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넘어지려는 그녀를 품에 안느라 잠시 비틀거린 묵용감은 몸을 뒤로 기울인 채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희미한 등불이 비추는 공간에서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웃음이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왕비, 본왕에게 절이라도 하려는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가슴에 얹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의 허리를 힘껏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백천범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묵용감의 뒤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말했다.
“왕야, 어떻게 서 있는 거예요? 이렇게 비스듬히 서 있는데 넘어지지도 않는 거예요?”
이렇게 비스듬히 서 있기 위해 꽤나 큰 힘이 들어갔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 움직이지 마시오. 안 그랬다간 두 사람 모두 넘어질 테니.”
그의 말에 백천범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얇은 여름 적삼 덕에 묵용감의 몸이 조금씩 뜨거워진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자신이 몸을 기대면 그의 몸이 더 뜨거워질 것만 같았다.
“왕야, 열이 나시는 것이에요?”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짚은 그녀는 땀이 잔뜩 흐른 것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말했다.
“왕야,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어서 똑바로 일어서 보세요. 아니면 아예 넘어져도 괜찮아요. 이렇게 오래 비스듬히 서 있는데 힘들지도 않으세요?”
사랑하는 여인이 품 안에 있으니 초왕의 심장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던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천천히 일어설 테니 왕비가 움직이지만 않으면 되오.”
백천범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움직이지 않았고, 작은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며 조심스레 말했다.
“왕야, 제가 힘을 주어서 왕야를 끌어당기면 어떨까요?”
묵용감이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소. 움직이지만 않으면 되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자 그는 조금 난감했다. 손을 풀자니 아쉽고, 안 풀자니 그녀에게 비웃음을 살 것 같았다. 스무 해가 훨씬 넘게 살면서 이렇게 난감한 적은 처음일 정도였다.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백천범은 무언가 느껴진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의 몸에 있는 단단한 무언가를 움켜쥐며 물었다.
“왕야, 몸에 무얼 감추고 계신 거예요?”
묵용감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온몸에 열기가 가득 차올라서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눈앞은 별이 맴돌듯 끊임없이 번쩍거렸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만, 만지지 마시오!”
백천범은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손을 놓았다.
“왕야, 왜 그러세요? 대체 어디가 불편하신 것이에요?”
그녀가 손을 놓자 밀려오는 상실감에 묵용감은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와 함께 땅으로 주저앉았다. 다행히 그의 몸 위로 떨어진 백천범은 다친 곳 없어 보였다.
백천범은 서둘러 손에 쥔 물건을 내려놓고 묵용감을 일으켰다.
“왕야, 괜찮으세요?”
묵용감은 소매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정말인지 혼이 다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만약 그 순간 그녀의 몸집이 너무 작다고 생각하지만 않았다면, 정말 당장에라도 어떻게 했을지 모를 만큼 아찔한 순간이었다.
“괜찮소.”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목을 한 차례 가다듬고는 방금 그녀의 행동을 되새겼다. 돌이켜 보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백천범은 정말 이런 쪽으로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긴, 그간 알려 주는 이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백천범이 기어코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왕야, 몸에 무엇을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 몽둥이예요?”
묵용감은 어물쩍거리며 대충 그렇다고 대꾸했다.
그의 반응에 더 궁금해진 그녀가 물었다.
“사내들이 몸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저도 들은 적 있지만, 몽둥이를 차고 다니는 것은 처음 봤어요. 다른 사내들도 지니고 다니는 것이에요? 아님 무관들만 지니는 것이에요?”
묵용감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제법 진지하게 답했다.
“모든 사내들이 지니고 다니는 것이오.”
백천범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부님이 지니고 다니는 것은 못 본 것 같은데……. 내일 한번 물어봐야겠어요.”
그에 묵용감은 질색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건 안 되오. 이 일은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사내들의 금기란 말이오.”
백천범은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고개를 치켜세우며 물었다.
“어째서요? 어째서 금기인 것이에요?”
그녀에게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던 묵용감은 얼굴이 빨개진 채 그저 으름장을 놓을 뿐이었다.
“사내들의 일에 그리 시시콜콜 캐물어서는 안 되오. 어쨌든 내 말만 잘 기억하시오. 왕비의 사부든 다른 사내든 아무에게도 물어선 안 되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으면 내게 와서 물으시오. 안 그랬다간 곤장을 내릴 테니.”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왕야께는 금기가 아닌 것이에요? 그럼 한 번만 꺼내서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
묵은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기분이었다. 이리도 부끄러움 없는 계집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묵용감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술을 올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은 보여줄 수 없소. 시일이 좀 더 지나면 그때 보여 주겠소.”
