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날씨가 더워지자 처소 곳곳에 얼음 그릇이 놓였지만 학평관은 이마에 땀이 흐를 만큼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차씨를 불러 자신의 몸에 덮여 있는 얇은 요를 걷고 장막을 치라 분부하고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맨몸으로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차씨가 막 그의 분부를 끝냈을 때, 백천범이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저 왔어요.”
그 목소리에 차씨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이고, 세상에나!”
울타리를 치듯 그녀의 앞을 막아선 차씨가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 마마, 어찌 아무 말씀도 없이 이리 곧장 들어오십니까?”
그 사이, 학평관은 서둘러 담요를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꽁꽁 감싼 뒤 차씨에게 호통쳤다.
“왕비 마마께 그게 무슨 말이냐, 그만하거라.”
그가 다시 백천범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소인이 지금 이 꼴로 예를 갖출 수 없어 손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그는 말을 마친 뒤 손가락을 구부려 침대를 톡톡 치는 것으로 절을 대신했다.
“어르신, 제게 그리 예를 갖추시다니요.”
백천범은 웃으며 침대로 다가가 장막 너머의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상처가 심하다던데 많이 아프신지요?”
“계속 아팠는데 왕비 마마께서 오시니 이젠 아프지 않습니다.”
감격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학평관은 눈물까지 흘릴 기세였다.
“소인, 이때껏 주인을 모시면서 병이 난 소인을 위해 찾아오신 주인은 왕비 마마께서 처음이십니다. 소인의 마음이 참으로…….”
말을 내뱉던 그가 감정이 격해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첨을 잘하는 그는 거짓으로 시작한 말에 진짜로 제가 울컥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백천범에게 잘해 주었던 것은 묵용감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였다. 초왕이 그녀에게 잘해 줄 땐, 그 또한 진심을 다해 그녀를 보필했지만, 초왕의 눈 밖에 났을 땐 그도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천범은 자신을 이렇게 찾아와 주었다. 정말 마음이 선한 아이였다.
나이 많은 어른이 울자 백천범은 오히려 제가 더 부끄러워졌다.
“어르신, 그런 일로 울지 마셔요. 왕야께서 오지 않으신 건 분명 잘못하신 것이에요. 인정머리가 없으시잖아요. 어르신이 얼마나 진심을 다해 왕야를 보필하는데, 조금 잘못했다고 엉덩이를 이렇게 못 쓰게 만들어 놓는 건 정말 말도 안 돼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왕야께서는 원래 변덕이 심한 분이시고 소심하시잖아요. 제가 저택에 오자마자 어르신이 저 때문에 곤장을 맞으셔서 정말 죄송했는데, 이번에는 왜 벌을 받으신 거예요? 그것도 이렇게나 심하게 맞으시다니, 무얼 잘못하신 거예요?”
말끝마다 초왕을 나무라는 그녀의 말에 차씨는 입이 떡 벌어졌다. 만약 초왕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크게 혼날 말이었다.
반면, 학평관은 정말인지 목 놓아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초왕의 변덕도, 그가 곤장을 맞은 것도 모두 왕비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평관은 제 입을 꾹 다무는 것밖엔 하지 못했다.
백천범은 자신이 들고 온 선물이 생각나 그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것은 아주 유명한 상점에서 사 온 꽈배기예요. 아주 맛있다니까 한번 드셔 보세요.”
학평관이 황급히 말했다.
“아이고, 왕비 마마, 이리 와 주신 것만으로도 황송한데 이런 것까지 사 오시다니요. 소인 정말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백천범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사실 제가 산 것은 아니고 서왕비가 준 것인데 제가 대신 선심을 쓰는 것뿐이에요.”
“마음만이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그가 차씨에게 말했다.
“어서 잘 받아 두어라. 정오쯤 한번 맛을 봐야겠다.”
차씨는 왕비에게서 선물을 넘겨받아 수납장 가장 위쪽에 올려 두었다. 그는 속으로 왕비의 선물이 관리들의 선물보다 한참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빛이 번쩍이면서 또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차씨는 등을 진 채 소리쳤다.
“또 누가 아무 말도 없이 방을 들어와? 대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백천범이 왕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정말 뒤에 묵용감이 있었다. 그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는, 자신의 얼굴을 후려치며 말했다.
“왕야, 노여움 푸시옵소서. 소인이 스스로에게 벌을 주겠나이다.”
그가 있는 힘껏 자신의 얼굴을 내리치는 바람에 찰싹찰싹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백천범은 스스로를 때려죽일 듯한 그의 모습을 가슴 졸이며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담담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차씨는 묵용감 앞에서 감히 요령을 부릴 수 없어 있는 힘껏 자신의 얼굴을 치는 바람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때마침 사면이라도 받은 듯 일어나라는 묵용감의 말에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뒤, 묵용감을 의자로 청했다.
