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수원상이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왕야께서 그리 오랜 시간 계셨는데 이곳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특별한 건 없었고 그저 얘기만 나누었어요.”
수원상이 억지웃음을 보였다.
“저는 왕야께서 대화를 싫어하시는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저와 함께 계실 땐 말씀을 잘 안 하시거든요.”
“한동안 제게 못되게 구시다가 다시 화해를 하니 쉴 새 없이 재잘대신 것 같아요.”
쉴 새 없이 재잘댄다는 표현으로 묵용감을 형용하다니! 수원상은 조금 우스웠다. 어쨌든 백천범의 말에 그녀는 한시름 놓았다. 변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백천범은 곧 저택을 떠날 것이었고, 그녀가 정비 자리에 오를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초왕이 그녀를 여동생으로 대한다고 하니 그녀도 그의 행보를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방을 한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날이 더워졌으니 방 안에 얼음 그릇을 두어야겠습니다. 내일 사람을 보내 왕비 마마께 보내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저야 너무 좋죠. 안 그래도 너무 더워 낮잠도 제대로 못 자는걸요. 월향이 제게 부채질을 해 줄 때마다 땀을 흘리는데 정말 안쓰러웠어요.”
월향이 말했다.
“왕비 마마, 그런 말씀 마시어요. 제가 땀을 흘렸을 때, 마마께서 제게도 부채질을 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왕비의 부채질을 받다니? 시녀의 낯짝이 너무 두껍다고 생각한 수원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왕비 마마의 부채질을 받다니! 담력도 좋구나. 왕야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어찌하려고?”
월향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측왕비는 집안의 일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순간 입을 잘못 놀려 그녀에게 말꼬리를 잡혔으니,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천범이 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제가 그리한 것이니 월향을 탓하지 마시어요. 서로서로 도와주면 좋으니까요.”
수원상이 말했다.
“왕비 마마, 마마께서는 다 좋은데 하인들을 너무 내버려 두십니다. 인정은 인정이고, 규율은 규율입니다. 왕야께서 제게 집안일을 맡기셨으니 이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내버려 두진 않겠습니다.”
“언니, 그러지 마세요.”
백천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진짜 주인도 아니고, 월향과 월규가 제게 얼마나 진심을 다하는데요. 그런 작은 일로 월향을 벌하면 제가 너무 미안할 것 같습니다.”
만약 초왕이 그녀를 정말 의매로 삼으면 그녀와 한 가족이 될 것이었다. 앞일을 대비해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가깝게 지내야 했던 수원상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왕비 마마의 노비이니 왕비 마마께서 지도하셔야 하지요. 저는 그저 그 사실을 일깨워 드린 것뿐입니다.”
그때, 고청접이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 자유분방하게 백천범을 대하던 그녀였지만, 수원상이 함께 있자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수원상에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던 도중 수원상이 추문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느냐?”
추문이 답했다.
“마마, 이미 사시巳時가 다 되었습니다.”
묵용감이 저택에 돌아왔을 시간이었다. 수원상은 백천범에게 회림각에 갈 것인지 물었다. 마침 집안일로 묵용감에게 전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천범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회림각 출입을 허락받긴 했지만, 이제는 저택에 진짜 왕비가 있으니 예전처럼 그리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지 않자 고청접도 따라나서기 어려웠다. 수원상이 자리를 뜨자마자 고청접이 그녀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왕야와 화해도 하셨는데 어째서 가지 않으십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원상 언니가 왕야를 뵐 때 제가 같이 가면 좀 그렇잖아요.”
고청접은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긴요. 왕비 마마는 이곳의 정실 왕비이십니다.”
“전 진짜 왕비도 아닌걸요. 언니도 다 아시잖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왕야께서 어제저녁 이곳에서 식사까지 하시고, 그리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셨다는 것은 분명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고청접은 계획을 바꾸었다.
만약 백천범이 저택에 남게 된다면 그녀는 수원상을 끌어내려야 했다. 정실이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측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야무진 수원상이 집안 관리까지 도맡은 이상 서왕비로 지내는 일도 녹록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달랐다. 계략 따위 쓰지 않는 그녀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몇 마디 말만 붙여 줘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이런 꼭두각시 같은 왕비라면 이 저택의 실질적인 여주인은 고청접이 될지도 몰랐다.
다만, 그녀가 말한 좋아한다는 의미와 백천범이 받아들인 의미는 조금 달랐다. 고청접은 남녀 간의 정을 가리킨 말이었지만, 백천범은 남매간의 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백천범은 그 ‘좋아한다’라는 말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 * *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묵용감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학평관에게 물었다.
“왕비는 와 있느냐?”
그의 질문에 학평관은 어안이 벙벙했다. 학평관은 며칠간 잠시 집을 비웠다가 오늘 아침 저택에 돌아왔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알지 못했다. 아주 익숙한 말투로 묻는 걸 보니 설마 왕비가 다시 왕야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일까?
