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묵용감은 학평관 앞으로 다가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발로 걷어찼다. 학평관은 헉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고,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킨 뒤 다시 무릎을 꿇었다.
“왕야,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모두 소인 탓이옵니다. 소인에게 곤장을 내려 주시옵소서.”
묵용감은 화가 치밀었다. 어쩐지 어제 그를 대하는 백천범의 태도가 왜인지 모르게 무심하더니! 이리도 많은 고통을 받아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이었다.
좋은 게 생기면 언제나 그녀에게 가져다줄 만큼 백천범을 끔찍이 아끼던 그였다. 비록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각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했지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날 그녀가 호수에 빠지는 소리를 듣고 어떻게든 구해 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헌데 일개 노비들이 감히 겁도 없이 그녀에게 그따위 행동을 하다니!
“그래, 곤장 스무 대를 내릴 테니 가서 형벌을 받거라.”
그가 목청을 높여 영구에게 말했다.
“영구 네가 가서 집행하거라.”
영구는 곧장 대답을 올린 뒤, 다리가 풀린 학평관을 일으켜 세워 방을 나섰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수원상의 모습에 묵용감은 심기가 언짢았다.
“일어나시오. 앞으로는 일을 세심히 처리해야 할 것이오. 왕비는 본왕의 정실인 고귀한 신분이니 절대 소홀히 대해선 안 될 것이오.”
“예. 잘 알겠습니다.”
수원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꿇어앉으니 무릎이 아팠다. 묵용감 앞에서 억지로 참고 버티던 그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추문의 어깨에 손을 얹고 힘없이 말했다.
“어서 날 부축해 다오.”
추문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마, 왕야께서 마마를 어찌 하신 것이란 말입니까?”
어찌 한 것이 아니라 벌로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새색시가 무릎을 꿇다니! 체면이 깎여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고청접이 알게 되는 날엔 분명 그녀를 비웃을 것이었다.
그녀는 추문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후원으로 향했다. 괜스레 까닭 없는 공포심이 밀려왔다. 초왕이 백천범을 이리도 애지중지하다니!
그녀가 모진 대우를 받았다는 말에 총 관리인은 곤장을 맞아야 했고, 그녀 또한 벌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대체 그의 마음이 진정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아끼는 마음이란 말인가? 사내가 여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던가.
그를 떠보기 위해 내뱉은 말로 이런 고초를 겪자 그녀는 그의 마음을 더욱 종잡을 수 없었다.
* * *
학평관은 총 관리인이었기 때문에 곤장을 맞더라도 서너 대 정도의 형식적인 벌만 받아 왔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온 저택이 뒤집어질 만한 큰일이었다.
더욱 기이했던 점은 그 누구도 학평관이 벌을 받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가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초왕에게 발로 걷어차였고, 곧장 벌을 받게 된 게 다였다.
게다가 영구가 형을 집행하면 인정사정 봐주는 법이 없었다.
곤장 스무 대를 맞은 학평관은 엉덩이가 다 터지고 정신까지 잃어 앞뜰에 있는 그의 방으로 옮겨졌다.
총 관리인이 저리 되자 저택의 하급 관리들이 하나둘씩 그를 찾아갔다. 물론 그에게 아첨하기 위해 찾아간 것도 있지만 형벌을 받은 이유를 캐묻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심한 벌을 받은 걸 보면 분명 아주 심각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곤장을 맞은 게 자랑거리는 아닌지라 자신을 보러 몰려오는 하인들의 모습에 그의 주름진 얼굴이 다 붉어질 지경이었다. 엉덩이를 다쳐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괴고 있던 그는 자신을 찾아온 하인들을 본체만체하며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관리들은 그런 학평관의 모습에 그가 민망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시시콜콜 캐묻지 못한 채 그에게 위로를 건네며 가져온 선물을 전했다.
옆에서 그의 시중을 들던 차씨는 그에게 들어온 선물을 정리하더니 입을 헤벌쭉 벌린 채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 동충하초부터 인삼, 호랑이 연고, 녹용고, 홍삼, 말 연고까지 들어왔습니다. 정말 전화위복이 따로 없…….”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학평관이 호통을 치며 그를 나무랐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딴 것들을 받겠다고 곤장 스무 대를 맞고 싶으냐? 자기 일 아니라고 함부로 떠들어 대긴, 사부를 걱정하기는커녕 저것들에만 관심이 팔려 있구나. 다 낫기만 하면 네게 벌로 곤장 스무 대를 내릴 것이다.”
잠시 정신이 팔려 함부로 입을 놀린 차씨는 학평관의 말에 곧장 무릎을 꿇고는 자신의 양쪽 따귀를 번갈아 때리며 말했다.
“사부님, 노여움 푸시지요. 이 제자가 입을 잘못 놀렸습니다. 사부님께서 손쓰실 것 없이 제가 직접 저에게 벌을 주겠습니다.”
학평관은 곤장을 맞은 분을 차씨에게 푼 것이었다. 평소 차씨에게 잘해 주는 편이었던 그는 기분을 풀고 반성하는 차씨에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지금은 몸이 상했으니 부엌에 가서 기름기 있는 음식 대신 담백한 것들로 준비하라고 이르거라.”
차씨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향했다.
학평관은 탁자 위의 선물을 훑으며 하인들이 하나같이 손이 크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몇 개는 봉급에 비해 너무 값비싼 것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가 집안일을 맡지 않으니 앞으로 이들 대다수도 학평관이 아닌 측왕비를 극진히 대할 것이었다. 세상살이가 늘 그렇듯 권력을 쥔 자는 민중과 괴리될 만큼 까마득히 높은 곳에 앉는 게 당연지사였다.
