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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33)화 (132/1,192)

제133화

마음을 쓰고도 헛물만 켰지만, 성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묵용감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 원래 그리 나눠 가지라고 하려던 참이었소. 누가 가져가든 똑같으니.”

그는 고청접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내가 산 게 제대로 된 계화꽃 향이군. 왕비가 쓴 것은 너무 진해 불쾌하오.”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묵용감이 또다시 제멋대로인 태도를 보이자 그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던 백천범이 투덜거렸다.

“제 것도 얼마나 좋은데요. 월규한테 물어보시면 바로 알 거예요. 씻을 때 얼마나 좋은 향이 나는지!”

묵용감이 그녀를 물어보며 물었다.

“원앙은 누가 가져갔소?”

수원상이 급히 다가와 예를 갖추며 말했다.

“왕야, 원앙은 소첩에게 있습니다.”

묵용감은 입가를 삐죽거렸다. 굳이 원앙을 산 이유는 어린 계집이 그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부부의 금슬을 상징하는 물건을 늘 곁에 지니고 있으면 증표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증표는 도리어 측왕비에게 전해지고 말았다.

낙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초왕은 기분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직접 선물까지 골랐는데 헛다리만 짚은 꼴이었다. 한참이나 성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잘 되지 않자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백천범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기홍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왜 저러시는 거예요? 조금 성이 나신 것 같죠?”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홍은 초왕이 화난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초왕이 사 온 선물을 왕비가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졌으니 화가 날 수밖에!

하지만 초왕이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으니 사실대로 떠벌릴 수도 없던 기홍도 대충 얼버무렸다.

“왕야께서 급한 일이 있으셔서 가신 것이겠지요. 화는 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화가 나신 것 같아요.”

백천범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왕야께서는 다 좋은데 변덕이 너무 심하시다니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숲에서 거미를 잡아 주시더니 지금은 또 성난 얼굴을 하시잖아요. 설마 제가 왕야를 부려먹는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수원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저리 뻔뻔하게 모르는 척을 하다니!

그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 어제 백천범이 가져온 물건은 초왕이 전부 백천범에게 준 것들이었다. 안 그래도 모양이 다 제각각인 게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정말 공평하게 나눠 줄 생각이었다면 같은 모양을 세 개씩 주어야 했다. 다 다른 모양인 탓에 한참이나 골라야 했고, 혹여 좋은 걸 고르면 뒷말이라도 나올까 섣불리 고를 수도 없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걸 누가 집어 가기라도 하면 기분도 좋지 않았다.

세상 물정에 훤했던 고청접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고청접은 백천범과 수원상이 다 고르길 기다린 뒤에 남은 물건을 챙길 수 있었다.

백천범이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한 것도 아닌데 하필이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만 초왕이 물어보다니, 수원상과 고청접은 초왕이 두 왕비를 어찌 생각할지 걱정이 되었다.

수원상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 백천범에게 몇 마디 뼈 있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기홍과 녹하가 있으니 참았다. 혹여 초왕의 귀에 들어갈까 봐 홀로 분을 삭였다.

더 이상 흥이 나지 않자, 걸교는 이렇게 대충 끝이 났다.

* * *

묵용감은 식식거리며 돌아가던 중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뒤를 뒤따르던 가동과 영구도 조용히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두 사람은 마치 한 쌍의 나무 인형같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초왕의 뒤를 지켰다.

초왕의 불편했던 심기는 바람을 쐬니 금세 누그러졌다. 그는 방금 전 숲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상상을 초월한 그녀의 행동 때문에 정말이지 죽을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몸과 맞닿았을 때의 따스함과 만족감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남모를 달콤함이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기라도 하는 듯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주변을 서성거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다 한참 뒤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가동과 영구에게 손을 내저었다.

“본왕은 후원을 잠시 다녀올 테니 따라올 필요 없다.”

저택에 별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동과 영구는 그에게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났다.

묵용감은 발걸음을 돌려 후원으로 향했다. 커다란 유리잔의 불이 꺼져 있는 걸 보니 걸교를 다 끝내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간 듯했다.

그는 천천히 남월각으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는 머슴이 곧장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왕야를 뵈옵니다.”

묵용감은 짤막하게 대답한 뒤 머슴에게 물었다.

“왕비는 침소에 들었는가?”

“아닙니다. 방금 전에 돌아오셨으니 목욕을 하고 계실 듯합니다.”

머슴의 시원시원한 목소리는 낙성각에까지 전해졌다. 문 앞에 있던 무수리들은 서둘러 추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화장대에 앉아 뒤꽂이를 빼던 수원상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왕야께서 남월각에 가셨다고?”

추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원상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와서 이것 좀 도와다오.”

추문이 그녀 곁으로 다가가 머리를 정돈한 뒤,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안마했다.

“마마, 이러다가 왕비가 저택에 계속 남아 있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수원상이 여전히 담담한 모습으로 말했다.

“남아 있으면 남아 있는 것이지. 왕야께서 왕비를 마음에 두고 계시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왕야께서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사의 장녀이신 마마를 측왕비로 두시다니요. 황제 폐하께서 분명 언질을 주신 일인데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왕비가 저택을 나간 뒤에 시집을 오셨어도 늦지 않았을 뻔했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소인이 다 억울합니다…….”

