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샀다. 마갈락도 몇 종류나 더 샀다. 가마에서 구운 인형 말고도 상아를 조각해 만들거나 박달나무나 여러 잡목에 조각한 인형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갈락을 장식한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채색한 나무로 받침을 만들었고, 어떤 것은 푸른색 덮개로 덮여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장난감도 다양했다. 그가 장신구 가게에서 산 것은 보석으로 장식된 마갈락이었다.
묵용감은 물건을 사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고 돈은 가동이, 짐은 영구가 담당했다. 세 사람은 거리를 한참 거닌 뒤에야 저택으로 돌아갔다. 대문을 들어선 묵용감이 가동에게 분부했다.
“가서 왕비를 데려오너라.”
초왕이 다시 왕비에게 잘해 주자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진 가동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쏜살같이 뛰어갔다.
기분이 좋아진 묵용감은 다시 편안한 안색을 되찾았다. 학평관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에 차씨가 중문에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묵용감이 물었다.
“네 사부는 좀 나아졌느냐?”
“왕야께 아룁니다. 어제 왕야께서 주신 연고를 바르니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오늘 왕야께 대신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 * *
가동을 본 백천범은 신이 나서 그를 사부님이라고 부르며 뛰어왔다. 그리곤 그에게 권법을 선보이기 위해 그를 정원으로 끌고 갔다. 가동은 마음대로 묵용감 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백천범을 찾을 기회가 적었다.
가동은 할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그녀 손에 이끌려 정원으로 향했다. 진지하게 자세를 취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동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동작 하나하나 모두 정확한 걸 보니 그간 백천범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쉽지 않은 무술 연마를 꾸준히 지속하는 모습은 아무리 제자라 할지라도 존경할 만한 일이었다.
역시 왕비는 평범한 다른 여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끊임없는 내뱉는 그녀의 기합 소리도 무척이나 씩씩했다.
자연스레 낙성각까지도 그녀의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추문은 정원에 서서 발끝을 들어 올려 남월각을 바라보았다. 권법을 연습하는 백천범의 모습에 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백천범과 함께 있는 가동을 보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가동이 남월각에는 무엇 하러 왔단 말인가? 설마 왕야가 온 것이란 말인가?
추문이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백천범은 연습을 끝내고 가동과 재잘대며 떠들었다. 가동은 싫은 기색을 보였지만 백천범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애교를 부렸고, 결국 그는 백천범을 따라 방 안으로 향했다. 어찌나 친밀한지 평범한 사이는 아닌 듯했다.
추문은 눈을 한 번 굴리더니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지어 보였다. 호위무사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다니!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 * *
목욕을 한 뒤에도 백천범이 보이지 않자 묵용감은 영구에게 말했다.
“가동은 이런 일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아직까지 꾸물댄단 말이냐? 네가 가 보거라.”
영구는 곧장 대답을 올린 뒤 밖으로 향했다. 막 반월문에 도착했을 때 백천범을 데려오는 가동과 마주친 그는 곧장 예를 갖춘 뒤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어서 가 보십시오. 왕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동에게서 묵용감이 걸교에 필요한 물건을 사 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백천범은 깡충깡충 뛰며 기뻐했다. 신이 난 그녀는 영구에게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앞으로 향했다.
가동이 그녀를 뒤따르려 하자 영구가 막아섰다.
“지금 가면 곤장을 맞을 것입니다. 왕비 마마를 보시고 왕야께서 기분이 좋아지시거든 들어가십시오.”
가동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영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왕야께서 분부하신 일은 서둘러 처리해야 하는 법이지요. 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다니는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왕비 마마께서 오셨으니 왕야도 가벼운 처벌을 주실 겁니다.”
가동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게 내 책임이라고? 왕비 마마께서 오랫동안 사부를 보지 못했다고 몇 마디 하시는 걸 들어 드린 것뿐인데. 게다가 왕야께서는 돌아오시면 목욕을 하시니 급히 와도 마마께서 기다려야 하잖아?”
영구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째서 머리를 굴리지 않아야 할 땐 머리를 굴리고, 굴려야 할 땐 굴리지 않는 것입니까? 호위무사가 주인의 마음을 그리도 모를 수 있습니까?”
가동이 맹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야의 마음이 어떤데?”
영구는 바보 같은 그의 표정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도 성가셨다. 그가 발걸음을 돌리자 가동이 넉살 좋게 그의 뒤를 따랐다.
“영구야,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 봐. 내일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 * *
백천범은 서둘러 서재 앞으로 뛰어가다가 급히 규율이 생각나 조심스레 문발 앞에 서서 말했다.
“왕야, 저 왔습니다.”
팔걸이의자에 앉아 군수 물자 목록을 보고 있던 묵용감은 그녀의 목소리에 뛸 듯이 기뻤지만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시오.”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간 백천범은 쏜살같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그리곤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왕야, 왕야께서 내일 있을 걸교에 필요한 물건을 사 오셨다면서요? 사부님께 들었어요!”
