어요.”
얼굴이 새빨개진 묵용감은 당장 뛰어 들어가서 그녀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말에 상처를 받아 잠시 방심한 사이, 두 시녀가 저리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들어갈 수도,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도 없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백천범이 두 시녀에게 끊임없이 캐묻자 묵용감이 결국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제야 그를 발견한 월향과 월규는 깜짝 놀라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대체 왕야가 자신들의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단 말인가? 심장이 벌렁거리는 탓에 머리와 목이 분리된 느낌이었다.
다행히 묵용감이 손을 내저으며 차갑게 말했다.
“너희는 나가 있거라. 왕비에게 잠시 할 말이 있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표정이 어둡자 불안해졌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유모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능글맞은 고양이처럼 굴자 묵용감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그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본왕의 말을 흘려듣는 사람은 왕비뿐인 것 같소.”
백천범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요, 왕야. 제가 언제 왕야의 말을 흘려들었어요?”
“내가 그때…….”
묵용감이 부끄러운 듯 말했다.
“사내의 금기는 다른 이에게 말해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이오?”
“왕야께서 사내에게 묻지 말라고 하셨지, 여인에게 묻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묵용감은 백천범의 까만 눈동자를 보고는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잘 기억하시오.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럼 왜 왕야와는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난 왕이고 그대는 왕비가 아니오. 이 저택에서 우리 두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이니 말할 수 있소.”
“측왕비와 서왕비도 안 되나요?”
“안 되오.”
백천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조만간 이 저택을 떠날 사람이니 측왕비가 왕야와 가장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요?”
묵용감이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쉬며 대답했다.
“이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 왕비는 엄연한 초왕비니 우리 둘이 가장 가까운 사이가 맞소.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나를 찾아오시오. 그리고…….”
갑자기 묵용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왕비가 잘못 말한 게 있는데 사실 짧지 않소.”
백천범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짧지 않다니요?”
말을 꺼내자마자 묵용감은 스스로가 참으로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꺼낼 필요 없는 말을 하다니! 나중에 때가 되면 긴지 짧은지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묵용감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니 이제 그만 물어보시오.”
말은 묵용감이 먼저 꺼내 놓고 이제 와서 묻지 말라니. 백천범은 그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묻지 말라고 하니 백천범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찾아온 것이에요?”
묵용감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이 일 때문이 아니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자 그가 망설이며 말했다.
“왕비와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려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리 늦었으니 그저…….”
그의 말에 백천범의 두 눈이 번뜩였다.
“산책이요? 저택 밖으로요? 아직 해시 삼각이라 그리 늦지 않았습니다.”
백천범이 기뻐하는 모습에 묵용감은 잠시 고민한 뒤 말을 이었다.
“좋소. 하지만 나와 세 가지 약속을 해야 하오. 첫째,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나에게서 떨어지면 안 되오. 둘째, 내가 돌아가자고 하면 곧장 돌아와야 할 것이요. 셋째, 다른 사내와 함부로 말을 섞어선 안 되오.”
백천범은 기꺼이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세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 약속도 지킬 수 있었다.
* * *
대갓집은 보통 칠석이 되면 가족들과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향을 피우고 걸교를 즐기곤 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집 밖에서 칠석을 쇠었다. 큰 나무 아래든 높은 언덕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녀 할 것 없이 손에 향을 든 채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이날 시장 노점상은 축시丑時까지 장사를 했다. 향이나 칠석과 관련된 물건, 연지와 분 따위의 화장품, 비녀 같은 장신구도 판매했다.
물론 음식을 파는 곳도 많았다. 마침 허기가 질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경단이나 술로 찐 계란, 참기름으로 향을 낸 만둣국 등을 먹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의 향연에 군침아 도는 냄새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백천범은 백 승상 집에 있을 때 몰래 밖으로 놀러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이가 어리고 돈도 별로 없어서 눈요기만 하고 돌아갔지만, 오늘은 마음껏 먹고 시녀들의 선물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백천범은 옷을 갈아입은 뒤, 묵용감을 따라나섰다. 등불을 든 머슴이 대문까지 따라왔지만, 묵용감이 손을 흔들어 보이며 머슴에게 저택에 남아 있으라고 분부했다. 달빛도 훤했고 시장 거리마다 등불이 밝게 켜져 있으니 굳이 등불을 들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초왕은 평범한 부부처럼 백천범과 단둘이 거리를 거닐다가 노점 음식을 맛본 뒤 집에 돌아올 생각이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거리는 여전히 북적거렸다.