백천범이 기뻐하며 말했다.
“네! 기다릴 테니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생각할수록 마음이 들떠 참기 힘들었던 묵용감은 백천범을 끌어안고 마구 문지르며 괴롭혔다. 조금은 모자란 계집을 좋아하게 되니 그 또한 조금 모자라지는 듯했다.
백천범은 까르르 웃으며 애원했다.
“왕야, 그만 하시어요, 저는 간지럼을 잘 타서 너무 간지럽단 말이에요.”
* * *
숲에서 희미하게 남녀의 말소리가 들려왔을 때,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기홍은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고 고청접은 경멸하는 표정을, 수원상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수원상을 잘 알고 있던 추문만이 그녀 눈에 서린 원망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단 말인가? 숲속에 있는 두 사람은 밖의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시시덕거렸다.
그러다 이내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둔탁한 소리인 걸 보니 누군가 넘어진 듯했다. 초왕이 넘어진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왕비? 아니면 둘이 같이 넘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저택에 방이 이리도 많은데 방에 들어가 문이라도 걸어 잠그고 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숲에 숨어들어 가서 저러는 것인가? 저 두 사람은 낯짝이 두껍다 해도 수원상은 수치심이 밀려왔다.
수원상의 손바닥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가 제 손을 바라보니 새끼손톱이 부러져 있었다.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여름밤 공기에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실려 있어 숨쉬기 힘들었다. 그녀의 등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땀이 배어 있었다.
사실 그녀에게 체면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어쨌든 이곳에 모른 척 숨어 있으면 남들이 하는 괴상한 말 따위는 듣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그녀는 변변치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가 자신을 매일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원을 꾸미며 담소를 나누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함께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그녀는 그런 것들이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문무에 모두 능한 데다 단정한 외모를 가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여인은 아무도 없을 테니, 그녀 자신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도 위엄 있는 사내가 따뜻하게 대해 주는데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금방 빠져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
그가 설사 그녀를 본처로 삼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이렇게 날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았다. 다른 것들은 다 허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잘해 주었고 그녀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어느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요즘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다시 그녀에게 관심을 줄지도 미지수였다.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그녀는 싸늘하게 메말라 가고 있었다.
숲에서 나는 소리가 갑작스레 커지더니 백천범의 원망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 왕야 때문이에요. 거의 잡을 수 있었는데.”
초왕을 대하는 왕비의 태도에 밖에 있던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담력이 좋다 못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수준이었다. 하지만 초왕은 그런 그녀의 말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본인이 잘못해 놓고 본왕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오?”
할 말이 없어진 백천범은 묵용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가 하나 잡아 주면 될 것 아니오? 두고 보시오. 분명 왕비가 잡은 것들보다는 훨씬 좋을 테니.”
말소리를 들어 보니 두 사람과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잠시 뒤, 백천범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잡았어요! 어서, 상자 안에 넣어 주세요.”
수원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크고 작은 두 사람의 형체가 숲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백천범은 양손 가득 거미를 잡은 상자를 든 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고, 묵용감의 손에는 등이 쥐어져 있었다.
무려 초왕에게 등을 들게 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계집이었다. 수원상은 입꼬리를 올려 그 모습을 비웃었다.
백천범은 자신의 상자 다섯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상자 위에 표시를 해 두며 중얼거렸다.
“헷갈리면 안 되지. 내일 아침 내가 꼭 일등을 해야 하니까 너희 모두 힘내야 해.”
옆에서 허리를 굽힌 채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묵용감은 그녀에게서 나는 옅은 계화꽃 향을 맡았다.
“내가 사다 준 계화꽃 기름으로 머리를 감은 것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왕야께서 주신 계화꽃 기름은 서왕비가 가져갔고, 저는 측왕비가 준 것으로 감았습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본왕이 사다 준 걸 왜 서왕비가 가져갔단 말이오?”
그가 대놓고 큰 소리로 책망하자 깜짝 놀란 고청접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와 해명했다.
“왕야, 노여워 마시옵소서. 소첩도 갖지 않겠다고 했으나 왕비 마마께서 기어코 넘겨주시는 통에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왕야께서 특별히 나눠 가지라고 하셨기에 소첩도…….”
묵용감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백천범 그녀에게만 주려고 산 것을 저들에게 나눠 주었다니! 그녀는 애당초 그의 선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었다. 어쩐지, 그 자리에 보자기까지 가져왔던 걸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녀 혼자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