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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31)화 (130/1,192)

제131화

묵용감은 기홍과 녹하도 후원에서 세 왕비와 함께 걸교를 할 수 있게 허락했다. 다섯 여인은 방석에 무릎을 꿇고 합장한 뒤, 두 눈을 감고 달과 직녀성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백천범은 수원상의 왼쪽 뒤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작은 몸집을 꼿꼿하게 세운 채 뾰족한 턱을 살짝 치켜든 그녀의 얼굴은 마치 푸른 청자처럼 빛났다.

묵용감은 나무 뒤에 서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절하자 꿈에서 깬 듯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린 계집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그의 명성은 땅에 곤두박질칠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는 사람인 것을. 만일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달을 따 오라 명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가 좋았다.

백천범은 눈을 감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무사 평안을 빈 뒤, 여느 여인들처럼 좋은 낭군을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그녀를 해하거나 죽이려 하지 않고, 시부모님과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수 있다면 이번 생에는 더 바랄 게 없을 것이었다.

소원을 빈 뒤 수원상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달빛이 참으로 예쁩니다. 이제 그만 실을 꿰는 게 어떠신지요. 보나마나 녹하 아가씨가 가장 빨리 꿰겠지만 말입니다.”

녹하가 겸손하게 말했다.

“소인을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입니다. 소인은 그저 바느질을 자주 하는 것뿐이지요. 제가 보기엔 측비 마마와 서비 마마께서 솜씨가 더 좋으실 듯합니다.”

백천범은 녹하가 자신을 언급하지 않자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제 솜씨는 별로인가 보네요. 저는 토우 인형도 빚을 수 있는걸요.”

녹하가 입을 삐죽거렸다.

“아이고, 왕비 마마. 주머니에 수 하나 놓는 것도 손가락마다 피가 맺혀 왕야의 마음을 아프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백천범은 반박할 수 없는 녹하의 말에 멋쩍게 웃었다.

“어쨌든 오늘 인형 빚는 내기를 했다면 제가 분명 이겼을 텐데, 너무 아쉽네요.”

녹하의 말에 수원상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시녀에게 바늘과 실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나누어 준 바늘과 실로 달빛 아래에서 꿰기 위해서였다.

이때 사용하는 바늘은 평소 쓰던 자수 바늘보다 더 작고 바늘귀도 좁았다. 등불을 켜고 꿴다고 해도 쉽지 않은데 어렴풋한 달빛에 비추어 꿰어야 하니 더욱더 침착하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했다.

백천범은 양손에 바늘과 실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탓에 한참이 지나도 바늘귀에 실을 꿰지 못하고 있는데 시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녹하 아가씨 두 가닥, 측비 마마 한 가닥, 기홍 아가씨 한 가닥…….”

실을 한 가닥 꿰면 시녀가 곧장 상황을 알렸다. 그 소리에 더욱 긴장된 백천범은 힘을 과하게 준 나머지 손끝이 바늘에 찔렸고, 동시에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한쪽에 서 있던 월향과 월규가 곧장 그녀에게 향했지만 그들이 손 쓸 틈도 없이 커다란 체구의 사내에게 가로막혔다. 그 사내는 상처가 난 왕비의 손가락을 재빨리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자신의 입에 머금었다.

“…….”

“…….”

“…….”

백천범과 수원상, 고청접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기홍과 녹하는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백천범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왕야, 방금 전 흙을 만지고 손을 닦지 않았는걸요.”

묵용감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다행히 밤이라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혀끝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휘감았다가 떼어낸 뒤 괜스레 거친 목소리로 꾸짖었다.

“수를 자주 놓기에 이제 좀 실력이 나아졌나 했더니, 또 이게 무슨 꼴이오? 관두시오. 어차피 솜씨도 없으니.”

그는 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손가락을 달빛에 비춰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손가락 끝이 살짝 붉긴 했지만 피는 멎었으니 분명 괜찮을 것이었다.

수원상의 심장이 돌연 불안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정녕 백천범을 여동생으로 여기는 모습이란 말인가? 세상 어느 오라버니가 여동생에게 이리 대한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묵용감을 바라보던 고청접은 다시 수원상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어쨌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질투에 눈이 먼 수원상이 무슨 짓을 꾸민다면 가만히 앉아 남의 덕을 볼 수 있었으니 고청접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탐내는 자리는 정비가 아닌 측왕비였기 때문이다.

그때, 녹하가 일곱 가닥의 칠색 실을 모두 꿰었고 기홍과 수원상은 여섯 가닥, 고청접은 다섯 가닥을 꿰었다. 백천범은 어떻게 해서든 한 가닥이라도 꿰어야겠다고 결심하며 바늘과 실을 들었다.

그녀가 다시 바늘을 쥐자 묵용감이 그녀를 말렸다.

“어찌 이리 말을 안 듣는 것이오. 그만하시오. 이런 것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

백천범은 울상을 하며 말했다.

“왕야, 저도 성공해서 재주 많은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이에요.”

묵용감에게 그녀의 말은 늘 재미있었다.

“누가 왕비더러 똑똑하지 않다 하였소? 본왕의 눈에 왕비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오!”

백천범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왕야께서 그리 말씀해 주신다 한들 제가 직접 꿰어야 해요. 어쨌든 한 가닥이라도 꼭 꿰어야겠어요.”

다른 여인들은 이미 일곱 가닥을 모두 꿴 뒤였다. 그들은 묵용감이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두 사람의 말씨름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백천범을 꺾을 수 없었던 묵용감은 잠시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본왕이 대신 꿰는 게 어떻겠소?”

