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백천범은 얌전히 그의 손에 이끌려 정원으로 향했다. 그녀의 큰오빠도 늘 이렇게 손을 잡아 주었기에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싫은 기색 없이 순순히 따르자 묵용감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온몸이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게 꼭 봄바람을 맞는 듯했다. 그저 정원으로 향하는 이 길을 조금만 더 느리게 걷고 싶을 뿐이었다.
해가 꼭대기에 걸린 정오였던지라 햇살도 뜨거웠고, 푹푹 찌는 듯 무더웠다. 회랑을 걷고 있어 햇살은 피할 수는 있었지만,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천범은 묵용감을 힐끔거렸다. 덥지도 않은 것인지, 그가 너무 천천히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묵용감은 전혀 덥지 않았다. 이까짓 더운 날씨가 무슨 대수라고! 그녀와 함께라면 사막에서 산책을 한다 해도 신이 날 것 같았다.
그녀의 통통하고 보들보들한 손을 잡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그는 이 기분을 오래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모르는 어린 계집아이는 손을 빼내더니 가볍게 털며 말했다.
“땀이 너무 많이 났어요. 왕야는 덥지도 않으세요?”
묵용감의 손에도 땀이 나 축축했다. 바람이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손을 쥐고 있었으니 땀이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그는 손안이 휑해짐과 동시에 마음까지 허해진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엔 실망스러움이 역력했다.
회랑이라고 해 봤자 길이가 얼마 되지 않아 잠시 걸으면 길이 끝났다. 역시나 기홍은 정자에 있었다. 그녀는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지 무수리들과 함께 상을 차리고 있었다.
백천범은 서둘러 뛰어가더니 있는 힘껏 그녀를 껴안으며 끊임없이 언니라고 불러 댔다.
기홍도 그녀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묵용감이 뒤따라오자 먼저 예를 갖춰 그녀에게 인사를 올린 뒤 웃으며 말했다.
“소인, 왕비 마마께서 오실 걸 알고 특별히 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많이 드십시오.”
그녀가 백천범을 살펴보며 말했다.
“소인의 음식을 한동안 못 드셨는데도 그리 마르신 것 같진 않습니다.”
묵용감은 자리에 앉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깊게 고민하는 법이 없던 백천범은 그가 한동안 모질게 대했어도 마음에 담아 두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잘만 먹고 잘만 지냈다. 헌데 어찌 살이 빠지겠는가.
한바탕 반가운 마음을 쏟아낸 뒤, 백천범은 곧장 식탁을 살펴보았다. 눈을 부릅뜨고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니 맛있는 음식뿐이었다.
그간 회림각과 기홍, 그녀의 손맛까지 그리웠던 백천범은 드디어 그녀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둘러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끊임없이 이걸 먹겠다, 저걸 먹겠다 재잘거리는 백천범의 요구에 기홍은 활짝 웃으며 응했고, 가끔씩 그녀가 너무 기름진 음식만 먹는다며 한두 마디 거들기도 했다. 고요하기만 했던 식사 시간이 그녀 때문에 다시 떠들썩해졌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묵용감도 그녀로 인한 떠들썩함은 퍽 좋았다. 그는 움츠러들지 않고 마음껏 재잘대는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 모습이야말로 꾸미지 않은 진실된 모습이었다.
대갓집 규수인 두 왕비와 밥을 먹을 땐 식사 예절을 지키느라 방 안에 쥐 죽은 듯 고요한 적막만 흘렀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자신이 무얼 먹는지도 몰랐고, 대충 몇 술 뜬 뒤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 시간만 되면 늘 공무를 고민하거나 남월각에 있을 그녀를 걱정했다. 지금처럼 자유롭고 마음이 편안한 식사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한동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 백천범은 급히 먹다 그만 혀를 깨물었고, 앗 소리와 함께 입을 가린 채 자그마한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기홍이 재빨리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마. 혀를 깨무신 것입니까?”
백천범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혀를 깨문 순간 묵용감은 자신의 혀라도 깨문 듯 덩달아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하인들 앞에서 과한 내색을 할 수 없었기에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급히 먹는단 말이오? 식탐을 부리니 그리될 법도 하지!”
그의 비웃음을 산 백천범은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아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언니의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그런 것이지요.”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다 소인 잘못입니다. 소인이 잘못하여 왕비 마마께서 혀를 깨무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미안한 마음이 든 백천범은 멋쩍어하며 말했다.
“언니 탓이 아니에요. 제가 너무 식탐이 많아서 그런 것이에요.”
묵용감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어리바리한 계집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라고 되받아치더니만 다시 자신의 탓이라며 순순히 자백하다니.
그는 백천범이 이미 밥을 두 그릇이나 먹은 데다가 혀까지 다쳤으니 더 먹으라고 권하지 않고 기홍을 불렀다.
“그만 상을 치우거라. 방으로 돌아가 차를 마셔야겠다.”