그는 초왕이 집안일을 측왕비에게 맡길 때만 해도 그녀를 주인마님으로 모시게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어느 주인마님이 무릎을 꿇고 벌을 받는단 말인가?
그가 들어갈 때에도 초왕은 측왕비에게 일어나란 소리도 하지 않았고, 뒤이어 들어온 영구에게까지 그 모습을 보였으니 측왕비의 체면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측왕비가 주인마님이 될 수 있을지도 불분명했다.
왕비도 무릎을 꿇고 벌을 받은 적은 있었다. 그땐 다들 왕비를 어린아이로 여겼기 때문에 그저 불쌍하게만 바라보았다. 그녀 스스로도 별일 아니라 여겨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하하 웃으며 넘겨 버렸다.
초왕이 백천범을 벌한 것과 측왕비에게 벌을 준 것을 비교해 보니 어쩐지 백천범에게 준 벌은 귀한 자식을 엄격하게 키우기 위해 내리는 벌 같았다.
오늘 일은 분명 왕비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그는 왕비가 또다시 초왕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이리라 짐작했다. 저택에 없는 며칠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찌 이리 갑작스레 상황이 급변했단 말인가?
차씨가 부엌에 학평관의 분부를 전한 뒤 돌아왔다.
“사부님, 물 좀 드시겠습니까? 이 제자가 꿀물 한 잔 타 드리겠습니다.”
학평관이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대체 저택에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차씨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왕야께서는 조정에서 돌아오시면 공무를 보셨고, 낮잠을 잠시 주무신 뒤에는 낙성각으로 향하셨습니다. 아, 어제는 남월각에 가셔서 늦은 밤에야 돌아오셨습니다.”
학평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리 중요한 일을 어찌 진작 얘기하지 않은 것이냐?”
차씨가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왕야께서 낙성각에 가셨을 때 왕비 마마도 그곳에 계셨다고 합니다. 헌데 왕비 마마께서 왕야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왕야께서 한 손으로 마마를 들어 올리고 남월각으로 가셔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오랜 시간 꾸중을 하셨다고 합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싫어하시는 것은 사부님께서도 진작에 알고 계시던 일이 아니신지요.”
화를 참을 수 없던 학평관은 그에게 미련한 놈이라며 한바탕 호통을 친 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분명 이런 꼴은 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적어도 진즉에 왕비를 회림각에 모셔 왔더라면 곤장 스무 대는 면했을 것이다. 그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 * *
학평관이 곤장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천범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예전에도 곤장을 맞은 적 있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저택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도 그는 자신 때문에 벌로 곤장을 맞았다. 그녀는 학평관의 둔부가 심히 상했다는 말을 듣고는 묵용감의 심한 처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자신에게 잘해 주었던 학평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병문안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허나 마땅히 가져갈 만한 선물이 없었다.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병문안인 만큼 연고나 약재를 가져가거나 하다못해 직접 요리한 탕이라도 가져가야 했지만 백천범은 애초에 음식을 만드는 방법도 몰랐다.
때마침 월규가 며칠 전 서왕비가 가져온 꽈배기를 떠올렸다. 아주 유명한 가게의 것이라 하니 선물을 주기에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결국 백천범은 두 시녀 없이 홀로 꽈배기를 들고 학평관을 찾아갔다.
* * *
영구가 형 집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묵용감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원래는 백천범을 보러 후원에 가고 싶었지만 그간 그녀가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니 볼 낯이 없었다.
영구가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다.
“왕야, 총 관리인의 형 집행을 마쳤습니다. 정확히 스무 대를 쳤습니다.”
묵용감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상태는 좀 어떻더냐?”
영구가 솔직히 대답했다.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좋지 않을 것이었다. 학평관은 이곳의 총 관리인이었다. 그가 종종 군영에 나가 있을 때 학평관은 그 대신 저택을 지켰다. 매일 아랫사람들이 떠받드는 귀한 몸이 언제 이런 고통을 받아 보았겠는가. 아마 이번 일로 적잖이 고생할 것이었다.
그간 학평관과 묵용감이 함께 한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런 하인이었기 때문에 묵용감이 품고 있는 마음을 학평관이 모두 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백천범에 대한 자신의 마음 또한.
하지만 그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형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니. 맞아도 싸지!
“상처에 바르는 약을 두 통 정도 보내 주거라. 차씨에게 사부 대신 잘 발라 주라고 이르고. 그리하면 상처가 금방 아물 것이다.”
영구가 대답했다.
“예, 소인이 바로 가 보겠습니다.”
묵용감이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되었다. 내가 직접 가 보마.”
어려서부터 그의 곁을 지켰던 사람이 호되게 벌을 받았으니 그래도 직접 가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연고 두 통을 들고 느린 걸음으로 중문에 다다랐다. 그때, 저 멀리 후원에서 걸어오는 백천범의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문 옆에 몸을 숨겼다. 심장은 두근거렸고 입꼬리는 조금씩 올라갔다. 그를 찾아왔단 말인가?
묵용감은 그녀가 가까워졌을 때쯤 뛰쳐나가 그녀를 놀라게 해 줄 참이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당황할 때,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안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린 계집아이는 쏜살같이 다가와 또 쏜살같이 그의 눈앞을 지나치더니 앞뜰로 향했다.
설레던 기쁨도 잠시, 그는 마음에 구멍이라도 생긴 듯 공허함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