묵용감은 여전히 공문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턱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저쪽에 있으니 가서 보시오.”
백천범은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창가 쪽 탁자로 향했다. 탁자에 놓여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좋은 것들이었다. 계화꽃 기름, 칠색 실, 은 바늘, 견우와 직녀 인형, 원앙 조각, 걸과 등등…….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다양한 마갈락 인형이었다. 어느 하나 똑같은 것 없이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하나만 고르기는 아쉬웠는지 이것저것 들어 보며 고민했다.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 또한 기분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고를 게 뭐 있소, 전부 가져가시오.”
백천범은 몸을 돌려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왕야.”
보자기를 준비해 온 그녀는 탁자 위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보자기 안에 쌌다. 틈새 하나 없이 꼼꼼히 싸맨 그녀는 어깨에 보따리를 걸머지고 활짝 웃으며 묵용감에게 손을 흔들었다.
“왕야, 전 이만 가 볼게요.”
“…….”
정신없는 시장에서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사 온 것들인데 고맙다는 말만 던지고 그대로 가져가 버리다니!
하지만 백천범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따리를 들고 문을 나섰다.
입구에 서 있던 가동과 영구도 물건을 가지고 그대로 가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처음 그들이 예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은 백천범이 묵용감과 한바탕 이야기를 나눈 뒤, 함께 점심을 먹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갈 때 무수리를 통해 물건들을 남월각에 보낼 거라고 생각했건만.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던 묵용감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백천범은 그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 * *
보자기를 들고 곧장 낙성각으로 향한 백천범은 문을 들어서며 소리쳤다.
“언니, 제가 좋은 것들을 가져왔어요.”
수원상이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제게 무슨 좋은 것을 주시려고요?”
백천범은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방 안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서 봐요. 장담하는데 언니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
수원상은 그녀 어깨에 짐이 짊어져 있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시려는 것입니까?”
“아뇨.”
백천범은 마루에 도착해서야 보자기를 내려놓고 매듭을 풀었다.
“짠! 왕야께서 준비해 주신 것이에요. 언니는 뭐가 좋아요? 맘껏 골라 보세요.”
그녀가 추문에게도 말했다.
“청접 언니도 불러 주세요. 분명 좋아할 거예요.”
추문이 뻔뻔하게 말했다.
“왕비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측비 마마께 약을 올려야 해서 갈 수 없습니다.”
수원상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야지, 그게 무슨 말대꾸냐?”
백천범이 수원상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언니, 어디 아파요? 많이 안 좋은 거예요?”
“어젯밤 찬 바람을 쐬어서 그런 것이지 심한 것은 아닙니다.”
“의원은 불렀어요?”
“아뇨, 그저 단순한 감기일 뿐입니다. 시녀에게 약을 지어 오라 하면 될 일입니다.”
수원상은 고청접을 데려올 무수리를 보낸 뒤, 고개를 숙여 백천범이 가져온 물건을 살폈다.
“왕야도 참, 어떤 것은 하나뿐이고, 또 어떤 것은 두 개뿐이니 어찌 나눠야 한단 말입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두 언니가 먼저 고르고 남는 건 제가 가질게요.”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왕비 마마가 당연히 먼저 고르셔야지요.”
“저는 나이가 제일 어리니까 가장 늦게 골라야 해요. 언니들이 먼저 고르셔요. 순서대로 고르는 게 제일 공평해요.”
수원상은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직 초왕의 태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남는 물건을 백천범에게 주었다가 또 벌로 무릎을 꿇을지도 몰랐다.
백천범을 바라보던 수원상은 이 어린 계집이 자신을 이용해 일부러 불쌍한 척 초왕의 동정을 사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청접이 들어왔다. 그녀는 초왕이 부인들을 위해 선물을 사 왔다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세 여인 중 가장 그의 눈 밖에 난 것은 자신이라고 고청접은 생각했었다. 하지만 잊지 않고 모두의 선물을 사 온 것을 보니 그는 공평한 사람인 듯했다. 평소에는 냉정하고 차갑지만 이렇게 따뜻한 면이 있을 줄이야! 정말 찾기 힘든 사내였다.
그녀는 요즘 들어 홀로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보다 그가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길 바라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하루빨리 귀한 아들을 낳는 것에만 몰두할 생각이었다.
* * *
칠석이 되면 집집마다 정원에 제단을 두고 제사 음식을 차린 뒤, 직녀성 방향으로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그래서 칠석 당일에는 성 안에 향냄새가 진동했다. 게다가 집집마다 걸어 놓은 등롱 덕분에 분위기가 떠들썩했다.
특히나 대갓집들은 더욱 성대하게 제사를 치렀고, 수원상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집안의 장녀였기 때문에 걸교를 도맡아 진행했었다. 이번 칠석은 시집온 뒤 처음 주관하는 행사인 만큼 초왕이 감탄할 만한 제대로 된 행사를 보여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