기홍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무수리들과 음식을 정리했다. 사실 백천범은 조금 더 먹을 수 있었지만 말하기가 난처해 찬합에 음식을 담는 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여전히 입맛을 다시는 그녀가 우스웠던 묵용감은 일부러 그녀를 으르며 말했다.
“혀까지 다쳐 놓고 아직도 먹을 생각뿐이오? 왕비는 돼지띠인가 보오.”
백천범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왕야 말씀이 맞아요. 제가 돼지띠거든요.”
묵용감이 곰곰이 따져 보니 정말 그녀는 돼지띠였다. 아무리 그녀가 계례를 치른 나이라고는 하나, 호랑이띠인 그와는 꽤 차이가 나는 셈이었다. 혹 그녀가 그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별안간 든 생각에 그는 조금 서글퍼졌다. 어린 나이에 자신에게 시집을 올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백천범을 방으로 데려간 묵용감은 창 아래로 그녀를 끌고 갔다.
“입 좀 벌려 보시오.”
그가 자신의 상처를 확인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백천범은 그가 정말 큰오빠처럼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아프지도 않은걸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제 허리를 굽혀 그녀를 구슬렸다.
“그러지 말고 잠시만 벌려 보시오.”
그가 가까이 다가와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그녀가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덧 보데요, 던말 댄타나여.”
그녀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분홍빛의 작은 혀가 그를 현혹하듯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묵용감은 머리에서 윙윙거리는 소리에 끊임없이 마른침을 삼키며 조금씩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내민 혀와 맞닿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귓불을 머금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혀 또한 정신을 잃을 만큼 황홀할 것 같았다.
백천범은 너무 오랜 시간 혀를 내밀었던 나머지 침이 흘러내릴 것 같아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침방울이 흘러내리는 것까진 막지 못했고, 결국 입술 아래로 침이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고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묵용감은 한껏 들떠 있었지만 침 때문에 모든 기회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는 수상쩍은 붉은 기가 돌았다. 그가 몸을 돌려 의자에 앉더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보아하니 별것 아니군. 다음부터는 조심하시오.”
백천범도 난처했던지라 그의 수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창가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말에 답했다.
“예, 주의할게요.”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고, 방 안은 고요한 적막함만 흘렀다. 하지만 묵용감은 그녀가 자신 앞에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넉살이 좋았던 백천범도 금세 잊어버리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왕야, 측왕비 말이 모레가 칠석이라 걸교乞巧를 치를 거래요.”
수원상이 이 일을 언급했을 때 묵용감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저택에 여인이 없었으니 한 번도 치른 적 없었고, 그저 시녀들끼리 모여 작게 흉내만 내는 게 다였다. 하지만 백천범이 말을 꺼내자 그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왕비도 하고 싶소?”
“그럼요.”
백천범이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매년 집에서 얼마나 성대하게 치러졌는데요. 직녀한테 절도 하고, 달빛에 바늘을 비춰 실도 꿰면서 누가 더 빨리 잘하나 시합도 하고요. 그리고 걸과乞果도 먹고, 장마당은 또 얼마나 떠들썩한데요.”
그녀가 손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만한 토우土偶 인형도 어찌나 예쁘던지……. 그리고 계화꽃 기름으로 머리도 감고, 손톱도 물들이고요.”
살짝 머리를 기울인 채 신이 나서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도 자연스레 흥미가 생겼다.
“매년 칠석마다 그리 보낸 것이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휴, 제가 어찌 그렇게 보냈겠어요. 집에 있던 언니와 여동생들은 그렇게 보냈지만 저는 나무 뒤에 숨어 몰래 지켜보기만 했지요.”
묵용감은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끓어올랐다. 정말 가여웠다. 한 번도 제대로 쇤 적도 없으면서 모든 걸 꿰뚫고 있다니.
“올해는 숨어서 지켜보지 마시오. 당신은 왕비요. 왕비가 직접 일을 주관하여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마음껏 보내시오. 필요한 게 있거든 측왕비와 상의하면 되오.”
“저는 모르는 게 많아 일을 주관하긴 어려우니 옆에서 일손을 도울게요.”
백천범이 환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 이 일은 그냥 측왕비에게 맡겨 주시어요.”
묵용감이 말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소.”
이왕 측왕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는 그녀에게 설명을 하고 싶었다.
“왕비가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원칙대로라면 이리 빨리 첩을 들이면 안 되었소. 그 두 왕비는…….”
“왕야, 제게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천범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께서도 어쨌든 사내이시지 않습니까, 사내들은 다 그렇죠……. 헤헤.”
“…….”
사내들이 어쨌다고……. 그는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녀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얄밉게 웃어 보였다.
“왕비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오. 실은…….”
“왕야.”
그녀가 그의 말을 끊더니 뭐라도 아는 양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이런 일을 속속들이 대놓고 말씀하시면 너무 부끄럽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어요. 어차피 아직 어려서 잘 모르니까요.”
묵용감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어려서 잘 모르긴! 그녀는 오히려 얼굴도 붉히지 않고 그보다 더 아무렇지 않게 잘만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