새 옷을 입은 어린아이들은 등불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여인들은 진열된 물건에 정신이 팔려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 하며 상인들과 흥정을 했다. 또 젊은 청년들은 여러 명이 함께 소원을 빌거나 노점에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천범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새장에서 풀려난 새처럼 약속 따위는 까맣게 잊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묵용감은 미리 한 약속을 빌미로 백천범의 손을 꼭 쥐었다.
백천범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손을 뿌리치려 할 때마다 그가 매서운 눈초리로 흘겼다. 그러면 그녀는 더 이상 날뛰지 않고 순한 양처럼 그를 따랐다.
시장에는 노점상뿐만 아니라 잡기나 곡예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이 몹시 붐비는 곳이 보이자 백천범은 묵용감을 끌고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통에 키가 작았던 백천범은 아무리 비집고 들어가려 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곡예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고 묵용감에게 물었다.
“왕야, 안쪽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묵용감은 재미있다는 듯 안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기예를 하고 있소.”
백천범은 바깥 구경을 자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예를 볼 기회도 적었다. 어떤 기예인지 궁금했던 그녀는 묵용감의 어깨를 붙잡고 까치발을 들어 안쪽을 보려 안간힘을 썼다.
“무슨 기예요? 저도 좀 보여 주세요.”
묵용감이 그녀를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어떤 여인이 몸을 구겨 조그마한 통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백천범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저 사람 뼈가 다 부러진 것 아니에요?”
묵용감이 백천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걸로 먹고사는 사람이 저리 한 번 했다고 뼈가 부러지면 어찌하겠소.”
다시 기예를 볼 수 없게 된 백천범이 뻔뻔스럽게 부탁했다.
“왕야, 한 번만 더 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묵용감이 대답했다.
“왕비가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계속 그렇게 들어 올리고 있으면 내 팔도 힘들 것 아니오?”
백천범이 울상을 짓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내가 왕비를 안아 올릴 테니 마음 놓고 구경하시오.”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웠다.
“저도 마냥 어린 나이가 아닌데 그렇게 안겨 있으면 너무 창피하단 말이에요.”
묵용감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날도 어두웠고 다들 기예에 정신이 팔려 있어 쳐다볼 일도 없었다. 게다가 백천범은 몸집도 작고 얼굴도 작아 누가 본다 한들 큰오빠가 여동생을 안고 있는 거라고 여길 터였다.
백천범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어린 여자아이가 아버지의 목에 올라탄 것을 보자 무엇인가 깨달은 듯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가리켰다.
“왕야, 목말은 어떨까요?”
백천범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긴 묵용감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백천범은 둘 사이의 나이 차이를 계속해서 그에게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어떤 아내가 남편 어깨에 올라탄단 말인가? 목말은 그저 어린아이들이 어른들 목에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묵용감이 대답을 하지 않자 백천범은 초조한 얼굴로 묵용감의 옷깃을 붙잡고 흔들었다.
“어서요. 곧 끝나겠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려 했으나 그의 몸은 이미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순간 자괴감이 든 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뭘 그리 보챈단 말이오! 잠시만 보고 돌아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백천범은 묵용감의 목에 올라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싼 뒤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는 정말 좋으신 분이에요.”
묵용감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왕야라는 호칭을 자신의 이름 두 글자로 바꾸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었다.
* * *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린 백천범은 약속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행동했다. 묵용감이 몇 차례나 돌아가자고 재촉했지만 그녀는 ‘하나만 더 사야겠다’, ‘저것만 먹어 봐야겠다’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긴 했지만 누구보다 그녀를 아껴 주고 싶었던 묵용감은 그녀의 말대로 했다. 게다가 자신의 앞에서 구애받지 않고 행동하는 백천범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 좋았다.
자시子時가 거의 다 되어 가자 조금 피곤해진 백천범이 그의 팔에 몸을 기댔다.
“왕야,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요.”
묵용감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곤하면 나에게 업히시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노점에서 봤던 여인을 업은 저팔계 인형이 생각나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를 업으시면 왕야도 저팔계가 될 텐데요.”
묵용감은 언짢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왕비야말로 돼지가 아니오. 먹고 자기만 하고 띠도 돼지띠이니 이보다 더 꼭 맞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백천범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돼지가 뭐 어때서요. 잘 먹고 잘 자고, 커다란 배로 모든 걸 다 포용하잖아요. 도살을 당해서 명이 좀 짧긴 하지만요.”
묵용감이 막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그는 곧장 숨을 죽인 채 백천범을 품에 안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백천범도 위험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남달랐기 때문에 묵용감의 행동에 곧바로 상황을 인지하고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 거리도 한산했다. 그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왼쪽 뒤에 수상쩍은 사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