묵용감이 물었다.
“왕비에게는 앉으라 청하지 않는 것이냐?”
차씨는 애당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학평관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려 그녀를 모시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그제야 잘못을 깨달은 학평관은 침대에 엎드린 채로 죄를 고했다.
“모두 소인의 잘못입니다. 소인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왕비 마마께 서둘러 앉으시란 청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차씨는 두려움에 방향 감각까지 잃어 조금 휘청대더니 의자를 들고 오면서 이곳저곳 부딪히고 말았다. 묵용감은 손을 뻗어 그를 막아섰고, 그에게 의자를 뺏어 제 옆에 두었다. 그리곤 백천범에게 앉기를 청했다.
“왕비, 이리 와서 앉으시오.”
백천범은 얌전히 그의 곁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자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체 문 앞에서 어디까지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학평관도 두려웠던 나머지 눈을 내리깔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차씨는 한쪽에 가만히 서서 초왕의 눈치를 살폈다.
묵용감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 학평관에게 말했다.
“병이 나도 본왕이 널 찾은 적 없다 하였는데, 허면 지난번 네 다리에 부스럼이 생겼을 때, 궁에서 어의를 불러 치료해 준 사람이 누구더냐?”
학평관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려움에 엉덩이가 아픈 것도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왕야께서는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소인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끝이 없어 늘 감사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이번 생, 아니, 다음 생, 다다음 생까지 늘 왕야를 모시며 보답하고 싶은 마음뿐이옵니다.”
묵용감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왕비는 본왕이 변덕을 부리는 것 같소?”
백천범은 난감했지만 그녀는 늘 솔직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를 떠받들어 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조금 그런 편이십니다.”
묵용감은 그녀 또한 자신이 듣기 좋은 말만 들려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어린 계집의 솔직함에 그는 화가 나기도,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적어도 어린 계집은 그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갸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씨와 학평관은 초왕 앞에서 누군가 대담하게 그를 비판하는 장면을 처음 목격했다.
차씨는 그녀가 간이 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질책하지 않는 초왕의 태도도 기이했다.
그런 초왕의 태도에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학평관은 곤장을 맞은 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묵용감이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왕비는 본왕이 소심하다고 생각하오?”
대답하기 조금 곤란한 질문이었다. 백천범은 학평관이 벌을 받은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런 말까지 내뱉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묵용감이 짚고 넘어가니 그녀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왕야와 함께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제가 왕야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좀 더 오래 같이 지내다 보면 알게 되겠지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우스웠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다니.
하지만 그녀의 말은 오히려 그를 기쁘게 했다. 좀 더 오래 같이 지내다 보면 알게 된다니! 그 말인즉슨, 그를 더 오랜 시간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가 곧장 대꾸했다.
“본왕과 함께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하니 마침 식사 시간도 되었겠다. 나와 함께 회림각으로 돌아가 식사를 하는 게 좋겠소.”
* * *
백천범은 드디어 회림각에 다시 발을 들였다. 익숙한 나무와 꽃을 바라보니 감격스러웠다. 늘 기홍과 녹하를 그리워했던 그녀는 걸음을 더욱 재촉해 쏜살같이 앞으로 향했고, 묵용감은 한순간에 그녀와 거리가 멀어졌다.
저에게서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던 묵용감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언제쯤 그도 그녀에게 저런 대우를 받아 볼 수 있을까?
반월문을 지나 긴 복도로 들어선 백천범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으로 향했다. 그녀의 사뿐거리는 발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 묵용감 또한 보폭을 넓혀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문 앞에 도착한 백천범은 발을 걷어 올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두 시녀를 불렀다.
“기홍 언니, 녹하 언니, 저 왔어요!”
묵용감의 방에서 나오던 녹하가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하며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한동안 녹하를 보지 못한 백천범은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녀를 따라 예를 갖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녹하 언니.”
평소 두려울 것 없는 성격의 녹하였지만, 뒤따라오는 묵용감의 모습에 깜짝 놀라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서둘러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소인에게 너무 과분하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백천범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녹하 언니, 저한테 이리 예를 갖추시다니요. 언니도 제가 허울뿐이란 것을 아시잖아요. 제가 저택을 나갈 때쯤 언니도 시집을 갈 때가 될 테니 우리 그때 밖에서 자주 왕래하면서 친자매처럼 지내요.”
녹하가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왕비 마마와 자매가 된다면 왕야께서 분명 가만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가 허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도 뭐라 하지 않겠소. 하지만 적어도 초왕비는 노비들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해서는 안 되오. 앞으로는 기억하시오.”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의 안색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말투 또한 온화했다. 그가 무섭게 굴지 않자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녀가 말끝을 길게 늘어뜨려 애교를 부리듯 말하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묵용감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기홍은 정원 정자에 간 것 같으니 우리도 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