백천범이 그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왕야께서 저 대신 밥도 드셔 주실 것입니까?”

그녀가 쏘아붙이자 얼굴이 붉어진 묵용감은 벌컥 성이 났다. 다 그녀를 위해 하는 소린데 어린 계집은 도무지 받아들일 줄을 몰랐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좋소. 맘대로 하시오. 또 한 번 찔려도 싸지.”

백천범은 이를 악물더니 바늘과 실을 집어 들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자그마한 바늘귀를 들여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빨간색 실이 바늘귀에 가까워졌다. 실 끝은 바늘귀 앞에서 몇 차례 맴돌다가 천천히 꿰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반대쪽으로 손을 가져가 실을 붙잡은 뒤 그대로 잡아당겼다. 참았던 숨을 그제야 내쉰 그녀는 기쁜 표정을 지은 채 묵용감에게 보여 주었다.

“왕야, 제가 해냈어요!”

그녀의 환한 웃음에 묵용감은 잠시 서운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그 또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잘했소. 본왕이 상을 주어야겠군. 필요한 것 없소?”

백천범이 잠시 멈칫하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왕야, 상은 녹하 언니에게 주셔야 합니다. 언니가 가장 먼저 꿰었거든요.”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각각 일등과 꼴찌를 했으니 둘 모두에게 주겠소. 비록 한 가닥밖에 꿰지 못했지만 끝까지 노력하는 왕비의 모습은 충분히 높이 평가할 만했소. 말해 보시오. 무엇이 필요하오?”

백천범은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했다.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걸요. 기억해 두었다가 필요한 게 생각나면 다시 왕야께 말씀 드릴게요.”

그런 그녀가 귀여웠던 묵용감은 그녀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좋소. 우선 기억해 두겠소. 이리 많은 사람이 다 지켜보았으니 나중에 발뺌할 수도 없겠군.”

그가 잠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녹하에게는 은 열 냥을 상으로 내리겠다.”

그의 말에 다른 시녀들이 헉 소리를 내며 깜짝 놀랐다. 아무리 녹하가 회림각의 최고 시녀라 해도 급여는 매달 은자 한 냥에 불과했다. 그런데 은 열 냥이라니! 그녀의 일 년 치 봉급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녹하는 황급히 초왕에게 무릎을 꿇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게 다 백천범 덕분이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초왕은 왕비 앞에서 자신의 인심이 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을 꿴 뒤에는 백천범이 가장 기다리던 순서인 갈거미잡기가 이어졌다.

갈거미잡기는 잡은 거미를 상자에 넣어 다음날 아침 상자 안에 거미줄이 얼마나 촘촘하게 엮여 있는지 확인하는 게 다였다. 백 승상 집에 있던 그녀의 자매들은 거미를 무서워해 시녀들이 대신 거미를 잡았다.

하지만 백천범은 달랐다.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 그녀는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갈거미를 찾았다. 아쉽게도 그런 그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백천범을 응원하는 이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분명 자매들에게 좋은 갈거미를 대신 찾아 줬을 것이다.

이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시간이 되자 그녀의 몸이 근질근질했다.

월규가 말했다.

“왕비 마마, 잠시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좋은 거미로 잡아 오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내가 직접 갈 거야. 내가 얼마나 좋은 걸로 잡아 오는지 이따 봐봐.”

거미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나 키가 작은 관목이 모여 있는 곳이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백천범은 소매에 작은 상자 다섯 개를 미리 넣어 두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한 마리만 잡지만 그녀는 다섯 마리를 잡을 계획이었다. 상태가 좋은 거미를 한 마리만 잡으면 운이 좋은 거지만, 다섯 마리를 잡는 것은 진정한 재능이었다.

다섯 여인 중 백천범과 녹하만 직접 갈거미를 잡으러 갔고, 다른 여인들은 시녀가 대신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의 자그마한 몸이 나무 뒤로 사라지자 신경이 쓰여 조심스레 그녀 뒤를 밟았다.

그가 움직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수원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더 의심할 것도 없이 제 짐작이 틀림없었다. 여동생은 무슨, 백천범이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녀가 정비 자리에 오르는 것도 불확실했다. 무려 대학사의 장녀가 다른 이의 첩이 되다니! 비록 지위가 높은 초왕의 첩이었지만 그래도 수원상에겐 그리 체면이 서는 일은 아니었다.

혼사가 정해진 그녀의 몇몇 여동생들은 모두 정실이 될 예정이었다. 친정 부모님이 자신을 온 힘을 다해 보살피고 빈틈없이 길렀는데 결국 첩이 되다니. 그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백천범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풀숲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손에 든 작은 등이 희미하게 그녀 앞을 비추었다.

운이 좋았는지 그녀는 숲으로 들어가자마자 작은 갈거미를 찾았다. 가느다란 거미줄을 뽑아내는 갈거미를 작은 상자에 담은 뒤 다시 상자를 소매에 넣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다른 거미를 찾으러 갔다.

거미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는 땅 위로 구불구불 올라와 있는 나무뿌리를 제대로 보지 못해 발이 걸리고 말았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지던 그녀는 양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 막대와 등을 내던질 수 없어 그대로 고꾸라졌다.

어차피 넘어지는 것은 그녀의 주특기 중 하나였으니 별일 아니었다. 지금은 막대와 등이 망가지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녀가 넘어진 곳은 땅바닥이 아니라 포근한 품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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