“억울할 것 없다.”

수원상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쩌면 이게 내 운명인지도 모르지.”

“마마.”

추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지중지 키운 천금 같은 딸에게 주인어른과 마님이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데……. 누구보다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주인이 첩으로 지내다니.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마마, 너무 걱정 마시옵소서. 소인이 보기에 백씨 아가씨는 운도 없고 철도 없는 사람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렇게 생각 없는 사람이 왕비 자리에 있으면 조만간 왕야의 체면을 크게 깎아내릴 것입니다. 그땐 왕야께서도 마마를 인정해 주시겠지요.”

수원상은 추문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걸 알고 있었다. 칠석을 이렇게 보낸 그녀의 마음은 작은 바늘로 끊임없이 찌르는 듯 고통스러웠다. 이 시간에 왕야가 남월각을 찾았으니 내일 아침 백천범이 회임을 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 * *

묵용감은 조심스레 문 앞으로 다가가 발을 걷어 올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백천범은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빼내고 있었다. 그녀는 턱을 괸 채 거울에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명절을 쇠면 이게 참 안 좋아. 장신구를 이렇게나 많이 꽂으니 평소보다 머리가 두 배는 더 무겁다니까. 목이 안 부러지는 게 천만다행이지.”

월향이 웃으며 말했다.

“마마, 시집오실 땐 훨씬 더 무거운 봉관도 쓰셨는데, 이 장신구로 어찌 목이 부러지겠습니까?”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신방에 들었을 때 바로 벗었어. 원래는 동주東珠 몇 알을 떼어 내려고 했는데 너무 촘촘하게 박혀 있어서 아무리 힘을 줘도 떼어지지 않는 거야. 그래서 그냥 내던졌지, 뭐.”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멀쩡한 봉관에서 진주를 떼어 내려 하시다니요. 동주가 그리 좋으시면 왕야께 사 달라고 하면 그만인 걸요.”

“그땐 아직 왕야의 얼굴도 보지 못했을 때인걸. 사람들이 초왕은 극악무도한 데다 얼굴도 흉측하다는데 어찌 남아 있을 수 있었겠어. 그래서 동주를 돈으로 바꿔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그랬지.”

그녀가 초왕에 대한 소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자 월향과 월규는 무서우면서도 조금 우스웠다.

“마마, 그 말씀은 다시는 꺼내지 마시어요. 혹시라도 왕야 귀에 들어갔다간 정말 큰일 날 것입니다.”

백천범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날 도망가려다가 잘못해서 회림각으로 들어갔을 때, 왕야가 왕야인 줄 몰라서 다 얘기했는데? 그런데도 왕야는 화가 나 보이시진 않았어.”

월향과 월규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설마 그날 왕야가 왕비를 좋아하게 되었단 말인가? 왕야가 왕비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던 묵용감은 예전 일이 생각나 웃음을 금치 못했다. 막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또다시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소문은 정말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사실 왕야는 흉측하기는커녕 잘생기셨잖아. 다들 진왕야가 잘생겼다는데 나는 우리 왕야께서 진왕보다 더 잘생기셨다고 생각해. 몸도 튼튼하고 키도 크고 말이야.”

그는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누군가 그의 외모를 칭찬하면 성이 났지만, 그녀에게 들으니 기분이 전혀 달랐다. 그녀의 말은 마치 꿀을 발라 놓은 듯 달콤했다. 외모를 칭찬하는 것은 자신이 좋다는 뜻이란 말인가?

월규가 그녀를 놀렸다.

“우리 왕야께서는 말이 필요 없으신 분이시지요. 재주며 용모며 더 나무랄 게 없으신 분이십니다. 왕비 마마께서도 그런 왕야가 좋으십니까?”

묵용감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쿵쾅거렸다. 과거를 치르고 합격자 명단이 붙길 기다리는 유생처럼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백천범이 말했다.

“좋아하지. 왕야는 내 오빠와 다름없는걸.”

그는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금세 풀이 죽었다.

월향이 말했다.

“오라버니와 다름없다니요. 왕야께서는 왕비 마마의 부군이십니다.”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으시잖아. 내가 다 크길 기다리면 왕야는 늙고 말 거야.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중간에 끼어 있으니 어쨌든 나는 이곳을 나가야만 돼.”

월규가 대꾸를 하려는데 백천범이 화제를 돌렸다.

“너희는 사내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몽둥이를 본 적 있어?”

월규가 물었다.

“무슨 몽둥이 말씀이십니까?”

백천범이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나도 못 봤어. 왕야께서 몸에 숨기고 다니시는데, 사내라면 다 지니고 다닌대. 게다가 이건 사내들의 금기라서 함부로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하셨어. 나중에 나한테 보여주시겠대.”

월향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보지 못하셨다면서 어찌 아신 것입니까?”

“내가 만져 봤거든. 짤막한 몽둥이를 바지 속에 숨기고 있었는데 옷에 덮여 있으니까 꽤 뜨겁더라고.”

두 시녀는 그녀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그녀들은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백천범은 그런 두 시녀가 이상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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