그가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지 않았다니! 그가 쏜살같이 돌아온 이유는 백천범이 분명 회림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찾아오진 않을지언정 틀림없이 기홍을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니!
그는 실망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안으로 향했다.
목욕을 하고 서재에 간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수원상을 발견했다. 그가 두 명의 왕비를 들인 것은 백천범에 대한 그의 마음을 접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접기는커녕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는 자연스레 두 왕비에게 냉정해졌다.
“본왕에게 볼일이라도 있소?”
“예. 소첩 왕야께 아뢸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작년에는 저택에 여인이 없어 칠석을 쇠지 않았지만, 올해는 왕야께서 세 부인을 들이셨으니 모레인 칠석에…….”
별로 관심 없던 묵용감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측비가 알아서 하시오.”
그가 공문을 펼치자 수원상은 잠시 주저하더니 다시 물었다.
“왕야, 날씨가 더운데 왕비 마마 처소에 얼음이 없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낮잠을 잘 때에도 땀이 흐를 정도라고 하셔서 소첩이 얼음 그릇을 놓아 드리려고 합니다.”
묵용감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비의 처소에 얼음이 없다니, 그걸 이제야 안 것이오?”
수원상은 책망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적잖이 억울했다.
그녀는 집안일을 관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일을 넘겨받았을 땐 왕비가 초왕의 미움을 살 때였다. 그래서 학평관이 인수인계를 해 주면서 왕비의 처소에는 얼음을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초왕의 마음을 떠보려고 물은 말이었건만, 그녀의 잘못으로 몰아세우다니!
그녀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소첩이 소홀했습니다.”
묵용감이 물었다.
“왕비의 처소에 또 부족한 것은 없는지 신경 써 주시오. 왕비는 더운 걸 싫어하니 얼음 그릇을 두 개는 놓아야 할 것이오. 안 그래도 그리 작은데 매일 이리 땀을 흘리다간 바람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오.”
“예. 잘 알겠습니다.”
묵용감은 잠시 생각하고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왕비가 아직 어려 시녀가 있다 해도 빈틈이 생길 수 있소. 측비는 왕비의 처소와 가까우니 왕비를 잘 좀 보살펴 주시오.”
수원상이 속으로 생각했다.
‘낙성각에서는 애꿎은 정원 일만 하시며 말씀을 아끼시던 분이 백천범에 대해서는 이리도 많이 말씀하시다니. 역시 백천범을 생각하는 마음이 작지 않구나. 왕비의 말대로 오라버니로서의 마음이어야 할 텐데…….’
“걱정 마시옵소서, 왕야. 소첩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도 왕비 마마와 함께 아침을 들었습니다. 소첩이 가져간 물만두를 아주 좋아하셨지요. 물만두 여섯 개를 혼자서 맛있게 드셨습니다.”
그 말에 묵용감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째서 측비가 가져간 걸 먹었다는 것이오? 왕비의 것은?”
그저 자신이 백천범에게 잘해 준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던 수원상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곧장 그에게 답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매일 아침 야채 만두 두 개만 드셨습니다. 하여 소첩이 종종 저의 아침을 남월각에 들고 가 왕비 마마와 함께 들곤 합니다.”
묵용감이 몸을 등받이에 기대더니 냉기가 서린 두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물었다.
“어째서 왕비의 아침은 그 두 개뿐인 것이오?”
깜짝 놀란 수원상은 입을 살짝 벌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어찌 그 이유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예전부터 지속되던 이곳의 규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저택 일을 관리했다. 왕비의 아침은 야채 만두 두 개인 반면, 측비의 아침은 고기만두, 물만두, 찐빵, 두유, 계란찜 등이 다양하게 차려진다는 것은 분명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초왕이 화를 내자 그녀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왕야, 부디 소첩을 책망하지 마시옵소서. 그것은 소첩의 뜻이 아니옵니다. 저택의 식사 배급에는 등급이 있사온데, 소첩이 집안일을 넘겨받을 땐 왕비 마마의 등급이… 그때 왕야께서는, 왕야께서 왕비 마마께… 소첩이 총 관리인께도 물어봤지만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하기에 소첩도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묵용감은 할 말을 잃었다. 알고 보니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신이 백천범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으니 그의 눈치를 보며 일을 처리하는 하인들 또한 그녀에게 모질게 대한 것이다.
애초에 그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돌봐 주고 싶었다. 그리곤 한 해쯤 지나 좋은 신랑을 찾아 시집까지 보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무심한 행동이 이렇게 그녀를 힘들게 했다니. 이런 천벌을 받을 노비들 같으니! 그간 백천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스스로가 원망스러우면서 화가 난 그가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당장 학평관을 들라 하라!”
문 앞을 지키던 학평관은 그의 호통에 화들짝 놀랐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앞서 왕비에 대해 물은 걸 보면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학평관은 초왕이 왕비를 후원에 방치한 채 신경도 쓰지 않자 왕비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 사이에는 백 승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왕은 종종 왕비를 떠올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기 때문에 자신도 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왕비에 대한 초왕의 마음이 또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